결국 파란색 실루엣만 남았다. 단순화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많은 소중한 요소들이 거세된 느낌이다. 빨강과 파랑, 그 사이의 하양으로 표현된 태극(太極)의 역동성을 잃어버렸다. 하늘과 땅이 아직 나눠지기 전의 원시 상태, 그 세상 만물의 혼돈스럽지만 강인한 생명력이 사라져
바야흐로 스마트 시대다. 국가별 스마트폰 보급률(2024 기준)을 살펴보면 대한민국(95%)이 단연코 1위다. 우리 밑으로 노르웨이(92%), 아이슬란드(90%) 순이다. 우리나라는 빠른 인터넷 속도와 5G 기술 도입으로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되어 있다. 하교하는 초등
어젯밤은 길었다. 길어도 너무 길었다. 일 년에 꼭 두어 번은 경험하는 ‘잠 못 드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문제는 커피였다. 와이프가 어디서 선물 받은 커피인데 향이 너무 좋다며 유혹하길래 넙죽 받아마셨던 게 화근이었다. 잔다고 누웠는데 쉬이 잠이 오질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이걸 넘거나 무시하다 보면 상호 간의 거리가 깨져 방해나 충돌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런 위험 요소를 방지하기 위해 구축된 문화적 안전선이 곧 매너(manner)다. 매일 우리는 의식을
“대충 아무거나 사!” ‘우리 남편, 지금 배가 많이 고프구나...’ 모처럼 장 보러 시장에 함께 가면 와이프는 먼저 호떡이나 떡볶이 가게로 내 손을 끈다. 예전에는 그저 와이프가 주전부리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배가 고프면 와이프 뒤에서 계속
당연한 말이다. 친구니까. 근데 한평생 친구가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마련되던가? 싸우고 싶어서 싸우고 어쩔 수 없이도 싸운다.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럼 헐뜯고 밤새 고민하다 날이 새면 “어젠 내가 미안했어”, “아냐, 내 잘못도 있지”, “우리 다시 사이좋게 지내자”
새해가 밝았다더니 벌써 구정(舊正)이다. 세상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는 일정한데 그 위에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 방식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또 이별은 ‘문자’로 통보하는 세상이다. 좀 과하지 않나 싶지만 요즘 MZ세대가 헤어
앞으로 판사나 회계사, 의사 같은 직업이 없어진다고들 한다. 인공지능이 이들을 대체할 거란다. 이렇게 가다 보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가 불가피하게 적대적 관계로 치달을지, 오히려 공생관계로 접어들지가 궁금해진다. 미래의 일은 예단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드러날 수많
인터넷에 오른 글 하나에 쌀쌀한 아침부터 가슴이 따듯해졌다. 어머니가 입원하는 바람에 혼자 김장 김치를 만들게 된 어느 아가씨는 마당에서 소금에 절인 배추 물 빼랴, 김치에 들어갈 양념 만들랴 정신이 없었다. “아가씨 혼자 우째 할라고? 그렇게 치대면 김치 다 몬
팬들이 찍어놓은 자신의 영상이 좀 통통하게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걸그룹 멤버가 사과를 했다. 운동을 다니고 있는 근황과 함께 “이제 다이어트 좀 할게요” 하며 몸 관리를 잘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고 한다. 그 사과문에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살이 찐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살이 조금 찌니까 더 보기 좋아요”, “지금도 충분히 말랐어요” 등 긍정적 반응이 주를 이루지만, 유독 눈길을 붙잡는 댓글도 있었다. “살쪄서 예쁘다는 말도 결국 평가입니다” 반백의 아저씨가 어린 팬들 댓글에 씁쓸했던 이유는 그 ‘평가’에서 한국인들의 숨 막히는 경쟁본능을 느껴서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논쟁에 뛰어든 해외 팬들의 댓글에 가슴이 아려온다. “체형은 모두가 다르고 그녀가 말랐든 뚱뚱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예전에는 이런 헛소리를 보고 무시했지만, 이제는 인내심이 떨어졌다”, “살이 쪘다고 사과해야 한다는 현실은 비인간적이고 끔찍하다” 그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헛소리(bullshit)는 지금 한반도의 구성원들이 겪고 있는 집단 무의식에 대한 죽비소리다. 한국인들은 왜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몸무게까지 신경을 쓸까, 아니 써야만 했을까? 1950년대 한국은 경쟁이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집들은 파괴되었고 인구의 3분의 1이 당장 길에 나앉게 되었다. 쑥대밭이 된 전 국토 중에 농업에 적합한 땅은 21%가 채 되지 않았다. 전쟁은 전 국민에게 ‘평등한’ 가난을 남겨주었다. 이것은 무한 경쟁을 위한 평등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그 안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한국 재건에 있어 핵심 분야라면 공무원, 법조계, 의료계, 대기업 등이었다. 몇 안 되는 의자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 국민 단위의 경쟁은 불가피했다. 무엇보다 좋은 머리와 성실함은 대체 불가한 무기일 수밖에 없었다. 대물림되던 가난을 교육이나 시험을 통해 끊으려는 경쟁적 사고방식은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일하는 기계’로 만들어버렸다. 연예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격한 미적 기준을 정해놓고 어린 연예인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인 결과물이 K팝 문화이기에,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만큼 외국 팬들의 비판은 신랄했다. 외모에 대해 긍정적인 댓글과 응원의 박수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하는 식의 부정적 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한국인들의 과한 본능이 만들어낸 슬픈 현실이다. 삶에 여유를 가지거나 가끔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일까? 누가 지쳐 보인다면 주변에서 흔히 해주는 소리가 파이팅(fighting)이다. 휴식이 필요한데 외려 정신 무장을 독려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된 대표적인 한국식 영어(콩글리시) 파이팅은 ‘힘내’라는 격려의 의미로 사용된다. 격려와 경쟁은 다르지만 끊임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주문이 덕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극장 젤 앞줄에 있는 사람들이 일어서면 뒤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일어설 수밖에 없다. 다들 앉아서 볼 수 있고 또 그것이 정상인데도 다들 까치발을 한 채 영화를 봐야 한다면 우습고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거대한 극장이고 관객 모두는 즐기지 못하고 있다. 자발적 선택으로 말이다. 더 이상 GDP가 100불이 안 되던 50년대가 아닌데 말이다. 심한 경쟁은 불필요한 피로감을 유발한다. 우리 자신도 이런 상황을 모순적이라고 느낀다. 이런 댓글이 그 좋은 예다. “남의 눈치를 왜 이렇게 볼까? 과한 열등감과 강박감으로 볼 때 한국은 자의식 과잉 사회다.”, “남들한테 관심 없다고? 말도 안 돼, 남의 흠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즐기고 있잖아, 병적으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이런 와중에 한국인의 경쟁본능을 잘(?) 활용한 케이스도 있다. “트위터에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할 때 예를 들어 ”한국에 설탕을 이용한 전통 요리가 있을까요?“하고 묻는 것보다 ”한국에는 설탕이 들어간 전통 요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단정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그러면 벌떼 같이 달려든 (한국) 사람들이 설탕이 들어간 모든 요리를 제시해 준다.”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다. 살아남기 위해 몸에 새겨야 했던 경쟁본능이 가져다준 딜레마다.
