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도심 한복판에 절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인 법장사다.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대릉원·황리단길 인근에 있지만, 호기심 많은 일부 외국인 관광객을 제외하면 대다수 관광객들은 이곳을 무심코 지나친다.
법장사는 도심 외곽이나 산자락에 있는 사찰보다 규모가 작다는 점을 제외하면 여느 절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대웅전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기존 사찰에 비해 단청이 상당히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 건물은 불교 건축양식을 따라 짓는데 반해 법장사 대웅전은 조선 말 관청 건물을 재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절이 활용한 건물은 경주읍성 내 동헌 건물 중 하나인 일승각이다. 이런 점에서 법장사 대웅전은 눈여겨 볼만하다.
KT&G 경주지사 자리가 옛 동헌 터
조선시대 읍성은 지방의 주요 거점에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이 복합돼 나타난 성곽이다. 일반적으로 읍성 내 주요 관아 건물은 동서남북 네 곳에 있는 4대문을 연결하는 십자로의 동남부에 집중적으로 배치됐는데, 그중에서도 지방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 건물이 동헌이다.
조선시대 경주부(府)에는 지방 장관인 부윤이 파견됐다. 부윤은 지방 수령 중에서 품계가 가장 높은 종2품 관직이었다.
부윤은 일반 수령과 마찬가지로 수령7사(守令七事)를 주 임무로 했다. 농업과 잠업 장려, 호구 증가, 학교 진흥, 군정(軍政) 정비, 부역(賦役) 부과, 송사 처리, 풍속 교정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지방 군사 조직인 진관(鎭管)의 책임자인 절제사(節制使)를 겸직했다.
조선시대 경주부 내의 행정과 사법, 세무, 병무 등 각종 업무를 총괄한 책임자가 부윤이었다.
동헌은 부윤의 근무처였다. 이곳에서는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이 모두 행해졌다. 부윤의 살림채인 내아는 사헌이라고 불렀는데, 동헌과 내아는 담이나 행랑으로 격리돼 가운데 좁은 문으로 통했다.
1798년 간행된 지도인 ‘경주읍내전도’를 보면 행정 중심부인 동헌 입구에 내삼문이 있고, 그 안에 동헌과 함께 일승각이 있다. 동헌은 부윤의 집무처이고 일승각은 부윤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휴식하는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동헌이 있었던 곳은 현재 경주문화원 옆 KT&G 경주지사 자리다.
일승각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18세기 중엽 제작된 ‘해동지도’를 비롯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지승’과 ‘여도’에서는 일승각을 ‘제승정’으로 표기했다. 반면, 1798년 제작된 경주읍내 전도에서는 ‘일승각’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돼있어, 그 이름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부윤 흔적 황성공원에 남아
당시 사람들이 동헌을 찾아가려면 홍살문, 징례문, 월성아문 등 여러 문을 통과해야했다. 현재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과 경주경찰서 사이 골목이 그 길이다. 현재 경주경찰서 관사 앞에는 월성아문이라는 이름의 2층 규모 문루가 있었다. 월성아문을 들어서면 내삼문이 있고 그 안에 ‘일승각’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부윤의 집무실이 있었다. 이런 구조는 부윤이 그만큼 높은 주체와 존엄성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동헌의 외삼문에 이르면 모든 사람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내왕했다고 한다. 이곳엔 부윤이 말을 타고 내릴 때 편의를 위해 설치된 계단석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안뜰 야외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부윤의 흔적은 경주시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5종의 ‘선생안’(先生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생안은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근무한 관원의 이름과 생년, 본관, 부임·이임 시기 등을 기록한 문건이다.
기록에 따르면 유광우가 계림부윤으로 처음 부임한 이래 1894년까지 502년간 경주를 거쳐 간 부윤은 모두 339명이었고, 평균 재임기간은 17개월 정도였다. 이후엔 부윤이 아닌 경주군수로 직제가 바뀌었다.
부윤은 행정은 물론 병무까지 총괄했기에 관복은 물론, 갑주와 투구까지 갖췄다. 갑주에는 놋으로 된 비늘을 달고 투구에는 봉황과 용 장식을 넣어 위엄을 더했다고 한다.
경주읍성 일원에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 부윤을 기리는 경주부윤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선정비를 통해 행정, 조세, 세무, 병부, 사법뿐만 아니라 문예를 진흥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임무까지 맡았던 부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매로 팔린 아픈 사연
일제강점기 일본은 경주읍성 내 관아 건물을 차지한 뒤 행정기관을 재배치시켜 경주를 통치했다. 처음에는 조선시대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경주부윤이 집무했던 동헌은 경주군청으로 활용됐다. 일제는 동헌 건물만으로는 부족해 동헌 건물 옆에 일본식 건물을 추가로 건립해 사용했다. 내아는 1915년에 경주고적보존회로 넘겨 진열관으로 쓰게 했다.
이후 업무 증가에 따른 공간협소를 내세워 1920년부터 새 군청 건립에 대한 목소리가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34년 건립 공사에 들어가 1935년 초 새 군청을 완공했다. 현재 탑마트가 있는 곳이 일제강점기 경주군청이 있었던 자리다.
다음은 동아일보 1934년 7월 20일 자에 담긴 ‘경주 군청사 신축’에 대한 기사다.
“경주군청은 300여 년 전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여 왔음으로 고빈귀객이 많이 왕래하는 경주로서는 적지 않은 유감으로 여기며 소화 원년(1920년) 이래 숙제이든바, 지난 17일 비로소 총독부의 양해로 설계가 완성되어 오는 8월에 착공해 금년 말까지 낙성케 할 예정. 신청사는 구 동경관을 기지로 하고, 총공사비 1만4000원에 160평, 3층 양옥이며, 아래층은 사무실과 군수실, 응접실로 하고 위층은 회의실에 충당하리라 한다”
일제는 옛 군청 터를 경주세무서로 넘겼으며 세무서는 그 터에 일본식 건물을 세웠다. 그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계속 쓰이다가 1999년 담배인삼공사 경주지점이 새 건물을 세우면서 철거됐다.
한편, 옛 동헌 터에 일본식 건물인 세무서가 들어서기 전, 일제는 동헌을 경매물건으로 내놨다. 낙찰 받은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경주의 거부였던 정두용, 정좌용 형제였다. 낙찰된 동헌은 대문(삼문, 三門)에서부터 동헌의 지하시설물, 섬돌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현 대릉원 뒷문 맞은편으로 옮겨져 기림사 포교당으로 활용됐다. 광복 이후에는 불국사 포교당으로, 또 경주불교학생회의 중심 공간으로 활용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법장사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주 동헌 일승각이었던 법장사 대웅전은 조선관아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수백 년 풍상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경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