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동부동 경주경찰서에서 동쪽으로 200m쯤 가다보면 경주읍성을 만날 수 있다. 지난 2018년 말 복원을 마친 읍성 동문인 향일문과 동쪽 성벽 일부다. 옛 신라 왕경을 품은 조선시대 경주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경주시는 현재 경주읍성 복원과 정비를 진행 중이며 향후 서문과 북문 복원도 계획하고 있다.
고려 때 처음 축조
경주에 읍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고려 때로 추정된다. 경순왕이 왕건에게 투항해 신하와 귀족을 이끌고 경주를 떠날 때, 궁성이나 민가를 불태웠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의 자취를 지우려 했다거나 반란의 근거지가 될까봐 훼손했다는 등의 기록도 없다. 하지만 굳이 패망한 나라의 궁궐을 보존해야할 이유 또한 없었을 것이다. 결국 돌보는 이가 없는 가운데 신라궁성은 자연스레 훼손되고 황량하게 변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지금의 경주읍성 일원에 성을 쌓고 관청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현종 때 경주에 동여진이 침범하고, 몽골군이 경주를 초토화시켰는가 하면,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범이 빈번했다. 이런 이유로 성을 더욱 높고 튼튼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성종 때의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경주부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 4075척(약 1904m), 높이 12척7촌(약 6m)이다. 성안에 창고가 있고, 1378년(우왕 4)에 다시 쌓았다. 성안에 연못 3개와 우물 80개가 있는데, 여름과 겨울에 가뭄이 극심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경주는 또 한 번 전화에 휩싸였다. 조선병사와 의병은 왜군이 차지한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왜군이 물러난 이후, 읍성의 증·개축이 계속됐다. 조선 현종 때인 1669년 간행된 ‘동경잡기’에는 “징례문(남문)을 중수하고, 동·서·북의 3개 성문을 차례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에는 성문 이름까지 등장한다. 남문은 ‘징례’, 동문은 ‘향일’, 서문은 ‘망미’, 북문은 ‘공진’이다.
경주읍내전도에 모습 남아
조선시대까지 경주읍성으로 들어서는 주방향은 남쪽이었다고 한다. 부산 동래나 김해에서 양산~언양~내남을 거치거나, 동래에서 울산~외동으로 올 때 만나는 지점은 경주읍성의 남쪽문인 징례문이었다. 또, 대구를 오갈 때도 남문으로 나가서 건천~아화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다.
읍성 북문으로 나가면 곧바로 모래 자갈밭이고 북천이었다. 이 때문에 북문 뒤로는 마을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서문을 이용할 경우 조금만 나가면 서천에 이른다. 서문 앞에서 북문 쪽까지는 큰 마을이 없었다. 서문 앞으로는 대부분 밭이 자리 잡았다. 경주민은 서문을 이용해 현곡, 건천, 모량, 안강을 오갔고, 북문과 동문으로는 안강, 천북, 왕신을 거쳐 포항 연일로 갔다.
이처럼 경주의 지형상 읍성의 남문이 주된 통행로였기에, 남문 앞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반면 서·북문 주변에는 민가가 많지 않았다. 북천, 서천이 통행에 큰 장애물이었던 탓이다.
지도를 살펴보면 북천과 서천 물이 모여 형산강을 이루고 영일만으로 빠져나간다. 강물 때문에 경주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연일까지였다.
이처럼 강을 따라 오가던 배들이 정박해 쉬어가기도 하고, 이곳저곳 물건을 사고 팔다 자연스럽게 강변에 형성된 시장이 ‘연일부조장’이다. 죽도시장이 경북 동해안 최대 전통시장이라면 연일부조장은 조선시대 경북상권의 중심이었다. 일제가 신작로를 내고 철길을 놓기 전까지는 현 포항에서 경주까지 주 통행로는 양동, 안강, 모량 쪽이었다.
성곽 복원이 이뤄진 동문 앞은 현 성동동이다. 정조 22년인 1798년에 만든 ‘경주읍내전도’에는 민가 227호가 있다고 표기돼 있다. 남문 앞 저잣거리와 동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데,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시가지가 남문 앞으로 더욱 확장됐다고 한다.
조선 말 상당수 성벽 붕괴
일본인들이 경주에 처음 들어왔을 때 경주읍성의 모습은 어땠을까. 성문 중에서는 남문과 동문이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초기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남문 누각에 여러 아이들과 어른이 올라가 있는 사진이 있는데, 성문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도 조선말에서 대한제국을 거치는 사이 행정력이 쇠퇴해지면서, 관아에서 성문을 돌보고 지킬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읍성 사진들을 보면 허물어진 성벽과 물이 말라버린 해자 등의 모습에서 당시 읍성의 전반적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토성도 아닌 석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 포탄이 떨어지지 않는 한, 나무뿌리가 파고들어 석재의 틈새를 벌려 놓지 않는 한, 혹은 강력한 지진 등의 충격이 없는 한, 돌로 쌓은 성벽이 무너지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상황을 가정해보면 지진으로 인해 무너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그때 불국사와 석굴암, 분황사탑 등과 함께 무너졌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 만들어진 ‘경주읍내전도’를 보면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읍성 성벽이 건재했고, 관리 또한 잘 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가지정비 위해 허물어
일본인들이 경주에 들어오기 이전 경주읍성은 징례문과 향일문 정도만 온전했을 뿐 상당 부분이 붕괴된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제는 본격적인 성벽 철거에 나선다.
일제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해 전국 주요 도시에 대한 시가지 정비계획을 세우고, 1912년부터 조선 국권을 상징하는 각종 건축물과 전국 각지의 성벽을 본격적으로 허물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1907년 남대문 북쪽 성벽 철거를 시작으로, 1908년부터 1911년 사이에 서소문, 흥인지문 부근 성벽을 없앴다. 돈의문과 혜화문의 주변 성벽도 허물어버렸다. 조선의 도성을 자신들의 통치전략에 따라 개조시켜 나간 것이다.
경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은 경주에서도 조선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징례문 철거를 시작으로 성벽도 차츰 걷어냈다. 학계에 따르면 징례문 철거 시점은 1912년쯤으로 추정된다.
1931년 제작된 ‘읍내시가지도’를 보면 경주신사가 있는 동쪽 성벽 일부만 남긴 채 경주읍성 성벽은 모두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시가지 전체를 격자형으로 만들고, 읍성도 그 틀에 맞춰 동서남북으로 성벽을 뚫고 대로를 냈다. 조선시대의 경주읍성이 아닌 그들의 시가지 형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읍성 철거를 통해 신라시대의 우수한 석조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내 신라미술관 앞뜰에 있는 ‘나한상 모서리기둥’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경주읍성 상태에 대한 정보가 실린 ‘신라구도 경주고적도휘’에는 ‘당시 파괴된 성벽에서 신라시대 석물 조각이 나왔고, 23점이 박물관(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정원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23점 중 하나가 나한상 모서리기둥이다. 이 돌기둥이 정확히 읍성 어느 지점에서 발견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경주읍성 내에는 사찰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읍성 외곽에서 옮겨와 성벽용 돌이나 관청 장식재 등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1920년대 성벽을 전부 철거시키면서 읍성 안과 성벽에 있던 신라 때 주요 석조물을 전부 박물관으로 옮겼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