우리 한국인들은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차고 넘친다. 야구나 축구 등 외국과 겨루는 국제 대회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안다. 한국어에 대한 자부심은 또 어떻고. 지금 전국이 “아파트~ 아파트~”로 시작되는 중독성 강한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한국인들이 즐기는 술 게임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가 대박을 친 노래라고 한다. 인터뷰 진행자가 아파트(APT)가 혹시 아파트먼트(apartment)를 말하는지를 묻자 여가수는 “아니, 아파트(apatue)!”라고 교정해 줬단다. 끝의 음을 길게 빼는 한국인 특유의 발음 그대로 말이다. 이건 한국인 영어니까 한국인처럼 발음해야 해 하는 느낌이랄까. 문득 예전에 미국인들이 ‘맥도널드’를 일본인처럼 ‘마꾸도나루도’라고 발음하던 게 기억난다. 이게 소프트 파워(soft power)다. 이런 상황이 적어도 한국을 방문한 외국 사람들 눈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한국인들의 영어 공부에 대한 집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학원 버스를 쉼 없이 오르내리는 모습은 일상이다. 자기 몸통만 한 가방을 멘 채 오늘 배운 영어 표현을 마중 나온 엄마한테 자랑한다. 단어 한두 개를 발음하던 애 입에서 어느새 문장이 줄줄 흘러나오면 엄마 얼굴은 만족감으로 환해진다. 아이들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길 바라는 만큼 영어학원 건물은 높아만 간다. 학령인구의 감소와는 상관없는 현실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영어 공부를 멈추질 않는다. 능숙한 영어는 승진이나 보다 나은 직업을 보장해 준다. 이처럼 영어가 든든한 취업 보증수표로 취급받다 보니 영어를 쓸 일 없는 평범한 회사원에서부터 대기업 회장에 이르기까지 영어에 매달린다. 급기야 영어 발음을 좋게 해주는 수술(설소대절제술: lingual frenectomy)을 해주는 의사도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소개하고 있다. 턱과 혀를 잇는 부분을 절개하면 혀가 좀 더 위로 말려 올라가서 영어 발음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수술 없이도 서구권에서 자란 한국인들 영어는 완벽하다. 괴상망측한 모습은 이게 다가 아니다. 중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대학교 학비 수준의 영어유치원이 즐비하다. 학원마다 미국, 영국,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다양한 출신의 원어민 선생님들이 있고, 미국식 악센트에 대한 수요가 많아 영국인 선생님도 미국식 발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소수이긴 하지만 영국식 악센트가 좀 더 지적이고 고급지다(?)는 이유로 선호하기도 한다. 원어민 선생님에 대한 수요가 많다 보니 “숨 쉬고 있는 백인이기만 하면 언제든지 채용”된다는 어느 원어민 강사의 인터뷰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여전히 학교 수업은 의사소통 능력보다 문법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학원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학원 생태계도 묘한 게 한국답다.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영어를 잘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상급반으로 올려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학원 운영자도 더 난해한 단어와 긴 지문으로 구성된 레벨 시험으로 기존 학생들은 통제하고, 신규생들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서 충성스러운 고객으로 만든다. 부모와 학원도 물론이거니와 학생들도 자기 수준보다 훨씬 어려운 지문과 씨름하다 보면 엄마 잔소리를 안 들어서 좋다. 가수 싸이 덕분에 이제 빌보드 같은 유명 차트엔 한국어 가사 그대로인 노래(아니면 한국어와 영어가 섞여 있는)들이 제법 많다. 반가운 소식이다. 걸그룹 멤버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목소리로 한국어를 가르쳐왔다고 한다. “말 편하게 해요”, “우리 서로 말 놓자” 등의 표현도 배울 수 있다고. 외국 팬들은 이런 방식을 ‘돌민정음(아이돌이 가르쳐 주는 훈민정음)’이라고 부른단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게 한 하이브 에듀(방탄소년단 소속사의 자회사)는 정말 창의적이야!”, “블핑(블랙핑크)이 가르쳐준다니 한국어가 재밌겠는걸” 같은 댓글에서 한국어를 알고 배우고 싶어 하는 그들의 열망을 읽는다. 이처럼 연예인들이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배경에는 외국어를 배우는 그들의 건강한 태도도 한몫한다. 어차피 언어는 소통하기 위한 도구이니까. 하지만 한국에서 영어는 정치적이고 계급적이다. 누구나 영어는 잘하고 싶어 하지만, 설령 잘해도 혀를 왜 저렇게 굴리냐? 눈치 주는 곳이 한국이다. 우리 아이들 눈에 안 튀게 하려고 그 비싼 영어유치원엘 보낸 건 아니었을 텐데...
