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판사나 회계사, 의사 같은 직업이 없어진다고들 한다. 인공지능이 이들을 대체할 거란다. 이렇게 가다 보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가 불가피하게 적대적 관계로 치달을지, 오히려 공생관계로 접어들지가 궁금해진다.
미래의 일은 예단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드러날 수많은 변수를 미리 고려할 수 없지만,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적지 않다. 가령 이런 거다. 과연 AI는 인간을 이겨 먹을 의지가 있을까? 당연히 없다. 일단 인공지능은 의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것은 인공지능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사실의 다른 말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에 달린 전원 버튼을 눌러야 비로소 작동하는 기계임을 잘 까먹는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청소기가 청소가 하고 싶어(?) 안절부절못하지는 않는 것처럼, 인간이 청소의 의지를 품지 않는 한 청소기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진짜 무서운 건 외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려고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경우다.
둘째는 존재 방식에 대한 확인이다. 가령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질 않는다. 그 눈으로 과거를 떠올리거나 미래도 상상한다. 심지어 없는 바나나나 사과를 눈앞에서 그려내기도 한다. 눈은 보는 기능 그 이상을 수행한다. 이렇게 눈, 코와 입 등의 채널로 우리는 보고, 들으며 세상을 구축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포카리스웨트에다 몰래 살짝 오렌지 주스를 섞은 컵을 인공지능에게 내밀어 보자. 0.001%의 불순물도 구별해 내는 AI로부터 인간이 느끼는 것처럼 “망고주스가 맛있군요!”하는 대답을 얻을 순 없다(배합의 묘를 잘 활용하면 실제 망고주스 맛이 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소고기 없는 소고기 라면과 게 없는 게맛살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왜곡과 착시도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또 있다. 인간만이 청국장 냄새에 불현듯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다(당신이 해주시던 청국장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니...). 이런 건 인간밖엔 못 한다. 데이터의 단순 축적과 달리 추억은 나와 더불어 내 몸속 어디엔가 살아 움직인다. 생명은 인공의 지능과는 달리 우리 인간에게나 어울리는 키워드다.
셋째로 AI는 학습 기계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언어 구사 패턴을 파악한 다음 재배치를 통해 확률적 비율을 높여 대화 패턴을 그럴듯하게 모방을 한 걸 가지고 마치 인간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면 위험하다. 그만큼 인간은 감성적이고 그렇지 못한 인공지능에 기대 이상의 인격성을 부여해서는 곤란하다. “오늘은 특히 피곤해 보이시는군요”라고 말을 걸어온다고 내밀한 감정을 마구 쏟아내면 안 된다는 말이다. 감정을 이해하는 것처럼 ‘학습’한 것이지 감정을 느끼는 생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콜라가 목에 넘어가는 그 생생한 경험을 해보질 못한 로봇이 고구마 먹다가 콜록대는 주인님한테 “콜라 한잔 갖다 드릴게요” 하는 멘트에 감탄해서도 안 된다. 시늉과 모방은 이해와 공감(共感)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인간에게는 마음이란 중앙처리장치(CPU)가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특징으로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불변성을 들고 있다. 육체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정신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마음의 영속성은 윤회로 표현된다. 행위의 주체와 그 책임의 주체가 동일인이라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에이아이는 행동의 주체일 수도 없고 행위에 따른 책임도 수반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결국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음의 부재 때문이다. 하다못해 팔을 쭉 편다거나 입을 여는 행동 속에는 마음이 그 주체로 작용하고 있다. 가만있던 팔이 움직이고 다물었던 입이 달싹이기 시작하는 건 그 이면에 마음의 개입을 간접 증명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에는 생명력의 근원(마음)이 깃들어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인공지능은 모방할 수 있다. 하지만 ‘나도 잘 모르는 내 마음’을 흉내 내고 데이터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를 들어 우유부단한 인간은 있어도 우유부단한 로봇은 없다. 장난감 사달라고 때 쓰는 꼬마는 있어도 단언컨대 5살짜리 인공지능은 없다. 무지, 번뇌, 욕망, 엉망진창, 좌충우돌 등등이 그저 우리의 숙명적 한계로만 알았는데 웬걸, 인공지능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원더랜드일 줄이야, 하지 싶다.
이제 2025년(을사년)입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