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찍어놓은 자신의 영상이 좀 통통하게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걸그룹 멤버가 사과를 했다. 운동을 다니고 있는 근황과 함께 “이제 다이어트 좀 할게요” 하며 몸 관리를 잘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고 한다. 그 사과문에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살이 찐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살이 조금 찌니까 더 보기 좋아요”, “지금도 충분히 말랐어요” 등 긍정적 반응이 주를 이루지만, 유독 눈길을 붙잡는 댓글도 있었다. “살쪄서 예쁘다는 말도 결국 평가입니다” 반백의 아저씨가 어린 팬들 댓글에 씁쓸했던 이유는 그 ‘평가’에서 한국인들의 숨 막히는 경쟁본능을 느껴서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논쟁에 뛰어든 해외 팬들의 댓글에 가슴이 아려온다. “체형은 모두가 다르고 그녀가 말랐든 뚱뚱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예전에는 이런 헛소리를 보고 무시했지만, 이제는 인내심이 떨어졌다”, “살이 쪘다고 사과해야 한다는 현실은 비인간적이고 끔찍하다” 그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헛소리(bullshit)는 지금 한반도의 구성원들이 겪고 있는 집단 무의식에 대한 죽비소리다. 한국인들은 왜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몸무게까지 신경을 쓸까, 아니 써야만 했을까? 1950년대 한국은 경쟁이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집들은 파괴되었고 인구의 3분의 1이 당장 길에 나앉게 되었다. 쑥대밭이 된 전 국토 중에 농업에 적합한 땅은 21%가 채 되지 않았다. 전쟁은 전 국민에게 ‘평등한’ 가난을 남겨주었다. 이것은 무한 경쟁을 위한 평등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그 안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한국 재건에 있어 핵심 분야라면 공무원, 법조계, 의료계, 대기업 등이었다. 몇 안 되는 의자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 국민 단위의 경쟁은 불가피했다. 무엇보다 좋은 머리와 성실함은 대체 불가한 무기일 수밖에 없었다. 대물림되던 가난을 교육이나 시험을 통해 끊으려는 경쟁적 사고방식은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일하는 기계’로 만들어버렸다. 연예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격한 미적 기준을 정해놓고 어린 연예인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인 결과물이 K팝 문화이기에,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만큼 외국 팬들의 비판은 신랄했다. 외모에 대해 긍정적인 댓글과 응원의 박수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하는 식의 부정적 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한국인들의 과한 본능이 만들어낸 슬픈 현실이다. 삶에 여유를 가지거나 가끔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일까? 누가 지쳐 보인다면 주변에서 흔히 해주는 소리가 파이팅(fighting)이다. 휴식이 필요한데 외려 정신 무장을 독려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된 대표적인 한국식 영어(콩글리시) 파이팅은 ‘힘내’라는 격려의 의미로 사용된다. 격려와 경쟁은 다르지만 끊임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주문이 덕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극장 젤 앞줄에 있는 사람들이 일어서면 뒤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일어설 수밖에 없다. 다들 앉아서 볼 수 있고 또 그것이 정상인데도 다들 까치발을 한 채 영화를 봐야 한다면 우습고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거대한 극장이고 관객 모두는 즐기지 못하고 있다. 자발적 선택으로 말이다. 더 이상 GDP가 100불이 안 되던 50년대가 아닌데 말이다. 심한 경쟁은 불필요한 피로감을 유발한다. 우리 자신도 이런 상황을 모순적이라고 느낀다. 이런 댓글이 그 좋은 예다. “남의 눈치를 왜 이렇게 볼까? 과한 열등감과 강박감으로 볼 때 한국은 자의식 과잉 사회다.”, “남들한테 관심 없다고? 말도 안 돼, 남의 흠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즐기고 있잖아, 병적으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이런 와중에 한국인의 경쟁본능을 잘(?) 활용한 케이스도 있다. “트위터에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할 때 예를 들어 ”한국에 설탕을 이용한 전통 요리가 있을까요?“하고 묻는 것보다 ”한국에는 설탕이 들어간 전통 요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단정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그러면 벌떼 같이 달려든 (한국) 사람들이 설탕이 들어간 모든 요리를 제시해 준다.”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다. 살아남기 위해 몸에 새겨야 했던 경쟁본능이 가져다준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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