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당연한 말이다. 친구니까. 근데 한평생 친구가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마련되던가? 싸우고 싶어서 싸우고 어쩔 수 없이도 싸운다.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럼 헐뜯고 밤새 고민하다 날이 새면 “어젠 내가 미안했어”, “아냐, 내 잘못도 있지”, “우리 다시 사이좋게 지내자” 뭐 이런 식이다. 흔한 결말이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발단도 위기도 절정도 녹아있다. 우리는 싸움으로 더 단단해진다.   그럼 경쟁은 어떤가? 보통 경쟁을 우리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곤 한다. 싸우고, 대립하고, 서로를 넘어뜨리는 과정이 혼란스럽고 자연스럽지 못하게 느껴져서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보면 경쟁이 그저 갈등으로 끝나질 않는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오히려 경쟁은 서로를 더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의 피겨 여왕 김연아 옆에는 항상 아사다 마오 선수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 경쟁은 이렇듯 진정한 균형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다. 경쟁의 법칙은 정치, 경제, 스포츠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속에서도 발견된다. 정치의 예를 들어보자. 요즘 여당과 야당은 치열하게 싸운다. 헝클어진 국가 질서를 바로잡고 국민의 삶을 더 좋게 만들겠다는 명분 아래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한다. 서로 “국민은 자기편”이라며 서로의 발목을 잡는다. 화해와 소통은 패배와 동의어라고 받아들이는지 이 치열한 반목과 대립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전진하는가? 우리가 걸어가는 방식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가령 오른발이 앞으로 나아가면 왼발은 뒤로 물러서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균형 잡힌 대립’으로 넘어지지 않고 오늘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양발을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넘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여와 야가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은 혼란스럽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게 민주주의가 성장하고 사회가 더 발전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 원리는 스포츠에서도 드러난다. 투자업체인 블루아울 캐피털은 매우 흥미로운 전략을 구사했는데, 경쟁과 협력의 역설을 매우 영리하게 활용했다는 평가다. 이들은 일류 스타 선수가 아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선수들을 후원한 것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노바크 조코비치 같은 톱 A급 선수 옷에 로고 하나 붙이는데 연간 300만달러(대충 43억원)가 든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의 전략이 스타플레이어 한 사람한테 묻히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은 반대다. 테니스 경기는 주지하다시피 네트를 중심으로 공이 오고 간다. 비싼 몸값의 선수가 카메라에 잡히면 그다음은 어김없이 블루아울 캐피털이 홍보하는 선수가 잡힌다는 말이다. 적은 돈으로 큰 홍보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 전략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중요한 것은 경쟁은 단순히 승패를 나누는 목적이 아니다, 경쟁은 서로의 존재를 바탕으로 더 큰 그림, 곧 재미난 게임을 완성한다. 블루아울 사례가 주는 교훈은, 경쟁이 아무리 치열해도 그 속에는 서로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우리 몸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부로부터 병균이 침입하면 우리 몸속 면역체계는 즉각 반응하며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항원과 항체 간의 전쟁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이런 갈등으로 우리의 항상성은 유지된다. 병원균과 면역체계의 상호작용은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인 정교한 균형의 결과물이다. 한평생 들었던 마이크를 마지막으로 잡은 가수가 자기 왼팔을 들어 보이며 “그럼 니는 잘했나?”라고 했단다. 비상계엄 사태 후 벌어진 국내 정치 상황에 야당도 잘한 거 없다는 그의 소신 발언이었다. 노래와 정치 평론은 결이 맞지 않다면 부질없는 행동이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왼팔을 그렇게 비판하고는 두 팔 모두 들고 한다는 말이 “왼쪽이 오른쪽 보고 잘못됐다 생난리 친다”고 한 행동은 곱씹어볼 만하다. 오른팔 왼팔 모두 한 몸임을, 우린 그렇게 대립하듯 앞으로 전진하고 있음을 환기하고 있었다. 그는 치열한 대립이 만들어낸 역설적 균형을 두 팔로 노래했다. 이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