일본 배낭여행을 갔을 때다.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던 내 옆으로 한 여학생이 급하게 달려간다. 큰 가방을 멘 채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는 걸 보니 까딱하면 학교에 지각을 할 것처럼 보였다. 학생 등에서 요동치는 가방은 마침 열려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사이로 삐져나온 빨간색 필통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뒤에서 걸어가던 나는 황급히 필통을 주워서는 뛰어가는 여학생 뒤통수에다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면서... 그 짧은 순간, ‘와, 이거 청춘 드라마 한 편 찍는 거 아냐?’ 하는 상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필통을 급하게 낚아채 가는 여학생 얼굴이 기대(?) 이상으로 못생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화는 내지 마, 학생. 나도 만만치 않았잖아) 그럼 그렇지, 갓 제대한 나에게 세상은 순수하고 로맨틱한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필통을 건네주는 그 짧은 순간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은 지금도 선명했다. ‘이 필통 주워주려고 나는 제대를 해야 했고, 또 그전에 시간을 벌려고 재수를 해야 했나?’ 한마디로 우연(偶然)을 가장한 필연(必然)이었다. 보이지 않는 선으로 잇고 또 연결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흔한 일상이다. 사이즈가 훨씬 큰 사례가 이번에 발생했다. 올 7월이 반 정도 지나갈 무렵, 마이크로소프트(MS) 사의 클라우드 서버에 오류 발생으로 전 세계는 마비가 되었다. 사소한 오류인데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 호주 항공편이 지연되거나 결항되었고, 기차나 버스 등 다른 운송 수단들도 서버렸다. 영국 방송사는 생방송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은행, 병원들, 그리고 증권회사도 업무가 올스톱되어 버렸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딱 하나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윈도 운영체제(OS)를 사용하는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규모 네트워크의 위험성과 중요성을 한방에 이해시켜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건이 터진 지 이틀 만에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성명을 통해 혼란의 책임은 자사가 아닌 업데이트 오류를 야기한 특정 보안기업(CROWDSTRIKE)임을 밝혔지만 ‘자동차에 오염된 연료를 넣어 엔진이 영향을 받듯이’ 사소한 오류도 IT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자백했다. 이번 사태를 뉴욕 타임스는 ‘세계 경제가 특정 소프트웨어에 얼마나 취약하게 의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충격적 사례’라고 꼬집었다. 부정적 사례이긴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야흐로 초(超)연결 사회임을 선언한 셈이다. 전 세계 퍼스널 컴퓨터(PC)의 과반이 윈도 체재라면 우리에게는 카카오톡이 있다. 버스든 백화점이든 사람이 모인 곳에서 “카톡!” 하고 알람이 울리면 일제히 각자 핸드폰을 집어 든다. 달라진 모습이다. 예전 같았으면 누가 진동모드로 안 바꾸었는지 그 매너 없는 얼굴이라도 보자는 심산이었다면 이젠 완전히 달라졌다. 앱(app) 하나가 우리의 소통 체계를 바꾸어놓았다. 이렇게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는 새로운 기준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고, 이를 통한 우리의 연결망은 더욱 촘촘하고 견고해졌다. 페이스북(2004), 트위터(2006), 그리고 요즘 애들의 주요 놀이터 인스타그램(2010)에 이르기까지 SNS 등장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세계인들의 소통 문화를 전격적으로 바꿀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인간의 뇌 구조도 한몫하지 않나 싶다. 뇌는 사회적(S) 교류(N), 글자 그대로 SNS의 최적화된 모델로 진화되어 온 핵심 영역이다. 생각해 보자. 험한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호모사피엔스는 무리 지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무리에서의 이탈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성은 생존에 있어 무엇보다 우선하는 덕목이다. 오늘날 사피엔스들이 알림 문자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남의 SNS을 보며 울고 웃는 건 어쩌면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SNS가 인간의 관계망 형성을 명분으로 그 전통적 방식을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카톡 같은 문자형 대화방식은 얼굴 표정이나 손짓 등 비언어적 요소는 전혀 전달하지 못한다. 앞에서 언급한 뇌로 표현하자면 메시지 파악을 위해 좌뇌는 필요한데 비언어적 정보를 해독하는 우뇌는 할 일이 없어졌다는 의미다. 초연결 사회를 실현하고자 뇌의 반을 사용할 수 없다니 우리 뇌가 진화상 오류(!)인 웃지 못할 세상이다.
연말이 되면 보통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곤 한다. 연말 기획으로 주로 교수신문에서 공표한다. 한 해를 상징하거나 정리한다는 의미라면 사진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올해를 대표할 수 있는 사진이나 이미지를 꼽아보니 세 장면이 떠오른다. 지극히 사적인 기준에서 뽑았지만 뭐 어떠랴. 올 한 해를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지극히 개인적 감상이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다르질 않구나 확인하는 즐거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뽑은 올해의 작품들 그 첫 번째는 그림이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을 잘 견뎌냈다는 보상이랄까, 꿈에도 예상치 못한 낭보였다. 그저 다른 나라의 잔치 정도로만 알고 있던 노벨문학상(Nobel Prize in Literature)을 우리에게 깜짝 선물한 소설가 한강의 초상화가 그것이다. 노벨위원회 홈페이지에 걸려있는 이 그림에는, 작가 특유의 졸리는(?) 듯한 눈빛에 수줍은 미소로 조곤 대는 목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검은색 붓으로 무심하게 얼굴을 표현했고 그 음영이 머무는 곳마다 재미있게도 금빛 그림자가 머금어져 있다. 바로 옆에 쓰인 수상평에도 그 오묘한 대조는 이어진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한 줄의 문장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 한국 사회는 그녀의 수상으로 촉발된 두 개의 상이한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범’을 꼬집은, 저 멀리 스웨덴 한림원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다. ‘미동도 없이 강렬’했던 자화상이 있다면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강강(强强)인 사진도 있다. 그 속에는 귀에 피를 흘린 채 주먹을 높이 불끈 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뚝 서 있다. 온몸을 던져 그를 지켜내려는 경찰들, 미리 짜놓기라도 한 것처럼 전직 대통령 손에 들려있기라도 한 듯 펄럭이는 성조기, 이 모든 걸 무심히 감싸고 있는 파란 하늘로 역사의 한 장면은 완성되었다. 붉은 피로 번진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싸우자, 싸우자(fight)!” 하는 외침은 실제 들리는 듯 현실적이다. 단상 밑에 있다가 우연히 피격 장면을 찍은 AP사진기자 에번 부치(Evan Vucci)는 말한다. “동영상은 정지한 프레임(frame)과 비교할 수 없다. 정지한 프레임(사진)은 그 순간을 그대로 멈추게 하고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응시하게 한다.” 