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청년의 첫 만남 김동리(1913~1995)와 미당 서정주(1915~2000)는 우리나라 시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은 스무 살 언저리에서부터 시작한다. 1933년 동리가 스물 하나, 미당이 열아홉이던 시절 선학원(禪學院)에서 처음 만났다.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동리의 큰형 김범부 선생이 존재한다. 동리를 만나기 이전부터 미당은 이미 큰형인 김범부의 강의를 듣던 제자였다. 김범부 선생이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서 동양철학 강의를 할 무렵 동리는 상경해서 큰형의 도움으로 모처에서 숙식하며 신세를 지고 있었다. 당시 미당은 고려대 뒤편 대원암에서 묵으면서 불경 공부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선술집을 찾았고 랭보, 보들레르, 토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미당의 거처인 대원암에 올라가서 하루종일 뒹굴기도 했다. 한 사람은 경주에서, 한 사람은 전북 고창에서 올라온 시골 청년들이었다.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술친구이자 문학 친구가 되었다. 한마디로 말이 서로 통하는 사이였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듯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과 시로 나란히 당선되었다. 동리는 소설 「산화」로, 미당은 시 「벽」으로 당선이 된 참 묘한 인연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동리는 이미 한 해전인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었으며, 또 소설보다 먼저 1934년 《조선일보》에 시 「백로」가 당선된 바 있는 신춘문예 3관왕이었다. 「화랑의 후예는」 김시종으로, 「산화」는 김동리 이름으로 당선되었는데 당선자의 주소지는 해인사였다. 당시 받은 상금은 50원이었는데, 그 돈으로 양복을 맞춰 입었고 일부는 술값으로 나갔다. 「오감도」의 이상 시인을 만나러 간다는 미당에게 새양복을 전당포에 맡기면서까지 돈을 빌려준 이야기가 동리의 수필에 등장한다. 그 이후에는 반대로 동리가 공덕동 미당의 집에서 보름간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돈을 빌려주고 잠을 재워주기도 하는 허물없는 사이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두 청년이 시로 소설로 한국문단을 양분할 줄 누가 알았을까? 두 사람이 나란히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그해 일어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다. 미당의 시집 『화사집』에 수록된 시 「엽서」는 동리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시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미당이 같은 고향 출신의 연극배우 여인을 맘에 두고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말을 못 건네고 속앓이를 하고 있을 때 미당이 써준 편지를 들고 동리가 대신 씩씩하게 찾아갔다. 그 여인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미당에게 전하게 되는데 이때의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그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저승에 가서 하자는 내용이다.소쩍새 같은 계집의 이야기는, 벗아인제 죽거든 저승에서나 하자(중략)파촉(파촉)의 울음소리가 그래도 들리거든부끄러운 귀를 깍아버리마.- 미당 서정주 시 「엽서」 일부   시인부락 시절의 에피소드 1936년에 서정주·김동리·김달진·함형수·김광균 등이 참여하여 《시인부락》은 창간했다. 비록 1937년 12월 통권 5호로 종간되었지만 초대 편집 겸 발행인은 서정주(徐廷柱)였고, 김동리도 여러 시인들과 교류했다. 시인부락 시절 동리와 미당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83년 《신동아》 3월호에 수록된 「최일남이 만난 사람들 - 서정주 시인의 안 잊히는 날들」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김동리가 시를 써서 미당에게 들려줬다. 김동리가 쓴 시에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이란 시구가 있었다. 그 구절을 듣고 미당은 너무도 마음에 들어 절창이라며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그랬더니 김동리가 미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아,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 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즉 동리가 ‘꼬집히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이라고 쓴 것을 미당은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이라고 들었던 것이다. 미당은 후일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동리를 보고하는 말이 “그래서 자네는 소설 쪽으로 가야하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만큼 두 사람은 허물이 없는 사이였다. 이 일화를 소재로 이시영 시인은 「젊은 동리」라는 시를 썼다.술이 거나해지자 젊은 동리가 젊은 미당 앞에서 어젯밤에 잠 아니와서 지었다는 자작시 한 수를 낭송했다. “벙어리도꽃이 피면 우는 것을.” 미당이 들고 있는 술잔을 탁 내려놓고 무릎을 치면서 탄복해 마지 않았다.“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 .....이라.내 이제야말로 자네를 시인으로 인정컸네.” 그러자 동리가 그 대춧빛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대꾸했다.“아이다 이 사람아.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 ......이다”미당이 나머지 한 손으로 술상을 광 내리치면서 소리쳤다.“됐네 이 사람아!”- 이시영 「젊은 동리」 전문   말이 통하는 사이 두 사람은 술이 통하고 말이 통하고 영혼이 통하는 사이였다. 말이 통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의미를 뛰어 넘는 것임을 동리는 「미당과의 만남」이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함께 한국 청년문학가를 만들고, 함께 예술원 회원이 되기까지 그 긴 시간 속에 항상 같이 보조하며 지내왔다. 누가 누구를 이끈다거나 민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져 왔다고 말했다. 문학관과 인생관 심지어 술과 여인을 그리워하고 자유를 귀히 여기는 것까지 서로 통하는 사이였다. 이처럼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은 전생의 인연이 닿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의 유의법에서 벗어나 이루어진 관계같다. 두 거장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무언가에 홀려 쓰여진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1948년 발행된 미당의 두 번째 시집 『귀촉도』에는 김동리의 발문이 있다. “나는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나의 유일한 정신상의 재보(財寶)로 쌓아왔다. 그의 인격과 자유분방한 시혼은 그의 처녀 시집 『화사집』을 통하여 이미 세상에 그 비늘을 번득인 바 있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건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건 적어도 이 땅에서 시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오늘날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이 혹성의 찬연한 관망과 위치에 등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1978년에 간행한 김동리의 작품집 『꽃이 지는 이야기』에는 미당이 서문을 쓰기도 했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시와 소설의 영역을 넘나들며 교류를 하며 축하했다. 이들 두 사람의 마지막 교류는 미당이 쓴 동리의 묘비명이다. 미당이 쓴 동리의 묘비명 1995년 김동리가 작고한 이듬해 천하의 미당이 천하의 동리 묘비명을 썼다. 당시 세간의 관심사이자 문단의 화제였고, 대한민국 문학사의 하나의 사건이었다. 동리에 대한 미당의 최종 표현을 모두 궁금해했다. 미당은 거침없이 썼다.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던 한국 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일 몸살을 앓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르는 기묘하게 아름다운 무지개여” 두 사람은 이제 이곳에 없다. 여기에서는 차고 넘치는 존경과 찬탄을 한 몸에 받았고, 더러 손가락질과 욕을 얻어 먹기도 했지만, 그기에서는 오롯이 술잔을 사이에 두고 오롯이 문학이야기만 할 것 같다. 서로 통하는 사이라서 여기나 그기나 다름없을 것 같다.       전인식 시인(전문기자)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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