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지난 2023년 12월부터 2025년 2월까지 연중기획 ‘다시 돌아보는 효자, 열녀비’를 통해 13회에 걸쳐 총 31곳의 효자·열녀비에 담긴 내용을 다시 소개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본지에 기고했던 고 함종혁 선생의 글을 토대로 효자·열녀비를 다시 찾아 나선 것. 이를 통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보았고, 특히 소중한 문화유산인 비각의 현재 관리상황까지 점검해 보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연중기획을 통해 일부 비각의 관리 부실을 지적했고, 경주시의회 의원 발의로 ‘경주시 향토문화유산 보전 조례’가 제정돼 비지정문화유산의 체계적 보전·관리가 가능하도록 이끈 것은 하나의 성과다. 이번 호에서는 그동안 보도한 내용 중 독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던 효자·열부 이야기를 되짚어보고, 연중기획 ‘다시 돌아보는 효자, 열녀비’를 마무리한다. /편집자주
비지정문화유산 체계적 관리 근거 마련
본보 1618호(2024년 1월 12일자)를 통해 2곳의 비각에 대한 부실한 관리를 지적한 결과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해당 비각은 내남면 소재 효자 최치백 정려비와 불국동의 효부손씨·효부최씨 양세정려각 등 2곳이다.
효자 최치백 정려비는 1629년 조선시대 인조가 그의 효행을 듣고 효자비를 세우라고 명하면서 건립됐다. 비문은 당대 명필가인 이광사 선생의 친필로 서예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효부손씨·효부최씨 양세정려각은 순조 2년(1802년) 지방을 순시하던 암행어사에 의해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세운 비다.
하지만 이들 비각은 관리가 되지 않아 비각 내외부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다.
비지정문화유산에 대한 관리 주체는 소유자·보유자, 문중 등이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방치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 현실이다. 향후 그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도 있는 의미 있는 비지정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관리가 시급한 이유였다.
이 같은 사실을 보도한 후 경주시의회 이경희 의원은 지난해 6월 행정사무감사에서 경주시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어 지난해 연말 열린 경주시의회 제2차 정례회에서 오상도 의원이 대표 발의한 ‘경주시 향토문화유산 보전 조례’가 통과되면서 비지정문화유산의 체계적 관리를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조례에는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경우 보전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담고 있다. 특히 향토문화유산의 보전에 필요한 경비는 소유자·보유자 또는 관리자의 부담으로 하되,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필요경비의 70%를 지원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에 따라 훼손돼있는 비각의 후손 또는 문중에서 향토문화유산 지정 신청 후, 경주시 향토문화유산위원회를 거쳐 지정되면 보존 조치에 따른 경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이 조례 제정을 통해 열리게 됐다.
왜적도 감동한 효부이씨의 효행 ‘마을 살려’
안강읍 갑산리 소재 효부이씨 정려비(孝婦李氏 旌閭碑)에는 임진왜란 당시 적장이 효행에 감복해 마을이 왜적의 침탈로부터 면하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져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비의 주인공인 이씨는 안강읍 죽전마을에서 태어나 영천군 창수마을의 문중으로 출가했다. 하지만 결혼한 지 1년도 못 돼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어머니마저 괴질로 운명했다. 이후 이씨는 친정 집안 어른들로부터 양반 가문의 후실로 재가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홀로 지내는 앞을 볼 수 없는 시아버지가 걱정돼 재가할 마음을 낼 수 없었다.
이후 이씨는 시아버지를 설득해 죽전마을로 모시고 정성으로 섬기며 살았다. 그러던 차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씨는 시아버지를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에 갑산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시아버지와 함께 왜적에 붙잡혔고, 이씨는 “아버님을 죽이려거든 나를 죽여라”하며 대항했다. 왜적들은 이씨를 사정없이 매질했지만, 시아버지만 살려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를 지켜보던 왜적 장군이 이씨와 시아버지에 대해 알아보고서는 그 효행에 감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왜장은 이 씨에게 “훌륭하신 부인을 몰라뵙고 무례하게 행한 일을 용서하오”하면서 사과하고, 부하에게 명령해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그 왜장은 ‘효부의 마을에 함부로 들어가 동민을 해치지 말라’는 글을 써서 마을 입구에 표식을 남기고 떠났다. 이후 왜적들은 갑산마을을 지나치면서도 동민들을 괴롭히거나 약탈 방화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갑산마을 사람들은 ‘이씨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온 마을이 왜적의 참화를 모면했다’며 이씨의 효성을 기리는 효부각을 세워 오늘에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자신의 살 베어 남편 살린 영양남씨
분황사 동쪽에 세워져 있는 이부인영양남씨창렬비(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의 비문은 비장함을 느끼게 했다. 이 비각은 6.25전쟁 때 북한군의 총에 맞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붙여 살려낸 열녀 남씨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6.25 전쟁 당시 남편 이진우 씨는 마을청년 10명과 함께 마을회관에서 경비를 하고 있다가 무장공비에 의해 크게 부상을 입어 생명이 위태로웠다.
이를 발견한 부인 남씨는 의사가 ‘생살을 베어 이식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살을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잘라 내 병원에 내어 주고 이식수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남편 진우 씨는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다리가 시원치 못해 절뚝절뚝 절면서 1982년 74세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불구의 몸이 되어 부인이 구걸행상으로 남편을 공양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문중에서 1973년 3월 이곳에 비석과 비각을 세우고 창렬각(彰烈閣)이라 했다고 한다.
[에필로그] 홍씨일문양부인열행비
연중기획의 마지막 차례로 홍씨일문양부인열행비(洪氏一門兩夫人烈行碑)를 소개한다. 이는 과거 본지에 보도되지 않은 곳으로, 그동안 효자·열녀비를 찾아다니면서 우연히 발견한 의미 있는 비각이다.
경주시 외동읍 영지(影池) 남쪽에 위치한 원동마을 입구에 남양홍씨세천(南陽洪氏世阡)이라는 글씨를 한자로 새겨 놓은 큰 비석이 나온다.
이 비석 바로 옆에 한옥 목조 비각 1동이 자리하고 있다. 이 비각 내에는 홍씨일문양부인열행비(洪氏一門兩夫人烈行碑)라는 한자를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비각에는 이 비석 뿐만아니라 기문, 상량문, 정렬각, 1729년 정려받은 ‘열녀 홍계발 전처 김씨지려(金氏之閭)와 열녀 홍계발 정씨지려(丁氏之閭)를 쓴 5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비각의 유래를 알리는 안내문에는 김씨와 정씨는 남편이 병들자 간호를 하며 길쌈을 하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호랑이가 나타나 남편을 해치려는 것을 보고, 김씨는 홑이불로 호랑이를 덮어 씌우고, 정씨는 방망이로 호랑이를 때려 잡아 남편을 구했다고 한다. 이같이 남편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행동한 부인들을 기리기 위해 열행비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주풍물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영조 때 홍계발의 처 경주김씨와 후처 나주정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영조 5년(1729년)에 정려하고, 그 다음해에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한편 원동마을은 조선시대 세워진 원사(院舍)가 있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 경주와 울산을 잇는 큰 길가에 원사를 지어 식량과 취사도구, 신발 등을 두고 행인에게 제공해 준 원이 있어 원골, 원곡, 원동이라 불리고 있다. 지난 2005년 경주시는 원골못(원동저수지)과 대밭을 품은 원동마을을 환경친화마을로 지정해 농촌자연환경체험마을로 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