동영상도 정지된 화면들의 연속이지만 사진과는 분명 구별된다. 무엇보다 사진은 보는 자의 능동적 참여를 허용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영어에 ‘put someone in the picture’라는 표현이 있다. 마치 ‘한 장의 사진 속에 상대를 집어넣을 듯’ 왜곡 없이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겠다’는 의미처럼 말이다, 사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상황) 속을 거닐며 차근차근 곱씹어 볼 여지를 마련한다. 피격당한 전직 대통령의 ‘싸우자!’는 거듭된 주문은 개인이든 집단의 형태이든 인간은 여전히 반목 중이고, 그 대척점에 대한 맹목적 분노 표출로 존재 의미가 정당화되고 있음을 온전히 담고 있다. 올해도 개인적으로는 여린 우리가 여전히 정치나 집단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반목하고 또 경쟁하고 있다. 이번에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사람들과 셀카를 찍는 모습이 찍힌 한 장의 사진이다. 인간을 닮은 로봇은 생일을 맞이한 시민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어슬렁거리다 가위바위보도 한다. 사람들과 제법 잘 소통하고 어울린다. 어떤 이가 점프할 수 있냐고 묻자 “언젠가는...” 하고 대답하고,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묻자 “사람처럼 되는 거”라고 받아친다. 일론 머스크는 “대량 생산된 휴머노이드 로봇은 우리에게 풍요롭고 빈곤 없는 미래를 선사할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로봇 얼굴에서 ‘실험실에서 이젠 인간 세상으로 뛰쳐나온 불확실한 미래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스친다. 세 장의 사진은 각각 다른 배경과 내용을 담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직 두 달이 남았기에 살짝 성급한 올해의 사진은 그러나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묻고 있다. 분명 이런 성찰의 순간들이 모여 또 다른 내일을 만들어 나가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지난 3월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화제의 주인공은 흥미롭게도 휴머노이드(인간의 외모를 닮은) 로봇이다. 인간을 대신해서 하역을 담당하는 로봇인데, 물류 창고에서 무거운 짐을 옮기다 힘없이 쓰러졌다고 화제다. 개발 목적이 아무리 그럴지라도 오랜 시간 쉬지도 않고 작업하다 넘어졌으니 분명 ‘과로’로 쓰러진 셈이다. 하지만 놀랍지 않은가! 쇠로 만든 로봇에게 기어이 감정을 부여하는 인간의 집요한 습관이 말이다. 소프트웨어나 센서의 오류에서 벌어진 단순 해프닝으로 밝혀졌다지만 우린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 영상을 보면 들고 있던 무거운 짐과 함께 스르륵 쓰러지는 로봇이 정말이지 짠하게 보인다. 나흘 동안을 그것도 20시간 이상을 쉬지도 않고 부려 먹을 때 알아봤다, 아이고 못된 인간들, 삐쩍(?) 마른 모습에 공감되는 부분도 없진 않지만,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감정을 이입하는 인간의 관계 지향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문득 ‘가장 웃기는 야생동물 사진전(best of the Comedy Wildlife Photo Awards)’에 출품한 어느 작품이 떠오른다. 미국의 사진작가 디나 스페인손은 남극 어느 섬에서 턱끈펭귄 무리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연히 세 마리의 펭귄들이 자연스레 앵글 속으로 들어왔고 작가는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작품에는 날개가 서로 겹쳐 보였을 뿐인데 마치 서로 손을 잡고 꽃놀이라도 가는지 두 펭귄이 보인다. 사귄 지 일주일 된 아주 따끈따끈(?)한 커플이다. 근데 아뿔싸, 커플 세 발짝 정도 뒤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한 녀석이 눈에 들어온다. 축 처진 날개를 보니 남겨진 전 남자 친구인 듯 처량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저 팔짱은 내가 끼고 있었는데!’ 하는 질투와 분노가 느껴진다. 기발한 작품들을 보면서 점점 단단해지는 사실 하나. ‘인간은 인간의 관점에서 모든 세상을 바라보는구나!’ 가까운 미래엔 주변에 더 많은 휴머노이드형 로봇을 보게 될 것이다. 4족이나 발통 달린 로봇이 넘어질 염려도 없고 효율적이지만 인간 닮은 이족(二足) 로봇이 우리 주변을 지키는 건 당연해 보인다. 우리에게 중요한 덕목은 공감이기 때문이다. 성능 좋은 로봇청소기(줄여서 로청)를 ‘로청 이모’라고 부른 지도 꽤 됐다. 집 안 구석구석을 가사 도우미 이상으로 쓸고 닦는다고 청소기에 이모님이란 훈장을 부여한 거다, 무정물도 인척이 될 수 있다는 상징적 사례다. 집 안에서의 로봇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분명히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야망가 일론 머스크(Elon Musk). 테슬라 자동차 생산 현장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요구되는 소위 ‘만능 이모님’ 휴머노이드를 목표로 교육 중이다. 인간 지능과 유사한 수준의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 시스템을 장착한 로봇을 대상으로 말이다. 방식은 그러나 좀 촌스럽다.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양의 행동 데이터를 하나하나 학습시키는 방식으로. 그러나 만능 이모님 로봇과 일상에서 교감하려면 꼭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몇 있다. 대표적인 게 손가락 제어다. 휴머노이드형 로봇의 손가락 제어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 중이지만 아직 멀었다. 로봇 손의 움직임은 유연하지도 않고, 제어 속도도 사람 손가락에 비해 엄청 느리다. 특히 손가락 힘 조절은 그렇게 어렵단다. 테슬라(옵티머스 2세대)의 경우 엄지와 검지로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잡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부드러운 아기 얼굴을 ‘장난치듯 어루만져’ 재우는 정도의 고급 미션은 언감생심이다. 더 큰 문제는 인간처럼 표정 짓기 아닐까 싶다. 희로애락 인간의 모든 감정의 보고(寶庫)로서 얼굴은 로봇 공학이 반드시 정복해야 할 극점이다. 눈에 띄는 연구 성과라면 일본 동경대의 시도다. 로봇 얼굴(아크릴 기반 수지로 만든)에 인간의 피부 세포를 부착한 것인데, 씨~익 웃을 때 보면 광대가 올라가는 인간의 얼굴을 따라한 노력이 보인다. 하지만 웃고 있는 핑크빛 얼굴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비웃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음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죽하면 얼굴을 얼(정신의 줏대)의 꼴(모양)이라고 했겠나. 약 43개의 근육과 14개의 뼈로 만들어내는 얼굴의 다양한 감정 처리는 인간 블랙박스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생들한테 ‘눈금’이 뭔지 물었다. 그랬더니 한 남학생이 자신에 찬 얼굴로 “피곤하거나 자다 일어나면 생기는 눈에 생기는 이물질”이란다. 그럼 ‘용수철’은 뭐냐니까 옆에 있던 여학생은 “약간 남자 사람 이름 같다”라고 했고, 그 말이 그럴듯해 보였는지 아까 그 남학생은 “아빠 친구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방송에 나온 실제 사례들이다. 그렇다면 요즘 대학생들은 어떨까? 단톡방에서 오고 가는 대화 중에 발췌한 내용들이다. “···과제물을 제출하는 학생은 하루에 과제점수가 20점씩 감점되니 서둘러 제출 바랍니다” 아마 과제물 제출률이 저조하니까 조교가 올린 공지글인 모양인데 급하게 이런 답글이 달린다. “(조교님이) 금일 자정까지라고 하셨잖아요!” 맥락상 상당히 억울하다는 투로 읽힌다. 이때 대화방에 있던 다른 학우가 “금일은 오늘이라는 뜻”이라고 정정을 하자, 그 억울한 학생이 또 떼를 쓴다. “학생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시면서 오해 소지가 있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자신 말고도 금일을 ‘금요일’로 이해하는 학우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면서... 