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오른 글 하나에 쌀쌀한 아침부터 가슴이 따듯해졌다. 어머니가 입원하는 바람에 혼자 김장 김치를 만들게 된 어느 아가씨는 마당에서 소금에 절인 배추 물 빼랴, 김치에 들어갈 양념 만들랴 정신이 없었다.   “아가씨 혼자 우째 할라고? 그렇게 치대면 김치 다 몬 묵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셨는지 동네 어르신들이 고무장갑을 들고 하나둘 들어오시더란다.   그렇게 네 명이 모여서 양념장 간도 봐주시고 김장을 도우시는데, 또 다른 분들이 “이 집 오늘 김장해?” 하며 거드시니 김장이 금방 끝났다고 한다. 날씨가 추웠는데 아주 그냥 대야까지 싹싹 다 씻어주셨다고. 아가씨는 고마운 마음에 김치 한 통씩 가져가시라고, 그냥 못 보내드린다니까 “어유 이런 거 안 받아~” 하기며 쿨하게 퇴장하시더란다. 아가씨가 부랴부랴 수육 삶아서 김치랑 가져갔다가 오히려 귤하고 김치를 받아왔다고.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아직 세상은 따뜻하다’ 혼자 애쓰는 모습에 기꺼이 일일 엄마가 되어준 어르신들, 감동한 나머지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픈 아가씨, 그 모습에 어딜 감히! 하며 사랑의 혼쭐을 더 내주시는... 이들 피 속에는 한국인의 정(情)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UCLA 정신과 의사 크리스토퍼 정(Christopher K.Chung)은 한국인들의 정을 정의하기를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라고 했다. 그 구체적 표상이 ‘우리’다. 그는 “한국인에게 있어 ‘우리’는 집단화된 ‘나’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한국인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 대해 말할 때 ‘나의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의 누군가라고 표현한다. 우리 엄마와 우리나라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니까 ‘우리 손녀’가 김장한다고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어느 외할머니가 고무장갑을 분연히(!) 쥐어 들지 않으랴! 여성 몇 명이 순식간에 우리 손녀, 우리 할머니, 그리고 우리 가족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엄격한 통과의례가 있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겐 익숙지 않는 광경이라고. 바로 큰 냄비에 든 찌개를 삥 둘러앉아 함께 먹기다. 내 입에 들어갔던 숟가락으로 찌개를 같이 떠먹는다니, 한국인 되기가 어디 쉬운 줄 아나? 하지만 그 관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한 가족이, 한 식구(食口)가 된다.   정을 나누는 가족이 되면 구성원들은 서로를 돕는 상부상조의 관계가 된다. 개인의 문제가 이제 집단의 그것으로 바뀐다. 무한 신뢰와 희생이 요구된다. 같은 방식으로 잘못이나 실수도 쉬이 용서한다.   “가족 사이에 미안한 거 없다, 우리가 남이가?”하는 말은 한국 사회니까 가능한 암묵적 원칙이다. 정은 학연이나 지연으로 외연을 넓힌다. 같은 고향, 같은 부대, 같은 학교 동문이란 방식으로 말이다. 가족에 기반한 거대 사회라는 사실은 술집 카운터에서도 확인된다. 서로 술값을 먼저 내려고 얼굴 붉히는 민족은 모르긴 몰라도 우리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정이 가지는 역효과도 작지는 않다. 긍정적이고 가슴 따뜻하게 해주는 정이지만 정치권에서만큼은 정반대다.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은 선진국이지만 부패 문제에서만큼은 후진국이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부패인식지수 조사에서 2022년 기준으로 한국은 31위(63점)다. 이유는 뻔하다. 상식과 법률을 어겨가면서까지 정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부패와 연루된 사건에는 예외 없이 고향, 학교나 군대 등의 연줄이 배후에 깔려 있다. 정에 기반한 집단주의적 성향 때문이랄까,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일면식이 없어도 여전히 정을 느끼고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외국 대학에서 한국인들끼리 붙어 다니거나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을 기피하는 걸로 악명(?) 높다.   이렇게 유별난 한국인들이지만 만약 한국인 중 누군가 해외에서 주목받는다면 그 사람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몇 해 전이다. 타임(TIME)지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온라인 투표로 뽑았더니 후진다오(중국 주석),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 버락 오바마(미국 대통령)를 물리치고 한국의 대중 가수 비가 뽑혔던 적이 있다. ‘태양이 싫다고’ 온몸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그냥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계 정치적 리더들 위에 우뚝 세워 놓은 것이다.   열린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 ‘우리’ 속에 갇혀있지 않나 잘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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