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동리는 왠지 어색하다. 하지만 엄연한 시인이었다. 소설가가 아닌 시인 김동리는 익숙하지 않지만, 소설에 앞서 시로 먼저 신춘문예에 등단한 시인이다. 1995년 세상을 떠났을 때 미발표 유고시 30편이 발견되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소설이 아닌 시였다. 시작과 끝이 시였던 셈이다. 소설가 김동리에 밀려난 감은 있지만 분명 시를 쓴 시인이었다.   처음도, 마지막도 시인 동리의 마지막 소설 작품은 1979년 10월 《문학사상》에 발표한 「만자동경曼字銅鏡」이다. 쓰러져서 돌아가시기 전 15년 정도 소설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86년 12월 《문학사상》에 발표한 「나의 문학과 샤머니즘」 이후 돌아가시기 전 9년간 평론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후 1989년 계간지 《민족과 문학》 창간호에 「세월」 외 9편의 시를 발표했다. 동리 스스로 후학들이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습작 삼아 쓴 시라고 스스로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리 사후에 서영은 선생이 고이 간직해온 유고시 30편을 1998년 7월 《문학사상》에 발표했다. 시가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리의 시는 문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서 문학평론가 이동하는 “우리의 뇌리에 소설가로 남아있기에 시인 김동리는 왠지 어색하다. 소설이라는 금자탑에 가려 있지만 김동리를 평가함에 있어 시를 배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동리 문학적 생애가 서정시로 시작되고 서정시로 마무리 지었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감이 되는 말이다.        신춘문예와 시인부락 동리는 1934년 《조선일보》에 시 「백로」로 소설보다 먼저 시로 문단에 데뷔했다. 1937년 서정주 김달진 등과 같이 《시인부락》을 결성하고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인부락에는 김동리, 서정주,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김광균, 여상현 등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시인들이 함께했다. 문학적 이념보다는 각기 개성 있는 시인들이 만나 문학과 술자리를 함께하는 우호적 친목 그룹이었다. 시인부락의 초대 편집 겸 발행인은 서정주가 맡았고, 통권 5호를 내고 종간되었지만, 이 무렵만 해도 동리는 시인들과 교류하며 활동하던 시인이었다. 특히 스무 살 언저리에 만난 미당과 동리는 문학 친구이자 술친구였다. 이 시기에 동리와 미당 사이에 일어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별도로 소개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동리의 시는 작품 수도 많지 않고 소설만큼 탁월한 평가를 받진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시인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집 『바위』와 『패랭이꽃』 1973년 회갑 기념으로 제1시집 『바위』(일지사)에는 시인부락 동인 시절 이래 써 온 작품 61편이 실려있다. 시집 『바위』의 후기에는 동리의 글이 실려있다. “같은 언어의 예술이라 해도, 소설과 시가가 그 성질을 달리하는 것은 전자가 보다 더 언어의 태양면(太陽面)을 구사한다면, 후자는 보다 더 무주면(巫呪面)에 의존하는데 중용한 이유가 있다. 전자는 형상이요, 후자는 영상이다. 전자는 육체를 갖춘 생명이요, 후자는 육체를 거세한 영혼이다” 소설과 시뿐만 아니라 동리 문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어록이다. 스승 동리를 “모국어의 산맥은 위대하다”라고 표현했던 이근배 시인은 시집 표제작이기도 한 시 「바위」를 동리의 대표시로 꼽기도 했다. 1983년 제2시집 『패랭이꽃』을 고희 기념으로 출간했다. 어린 시절 못 견디게 유혹하던 뒷내벌(북천)에 지천으로 널린 패랭이꽃에 대한 고마움으로 시집 제목을 『패랭이꽃』으로 했다. 처음엔 이승과 저승으로 하려다가 패랭이꽃으로 변경했다. 필자가 어릴 적 고향 신평마을 거랑에서 보았던 그 패랭이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개발로 원형이 사라진 그곳에는 지금도 알게 모르게 패랭이꽃이 피고 진다. 뒷내벌 중간인 보문단지 호숫가에 <패랭이꽃> 시비가 세워져 있어 더더욱 의미가 깊다.   시집 제목이 되었던 시는 모두 분위기 있는 노래로 만들어졌다. 「패랭이꽃」은 가수 이동원이, 시 「바위」는 최백호가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폐도(廢都)에 떠오르는 기묘하게 아름다운 무지개 시집 『바위』에는 이무기에 대한 시가 두 편이 있고, 유고 작품집 중에는 무지개라는 제목의 시가 두 편이나 있다.내 어려서부터 술 많이 마시고까닭없이 자꾸 잘 울던 아이울다 지쳐 어디서고 쓰러져 잠들면꿈속은 언제나 무지개였네- 김동리의 유고시 「무지개 1」 일부하늘과 땅 사이엔사랑의 무지개이승과 저승 사이 다리 놓는 무지개- 김동리의 유고시 「무지개 2」 일부 이무기와 무지개는 형상은 달라도 지상과 하늘을, 이승과 저승 사이를 잇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과 시집 속 문장으로는 수도 없이 많이 만나볼 수 있다. 동리가 경주에 오면 자주 찾아가는 곳이 바로 예기청소였다. 그곳엔 이무기가 사는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서울에서 고향 경주를 찾는 마음은 다음의 시에서 살펴볼 수 있다.아아 이렇게 고향에 다녀오듯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올순 없을까내 맘속에 언제나 있는 건오직 고향과 저승- 시 「귀거래행」 일부죽음을 통해 넘나들 수 있는 이승과 저승은 동리 문학세계의 근간이며, 시와 소설과 문학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 장소가 바로 경주였다. 소설가이자 부인이었던 서영은은 다음과 자문자답했다.   “경주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경주는 김동리 안(內)의 핵이었다” 동리도 목월과 마찬가지로 생전에 고향땅에 묻히길 원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된 이야기가 수필 속에 나온다. 그의 영혼은 이미 경주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서천 강물 소리를 듣거나, 첫사랑 소녀 선이가 잠든 서산 진달래꽃으로 피거나 그리고 간간이 경주 하늘에 무지개로 걸리는지도···. 스무 살에 만나 시와 소설로 한국 문단을 양분했던 미당 서정주는 동리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던 한국 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일 몸살을 앓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르는 기묘하게 아름다운 무지개여.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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