우리말에는 한자어로 된 어휘가 상당히 많은데, 자신도 ‘평가’나 ‘위치’ 같은 용어를 쓰면서 왜 유독 금일(今日)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조교 형님이 잘못한 거라 몽니를 부릴까? 금일을 금요일의 준말로 알고 있었다면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이 헤프닝이 서울대에서 벌어졌다면 좀 다른 이야기다. 서울대생인데도 이렇다면 곤란하단 말이 아니라, 그 초등학생이 그렇게 그 대학생으로 커간다는 사실을 말하는 거다. 나이나 교육의 질 고하를 막론하고 전 국민이 어휘력, 더 나아가 문해력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신호다. 그 여파는 지금 우리나라 곳곳에서 확인된다. 지리한 코로나 사태에 지친 의료진과 국민들 피로감을 잠시나마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정부는 임시공휴일을 지정한 적 있다. 토요일부터 그다음 월요일까지 3일간의 연휴였는데, 문제는 ‘사흘’을 4일로 착각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는 거다. “왜 한자(?)를 써서 사람 헷갈리게 하느냐”는 불만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런 해프닝이 있고 3년이 지나 고등학교 모의고사를 쳐봤더니 사흘을 4일로 착각한 학생들이 여전히 많더란다. 사흘의 ‘사’자가 숫자 4를 닮아서라는 ‘창조적인’ 이유를 달지만 웃지 못할 촌극 수준을 이미 넘어선 듯하다. 그럴듯한 이유야 많겠지만 이 같은 사회 병리적 현상은 환경 요인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스마트 기기 발전과 유튜브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우리 삶의 편리함과 정보적 유익함을 주는 동시에, 그 주된 방식이 문자에서 영상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쉽게 말해, “이제 빼곡히 적힌 글을 꼭 읽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차례라는 말이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화려한 영상에 길들여진 사람들(특히 청소년)은 “굳이?!”라는 부사 하나로 답할 것이다. 두어 시간짜리 영화보다 이삼십 분으로 압축된 영화 리뷰를 선호하는 시대에서는 이상의 어휘력이나 문해력 논쟁이 엉뚱하게 방향을 틀기도 한다. 어느 음식 배달 기사가 배송 완료 문자를 “(주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시고 또 주문해 주세요?”하고 보냈다고 한다. 생뚱맞은 물음표는 기사가 웃는 이모티콘을 주문자한테 전송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몰랐던 주문자는 배달비 지급할 테니 반품 및 환불 처리를 해달란다. 그의 말마따나 ‘이상한’ 문자에 기분이 나빴다는 이유에서다. 이모티콘이나 부호 하나에도 없던 감정을 부여해 오독(誤讀)하는 시대다. 사실 우리는 고의적인 오타로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민족이었다. ‘난 감히 엄해 볼 원두조차 못 내는 여잔데(해석: 내가 감히 원해 볼 엄두조차 못 낼 수준의 여성인데)!’라거나 “찍 죽진해 주세요(쭉 직진해 주세요)!”식의 문장은 우수한 한글을 구사할 수 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챗봇이 한국인들만이 즐기는 암호문(!)을 해독해 버렸다. 원문 그대로 옮긴다. “솔히직 글배열자 이식런으로 바꾼음다에 된쇼뤠꺄쥐 츄갸해뵤리myun G들이 Auto-K 읽을 gun day”(해석: 솔직히 글자배열을 이런 식으로 바꾼 다음에 된소리까지 추가해 보면 AI들이 어떻게 읽을 건데?) 정말 큰일이다.
과자를 먹다가 죽을 수도 있을까? 장난 삼아 물어본 건데 진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 사는 14세 소년이 ‘파퀴(Paqui) 칩스’라는 매운 과자를 먹고 실제 죽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최근 SNS에서 유행인 매운맛 챌린지를 하다가 벌어진 안타까운 사고다. 그 과자에는 리퍼 고추와 나가 바이퍼 고추가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데, 리퍼(Carolina Reaper)는 기네스 세계 기록을 가진, 가장 매운 것으로 공식 인정받은 고추이다. ‘과자를 먹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아무 음료도 마시지 말고, SNS에 올려서 사람들 반응을 볼 것!’. 세상에서 제일 매운 고추와 그 고추를 교배해 만든 고추로 만들었다는 과자 포장지에는 이런 챌린지 규칙이 적혀 있다. 아니, 아무리 챌린지도 좋고 소셜 네트워크도 좋지만, 아이부터 어른까지 접근성 좋은 과자에다가 심장에 무리가 가고 부정맥을 일으킬 정도의 고농도 캡사이신을 첨가했다면 이건 좀 다른 이야기다. 과자는 겉과 속 모두 뻔뻔한 판촉 방식과 노골적인 홍보밖에는 없어 보인다. 힘든 운동을 하다가 보면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가 온다. 숨이 턱턱 막히는 그 힘든 고비를 억지로 넘기다 보면 어느새 천국의 느낌을 맛보는 순간이 온다. 외롭고 힘든 레이스를 펼치던 마라톤 선수가 무릎이든 호흡이든 고통이 정점에 이르는 상황에서 난데없이 맛보게 되는 짜릿한 쾌감이나 도취감이라고 해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다. 문제는 이걸 한번 느끼게 되면 그 맛을 절대 잊지 못한다는 거다. 자꾸 맛보고 싶어지는 거다. 억수로 오는 비를 홀딱 맞아가며 홀로 러닝을 하고 있다거나 무릎이 아프다며 울다시피 하면서도 운동화 끈을 묶고 있다면 그는 분명 이 맛을 아는 사람일 공산이 크다. 누구는 헤로인이나 모르핀을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딱, 그 정도의 의식 상태나 행복감이라고 표현했다. 흥미로운 건 매운 걸 먹을 때도 그 지락(至樂)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스파이스 하이(Spice High)다. 중독성이 아주 강한, 매운맛 마약인 셈이다. 어른들은 흔히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된다지만 기업은 끊임없이 맵부심(매운맛+자부심)’을 교묘하게 자극한다. 붉은 얼굴이 터져버릴 듯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매운 음식을 먹고 또 그 영상을 올리는 챌린지 열풍 이면에는 바로 이 전염성 강한 스파이스 하이가 작동하고 있다. 매운 라면은 식사용이라기보다는 태생부터가 재미나 챌린지용으로 소비될 여지가 다분하다. 덴마크에서 한국의 특정 매운 라면만 전량 회수한 것도 매운 것보다 중독의 위험성을 크게 본 것이다. 월마트나 코스트코 같은 미국 대형 마트에서도 매운 라면이 인기 상품이다. 붉닭볶음면의 경우 한국처럼 5개들이 한 봉지가 우리 돈으로 만 오천 원 정도로 비싼데도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생일 선물(!)로 핑크색 붉닭면을 받아 들고 감격해 우는 미국 소녀 영상이 화제다. 꼬마 숙녀는 받은 선물로 바로 먹방 영상을 찍어 올렸더니 조회수가 무려 6200만 뷰를 기록했다고. 예상치 못한 초대박 홍보에 흥분한 라면 제조사는 소녀 집 대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자 까르보나라 붉닭볶음면이 무려 150박스가 소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화끈한 선물을 받았지만 어느 누구도 화장실에서 고통스러워할(?) 소녀의 현실적 고통엔 관심들이 없다. 핑크빛 매운맛이 심상치가 않다. 얼마나 맵고 중독성이 있는지 매울 신(辛) 자가 쓰인 라면으로 유명한, 40년간 1위를 해온 기업을 싱겁게 만들어 버렸다. 핑크색 봉지 라면을 국내에 선보인 지 12년 만이다. 이제 세상으로 그 외연을 넓히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거치면서 라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다, 주 소비층이 아시아인에서 백인과 히스패닉계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기생충〉 같은 한국 영화(기억난다. 채끝살이 든 짜파구리)나 한국 드라마도 라면 소비를 촉진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을 위해 할랄 인증을 받았고 매운 불닭면에 ‘똠얌(태국)’, ‘마라(중국)’, ‘야키소바(일본)’를 넣는 식의 현지화도 진행 중이다. 마지막으로 경상도 부자(父子)의 대화다. 아버지: 라면 끄리라. 아들: 맵게 끓일까예? 아버지: 두 개! 아들: 맵게 끓일까예? 아버지: 두 개! 아들: 맵~게 끓일까예!! 아버지: 두!!개!! 귀가 어두운 게 아니다. 아버지에게 매운 건 그저 디폴트(기본)값일 뿐이다.
