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건물들 사이로 봉긋하게 솟은 신라 고분의 부드러운 곡선. 경주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그런데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 서편엔 특이하게 생긴 고분이 있다. 다른 무덤과는 달리, 낮고 평평한 모습이 마치 누군가 무덤 위를 뭉텅 잘라낸 것처럼 생겼다. 슬프고도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한 ‘서봉총’(瑞鳳塚)이다. 스웨덴 황태자, 경주 고분 발굴하다 1926년 경주시 노서동에서는 웬 서양 사람이 바닥에 엎드려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였다. 그 옆에는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발굴이 끝나자 황태자는 현장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을 상자에 담았다. 천년도 넘게 잠들어있던 금관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자, 황태자 일행과 일본인들이 손뼉을 쳤다. 스웨덴 황태자가 일본인들이 함께 경주의 고분을 발굴한 이유는, 이 시기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경주역 인근에 기차를 보관하는 창고를 짓는 데 흙이 필요하자, 이 고분에서 흙을 파내 썼다. 이 같은 계략을 꾸민 건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 모로가 히데오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촉탁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 아키오(1897-1993)였다. “금관을 비롯한 모든 부장품을 그대로 두고 전하의 도착을 기다리겠다.” 이 짧은 글은 1926년 9월 고이즈미 아키오가 교토제국대학 고고학교실 교수 하마다 고사쿠에게 보낸 전보 내용이다. 당시 서봉총에선 조선총독부에 의한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2주일 정도 뒤에는 그 현장에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유명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와서 발굴조사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이 전보를 통해서 고이즈미가 서봉총에서 발견한 금관 등 부장품을 수습하지 않고 스웨덴 황태자가 마치 처음으로 발굴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유물을 다시 원상태로 메웠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일종의 ‘조작’이었다. 이처럼 서봉총 발굴조사는 순수한 학술조사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봉분을 잃어버린 슬픈 사연 경주 고분 발굴은 5년 전인 1921년 금관총 발굴 이후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해 어마어마한 양의 화려한 부장품은 고대 신라의 영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천년의 고도 경주’의 위상을 한층 더 높였고, 조선 각지나 일본에서 많은 관광객이 경주로 오게 되는 계기가 됐다. 경주 수학여행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고적조사과를 신설해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고적조사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탁월한 처세술로 경주의 권력자가 된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 모로가 히데오나 경주에 자리잡은 일본인 상인들은 금관총뿐만 아니라 다른 고분도 발굴될 것으로 기대했다. 새로운 고분 발굴을 통해 더 많은 보물이 발견되면 될수록 관광지로서 경주의 위상은 높아지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데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선총독부는 고분 발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조선총독부가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모로가 히데오는 집요했다. 1924년 4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조선 남부 시찰을 위해 경주에 왔을 때, 모로가는 사이토와 함께 봉황대에 올라가서 봉분이 많이 손상된 남쪽 고분 2기를 발굴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사이토 총독은 모로가의 요청에 응했고, 재정이 어려운 총독부 대신에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발굴 비용을 부담할 것을 약속했다. 그렇게 발굴된 고분이 금령총과 식리총이다. 그 성과는 금관총에 못지않았다. 모로가가 그 다음으로 노린 고분이 서봉총이다. 이 고분의 경우 많이 남아 있는 봉토가 문제가 됐다. 대량의 봉토를 옮기기 위해선 많은 인부가 필요하기에 만만치 않은 인건비가 예상됐다. 많은 흙을 어디로 옮겨두는가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이때 모로가와 고이즈미가 계책을 꾸몄다. 서봉총을 발굴하려고 했던 1926년은 경주역을 새롭게 짓고 기관고를 설치하는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1918년 현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처음 문을 연 경주역은 관광도시의 관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건물이었다. 대구나 포항에서 경주로 들어오려면 형산강 건너편 서악역에서 한번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경주역 신축공사엔 정지작업을 위해 많은 흙이 필요했다. 원래 다른 곳에서 흙을 가져올 계획이었으나 어떤 사정으로 흙 반출이 어려워지게 되자, 모로가와 고이즈미는 경주역 신축공사에 필요한 흙으로 서봉총 봉토를 활용하는 계략을 꾸민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있을 수 없는 난폭한 발굴 방식이다.   아프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 서봉총 발굴은 1926년 7월 말부터 시작됐다. 그 무렵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 부부는 신혼여행 차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고고학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교토제국대학 고고학교실 교수 하마다 고사쿠가 그를 교토·나라를 비롯한 일본 유적지로 안내하고 있었다. 이때 구스타프는 경주에 가서 신라 고분 발굴에 참여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 제안은 고고학자 한 명의 개인적 발상으로 보긴 어렵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사업은 ‘일선동조론’이나 ‘신공황후 삼한정벌설’과 같은 식민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물질적 증거를 찾으려는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해외에선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정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 목소리가 속출하던 때였다. 총독부는 그런 비판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선정(善政)을 보여주는 대외홍보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마치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선한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널리 심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배경에서 서봉총 발굴은 ‘대외홍보’의 일환으로 실시됐다. 그것은 총독부 연출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주역으로 발탁돼 진행된 교묘한 ‘정치쇼’였던 것이다. 유물 출토 작업을 마친 뒤 경주 최부잣집에서 열린 저녁 만찬에서 일본 관리들은 황태자의 방문을 기념해 스웨덴의 한자식 표현인 ‘서전’(瑞典)을 딴 서전총으로 명명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구스타브 왕세자는 “천년 찬란한 신라의 왕실을 모독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결국 이 무덤엔 스웨덴의 한자식 표현 앞 글자인 ‘서’와 금관에 장식된 봉황의 앞 글자를 따와 ‘서봉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구스타프 왕세자는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들러 신라유물을 둘러보고, 전시관(현 경주문화원 향토사료관) 앞에 전나무 묘목을 방문 기념으로 심었다. 9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나무는 크게 자라 창공을 향해 높이 솟아있다. 그 앞 검은 표지석엔 ‘서전국왕 구스타프6세 아돌프 폐하 경주방문기념식수. 1926년 10월10일’이라고 적혀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아프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다.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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