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더니 벌써 구정(舊正)이다. 세상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는 일정한데 그 위에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 방식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또 이별은 ‘문자’로 통보하는 세상이다. 좀 과하지 않나 싶지만 요즘 MZ세대가 헤어지는 방식이란다. 뭐가 그리 바쁜지 세상의 반을 잃은 공허함에 황망해하거나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질 시간조차 없어 보인다. 남 욕할 거 못 된다. 우리 집도 에어컨 리모컨에 유독 ‘터보’ 버튼만 닳아 있으니까.
우리 집에서 그나마 가장 성격이 느긋한 와이프가 살 뺀다며 밤마다 두 알의 약을 복용하고 있다. 어느 연예인이 선전하는 판매 1위 제품이란다. 운동을 해야 살이 빠지지 않을까 싶지만 약이 든 빨간 통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진지해 감히 입을 못 열겠다. 약을 먹은 지 세 달이 되어가는데 기대만큼 효과가 있지는 않나 보다. 와이프 바람대로 ‘한 방’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뭐 그런 비만 치료제 어디 없을까?
지금은 단연코 위고비(Wegovy)다. 덴마크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이 비만 치료제는 확실한 감량 효과를 자랑한다. 개인차(무려 23%를 감량하기도)는 있지만 평균 15% 정도는 빠진다니 기존 치료제를 압도하는 수치다. 주사도 주 1회만 맞으면 된다. 꿈꿔왔던 날씬한 몸매를 거울 너머로 확인할 수 있다는데 뾰족한 주삿바늘이 뭔 대수랴. 역시 비싼 가격이 문제이지만 즉각적인 보상 때문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래서일까, 미국의 노벨상이라고 알려진 래스커상(Lasker Award)은 작년 임상 부분 수상자로 위고비를 만든 연구자 3인을 선정했다. 래스커상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의학상으로 수상자 절반 이상이 실제 노벨상 수상자로 이어진다고, 따라서 세계적으로 9억만 명 이상이 비만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이들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전해진다.
알다시피 위고비는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되었다. 근데 웬걸, 혈당 조절뿐 아니라 위장의 운동 저하 및 포만감 유지에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루한 운동 및 식이요법에서 신속 정확한 주사 처방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은 사람들의 충동을 더욱 펌프질 한다. 미국에서는 작은 사이즈의 옷 입기가 새로운 유행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말한다. 쇼윈도 너머 부럽게 바라만 봤던 옷을, 그 손바닥만 한 옷을 내가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중이란다. 부작용은 시간이 지나 드러나겠지만 지금은 ‘한 방’에 살을 뺄 수 있다는 기적과도 같은 사실에 사람들은 흥분한다. 유튜브의 지루한 영상도 이젠 빨리 감는 게 당연한 것처럼 내 몸에 대한 인식도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면 리셋버튼 한 번으로 언제든지 새로운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된 마당에 즉각적 보상은 기본값이 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마시멜로 테스트란 게 있다. 아이한테 맛있는 마시멜로 한 알을 주면서 “지금 이거 안 먹고 기다리면 이따 두 알 줄게” 하는 충동 조절 훈련 말이다. 이제는 뒤바뀌었다. 아이들보다 참을성이 없어진 성인들 손에는 더 적은 수의 마시멜로가 쥐어져 있을 뿐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살을 한 방에 빼고는 싶지만 그럴 순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아무리 바쁜 세상이고 아무리 돈만 있으면 상상한 대로 다 되는 세상처럼 보여도 절대 불변하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가령 뭔가를 움켜쥐려고 팔을 뻗어도 그 길이는 언제나 똑같다. 욕망은 무한해도 가닿을 수 있는 나는 유한하니까. 걷는 속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갈수록 더뎌지면 더뎌졌지 빨라질 수는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내 입안의 용적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타인과 인스타 세상을 향했던 시선을 나에게로 거두어 보자.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와 거기서 나오는 자극적 영상에만 반응한다고 우리 뇌를 ‘팝콘 브레인’이라고 부른단다. 온라인의 강력하고 현란한 자극에 익숙해지면서 현실에서 받는 느리고 약한 자극에 무감각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격한 차이에서 삶의 중심을 잡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두 다리로 걸어온 속도에 맞춰 내 세상을 살면 된다.
아무리 빠르고 화려한들 나 없는 세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상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나다. 자, 핸드폰은 집에 두고 일단 나서기만 하면 된다. 새해를 그렇게 시작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