드디어 파리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동의를 바라진 않지만, 올림픽은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가 열광하는 ‘제로섬 게임’의 전형이다. 올림픽이 막 끝난 시점에 좀 뜬금없는 주장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 선수의 승리가 상대방의 실수에서 비롯되는’ 방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그래서 가위바위보가 인간 존엄에 더 부합하는 게임이라고 좋아했다. 주먹만 내기 때문에 주로 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영원한 승자도 또 영원한 패자도 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야구, 축구, 사격이나 수영 등 우리를 흥분시키는 세상 모든 경기의 본질은, 승과 패를 다 더해(sum) 보면 제로(zero)로 수렴된다. 여기에 올림픽 특수를 그냥 넘겨 보낼 수 없는 나이키는 한 편의 광고로 도발을 시도했다.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파리 올림픽 개막에 맞춰 선보인 광고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상대 선수의 눈을 노려보는 도발적인 얼굴을 한 선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장면과 함께. “내가 나쁜 사람입니까(Am I a bad person)?” 쇠를 긁는 듯한 거슬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악당역으로 유명한 미국 배우 윌렘 데포(Willem Dafoe)였다. 경기가 막 시작되기 직전, 농구나 탁구 선수들의 비장한 모습을 교차로 비추며 광고는 그 긴장감을 증폭시켰다. “남을 기만하고 이기적인 나는 그럼 나쁜 사람입니까?” 성우 목소리와 세계 일류 선수인 르브론 제임스(농구)나 음바페(축구)의 얼굴이 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우리(시청자)를 무찔러야 할 상대인 양 도발했다. “난 공감할 줄 모르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아!” 레슬링 선수(맥락상 유명 선수일 텐데 누군지 모르겠다)가 상대방의 목을 사정없이 조르고 있고, 림을 향해 상대가 쏜 공을 무자비하게 블로킹하며 그 과정에서 바닥에 쓰러진 상대 선수를 조롱하는 농구 선수(웸반 야마)의 웃는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쇳소리가 더욱 거슬린다. “난 제멋대로고 동정심 따윈 없지, 이런 내가 나쁩니까?” 미국 단거리 육상계의 마녀 샤캐리 리처드슨과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너무나 유명했던 코비 브라이언트의 일그러진 얼굴은 화면을 뚫고 나올 기세다. 나이키가 작정을 하고 승리의 여신을 악당으로 프레임을 덧씌울 의도가 아니라면 이쯤에서 반전이 나와야 할 텐데...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광고는 이런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누구나 오를 수 없는 승자의 자리(Winning isn’t for Everyone)’ 나이키에 대한 호감도나 판매실적이 예전 같지 않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승리의 여신 니케가 옛 인기를 이으려 ‘무자비한 악당’이라는 부캐로 거듭나려는 시도가 불편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이 광고에 달린 많은 댓글 중에는 “승리는 노력하고 결단력을 가지고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는(challenging yourself) 것이지, 남을 짓밟는(tearing others down) 게 아니”라고 꼬집는 댓글들이 다수다. 이번 파리 올림픽은 시작부터 많은 이슈를 몰고 왔다. 가령 센강 개막식에서 호화 대형 선수단을 보유한 미국이나 중국과 적은 수의 선수가 참여한 콩고의 등장만 해도 그렇다. ‘대형 크루즈’와 ‘모터보트’의 선명한 대조는 나이키 광고의 파리 올림픽 버전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올림픽 개회식 행사가 열린 트로카데로 광장에 오륜기(五輪旗)가 거꾸로 나부끼고 우리나라를 북한(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으로 소개하는 건 좀 큰 실수라고 봐주자. 이미 벌어진 해프닝이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이 어느 58세 중국계 탁구 선수에게는 데뷔전이었다. 놀랍고 반가운 뉴스였다. 탁구 신동에서 이젠 국가대표 에이스가 된 신유빈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아깝게 패했지만 먼저 상대 선수를 일으켜 세우고 껴안아 주던 장면이 좋았다. “상대가 나보다 더 뛰어났다”라고 당당히 인정하고 “더 배워 도전하겠다”는 성숙한 각오가 보기 좋았다. 양궁 10연패 장면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세계 사람들이 숨죽이며 지켜봤을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휴식이나 낮잠 잘 때의 심박수(70~80 bpm)를 유지했다는 게 지금도 안 믿긴다. 승리는 남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거라는 강력한 증거다. ‘은메달밖에 못 땄다’고 외려 미안해하던 시대가 저물고 이제 선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상대방을 무찔러야 할 적으로 몰아가는, 나이키식 광고는 이제 전략을 바꿀 때다.
항생제는 몸에 해로운 세균들의 번식을 억제하거나 죽인다. 문제는 그 세균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는 거다.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super) 세균으로 거듭나 기존의 항생제를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세균들의 반격인 셈이다. 항생제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면 이건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인류 생존의 10가지 위협’ 중에서 항생제 내성 문제를 꼽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눈에도 안 보이는 세균한테 무릎을 꿇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지금 당장은 돌파구(breakthrough)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인류는 늘 그랬듯이 어디선가 반격의 카드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존재를 이어가고 있다. IT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한쪽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딥페이크 사진이나 영상을 퍼트리고 있고, 다른 한쪽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막으려 한다. 딥페이크는 스스로 학습이 가능하다는 의미의 AI 기술 ‘딥러닝(deep-learning)’에다가 가짜를 뜻하는 ‘페이크(fake)’를 합성한 말인데, 재미난 건 딥페이크가 딥러닝의 한 종류인 ‘생성형 대립 신경망’(GAN)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립이라는 단어에서 눈치챘겠지만 생성자와 판별자라는 두 신경망의 경쟁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상호 진화하는 구조라는 말이다. 즉 생성자는 가짜 이미지를 진짜처럼 보이게 아주 그럴듯하게 만들고, 대척점에 있는 판별자는 생성자가 만든 이미지 중 가짜처럼 보이는 걸 솎아내는 식이다. 어느 전문가의 비유처럼 지폐 위조범은 계속해서 가짜 지폐를 만들어 내고 경찰은 즉각적으로 막아선다. 창과 방패의 무한 싸움에 과연 끝은 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강력한 스매싱은 더 강력한 블로킹을 부르고 바이러스 침투나 해킹은 백신과 업그레이드된 방어벽으로 이어진다. 끊이지 않는 이 과정을 무한 반복하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어쩌면 분리와 대립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소통하고 발전해 나간다. 여기서 잠시 다리(bridge)를 한번 떠올려 보자. 다리의 본질적 기능은 무엇인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영역을 이어주는 것이다. 예컨대 섬과 섬을 이어주는 다리는 기본적으로 떨어져 있는 두 섬, 즉 분리를 전제로 한다. 소통은 그 분리에서 시작되고 소통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토함산 그 꼭대기 절에 파란구름다리[靑雲橋]와 흰구름다리[白雲橋]가 존재 이유를 가지게 된다. 산꼭대기에 다리라니 무슨 강이나 바다가 있겠나 싶겠지만, 무지한 중생들이 사는 세상과 부처들만 사는 정토를 ‘구분하면서 동시에 이어주기’ 위해 기어이 다리를 그 사이에 세워 둔 거다. 이 담론에는 분리라는 허무주의도, 그렇다고 소통이라는 낙관주의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서 진리를 마주하고,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면서 이 세상에서 저 진리를 실천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다리(계단)를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거다. 진화이며 발전이다. 사찰 내 다리는 그 자체로 부처의 수인(手印)이나 입보다 침묵하듯 진리를 토해내는 다리고 계단이다. 그런데 현실은 좀 다른 양상이다. 미국 대학스포츠협회(NCAA)가 주관한 수영 대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누가 봐도 남자고 다른 여자 선수들에 비해 머리통 하나는 족히 커 보이는 선수가 여자 자유형 500m에서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그는, 아니 그녀는 생식기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으로 성(性)을 바꾼 트랜스젠더 선수란다. 트랜스젠더 선수라도 경기에 참여할 권리는 있겠지만 남성부 소속일 때 462등 하던 선수가 여성부에 출전해서 바로 1등을 한다면 이건 좀 정상적이지 않다. 차이가 있기에 소통도 있는 거지, 차이를 기어이 소통시켜야 할 명분은 없지 않을까! 미국 매사추세츠 어느 농구 경기장에서는 누가 봐도 우람한(?) 트랜스젠더 선수가 휘두른 팔에 그를 막아서던 세 명의 여자 선수들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산을 깎아서 강을 메우는 것이 제일 어리석다고들 한다. 산은 산대로 강은 강대로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그 하모니(harmony)가 제일 아름다운 법이다.
“20대 승객은 휴대폰으로 문자나 전화하느라 바쁘고, 아줌마들은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휴대폰 찾느라고 바쁘다” 택시 기사님이 오랜 경험으로 하는 말씀이다. 웃자고 하는 소리겠지만 삶은 나이 듦의 과정이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는다는 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험이나 지혜는 주름살 수만큼 깊이만큼만 생기는 결과치다. 와인처럼 숙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살면서 직면하게 될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무기들을 얻는다. 안정감도 특권이다. 젊음의 성마름이 다 지나고 푹 쉬어져야 삶의 불확실성에도 초연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인생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도 세월이 가져다주는 행복이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의 의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청춘들은 외려 얻기 힘든 것들이다. 하나 더. 노년은 어쩌면 인생의 완성인 죽음을 준비하는 절대 시간이다. 푸르른 봄을 경험하고, 지난한 뙤약볕의 여름을 감내하며, 가을의 결실을 맛보고 맞는 겨울, 그 침전과 사색의 시간이 주는 진리라고나 할까. 분위기가 살짝 어두워지니 분위기 좀 바꾸자. 일본의 어느 어르신은 삶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자, 출전이다/ 안경 보청기/ 틀니 챙겨라(79, 남성)” 자못 비장하다. 적장을 노려보고 있는 노장의 기백마저 느껴진다. 다른 어르신의 작품은 또 어떤가. “분위기 보고/ 노망 난 척해서/ 위기 넘긴다(71, 여)” 위기를 그야말로 기회로 뒤집어 버린 되치기 기술이다. 어르신들만의 해학과 넉살 좋은 눙에는 여유가 녹아있다.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67, 여)” 한때는 치료의 대상이었을 비문증(飛蚊症)과 이명(耳鳴)이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가족이 된 셈이다. 병을 ‘기르고’ 있다니 웃기지만 슬픈 이 상황을 이처럼 귀엽게 묘사할 수 있나 싶다. 오랜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이자 삶을 바라보는 통찰이다. 다들 고매한 철학자이신가? 그렇지는 않다. “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73, 남)” 지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65, 여)” 늙고 쇠약해져서 생긴 병이라는 의미의 노환(老患)은 사실 치료 대상이 아니다. 치료하고 고쳐서 낫는 병이 아니다. 우리는 치료해서 쫓아낼 병도 있지만 남은 생을 함께 하는 병도 있음을 배우게 된다. “연명치료/ 필요 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70, 남)” 그래도,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만큼 앞뒤가 안 맞다. 그래도 괜찮다. 인생이 다 그런 거다. 저 먼 별이 빛날 수 있는 건 둘러싼 온 온 세상이 까맣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세상에도 희망은 있다. 잔잔한 행복은 멈추지 않는다. “똑같은 푸념/ 진지하게 듣는 건/ 오직 개뿐(69, 여)” 상상이 간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니(본인은 처음이라 생각하겠지만) 질려버린 가족들은 다 도망가고 없는데, 그 곁을 지키는 반려견은 처음 듣는 듯 듣고 있다. 사람만 친구가 되라는 법은 없다. 따뜻한 지혜와 넉넉한 웃음도 어르신들과 궁합이 좋다. “손가락 하나로/ 스마트폰과 나를/ 부리는 아내(51, 여)” 이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챘나 보다. 그러느라 얼굴엔 주름꽃이 활짝 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있기에 지금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젊어 보이시네요」/ 그 한마디에/ 모자 벗을 기회 놓쳤다(76, 남)” 아, 팽팽한 긴장감이 예술이다. 머리숱이 없는 나도 이 느낌이 뭔지 알 것 같다. 자존심이라기보단 그저 낭만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래도 괜찮다. 아슬아슬하지만 오늘도 살아 있으니까.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75, 남)” 그래서 더 집중하고 싶다. 오늘을 더 부여잡고 싶다. 몸이 그걸 못 따라와 주지만 나름 방법이야 만들면 된다. “손자 증손자/ 이름 헷갈려/ 전부 부른다(40, 여)” 여기에 소개한 작품들은 센류(川柳)라고 하는, 5-7-5 음수율의 짧은 일본 시(詩)다. 이들 모두는 일본 전국 유료실버타운 협회가 주체한 응모전에 뽑힌 작품들이다. 풍자와 익살은 기본이고 일상에서 발견한 작은 순간이나 감정을 포착해 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 모든 게 오랜 세월 켜켜이 축적된 삶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 순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LED 전구/ 다 쓸 때까지/ 남지 않은 나의 수명(78, 남)”
초행길 운전이라면 요즘은 시동을 걸면서 내비(게이션)부터 켠다. 상냥하지만 단호한 내비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다. 너무 편하고 익숙해진 요즘이다. 금방이라도 신호가 떨어질 것 같은데 종이지도 보랴 좌우 살피랴 힘들게 운전하시던 아버지 뒷모습이 아직 선한데, 상전벽해라더니 이제는 내비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다. 뜬금없는 목적지를 주문해 보았다. “덕수네 콩나물국밥!” 곧바로 내비는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하고 답한다. “덕!수!네! 콩나물국밥! 아니, 내 친구 덕수 몰라?” 세 번을 요청했지만 내비는 끝내 내 친구를 이어주질 않았다. 하기야 내 초등학교 친구 덕수를 무슨 수로 알겠나! 요즘 ‘먹거리 여행’을 많이들 간다. 시작은 볼거리 여행이지만 결국 먹거리 여행으로 완성된다. 거기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여유롭게 우물대면서 바라보고 또 사진으로 남기는 풍광이야말로 여행과 추억을 극대화하는 필요조건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식당 검색에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국내라면 SNS나 블로그, 또는 *맵 같은 내비를 활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외국 먹거리 여행이라면 나는 ‘테이스트 아틀라스(Taste Atlas)’를 추천한다. 아틀라스가 지리부도라는 뜻이고 테이스트가 입맛이니까 합치면 ‘맛집 지도’ 정도겠다. 사이트는 스스로를 정의하기를 ‘맛의 백과사전’이자 전통 요리, 현지 식재료, 정통 레스토랑에 대한 세계 지도책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음식문화 내비게이션인 셈이다. 문명의 이기(利器)는 재깍 써줘야 신세를 갚는 것 아니겠나. 내 오랜 친구 덕수를 찾는 심정으로 사이트 검색창에 간장 게장 그리고 산낙지를 차례로 집어넣어 봤다.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 사람들만 먹는 찐 소울푸드라서 둘을 골랐다. 과연 한국인들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데려다줄지 의심의 눈으로 결과를 살펴봤다. 먼저 간장 게장. 먹음직스러운 게장 사진과 함께 국적을 상징하는 태극기가 보인다. 간장을 기본으로 한 전통 간장 게장과 매운맛이 나는 양념 게장 두 종류가 있다는 설명이다. 게장을 담글 때는 항상 살아있는 게를 쓰며, 보통 알이 꽉 차 있는 암게로 담그는 것이 좋다는 설명 뒤에 ‘밥과 함께 곁들여 먹는다’고 쓰여 있다. 아마 밥도둑이란 걸 순화해서 표현한 듯싶다. ‘delicious(맛있는)’나 ‘mouth-watering(군침 도는)’ 등의 표현으로는 비린내는 잡고 감칠맛은 올려 밥 한 그릇 뚝딱하게 만드는 밥도둑의 뉘앙스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별점은 4.2로 별 네 개 하고 반의 반 표시도 재미있다. “일단 허리띠 끄른 채로 따뜻한 밥에 비비면 아마 저세상 맛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어느 코멘트도 적절하다. 이탈리아에서 푸른빛이 도는 꽃게가 생태계 파괴자 취급을 받아 버려지고 있다는 기사가 난 적 있다. 그러자 국내에서 “꽃게를 버릴 거면 차라리 내 입에 버려 달라!”며 수입을 추진하기도 했다는 후속 기사도 난 적 있다. 과연 게장에 진심인 우리 민족답다. 다음으로 산낙지. 사진마저 살아 꿈틀대는 듯 실감 난다. 그 밑에 낙지를 잘게 썰어 즉석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일부 조각이 접시 위에서 꿈틀거리는 게 흥미롭다는 설명이 달렸다. 예상한 대로 영화 《올드보이(2003)》에서 주인공이 산낙지를 먹는 장면을 소개하며 외국인들이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꼽는다고도 했다. 산낙지는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가장 경악하는 음식으로 악명 높지만, 틱톡과 유튜브 문화가 퍼지면서 가장 궁금하고 재미있을 것 같은 음식이란 평도 동시에 받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장 먹어보고 싶은 이색 한식 1위에 뽑혔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어쨌거나 테이스트 아틀라스에서는 산낙지를 세계 최악의 해산물(worst rated seafood) 중 28등, 세계 최악의 길거리 음식 중에서 31등, 최악의 한국 음식 부문에서 8등에 올려놓았다. 외국인 입맛에 산낙지보다 더 심각(?)한 한국 음식들이 뭘까 궁금해서 관련 사이트를 눌렀더니 갓김치가 1등이고 홍어가 2등이다. 그 뒤를 약식, 번데기, 엿, 오징어젓갈, 콩나물국 등이 선정되었다. 음식 랭킹 시스템은 다양한 현지 음식을 홍보하고, 전통 요리에 대한 자부심을 심으며, 먹어보지 않은 요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 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저 애교로 봐달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