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거기서 태어난 사람들만의 고향이 아니요, 우리 민족 모두의 고향이다. 우리나라 민족문화의 모든 원형이 경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족문화의 고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위 문장은 일향(一鄕) 강우방(1941~ ) 원장의 저서 『강우방 예술론-예술과 미술 사이에서』의 첫 페이지 첫 문장이다. 필자는 오래전 이 책을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조금 비싼 가격으로 구입했다. 곰팡이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다행히 깨끗해서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미술이나 사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닌데 열공의 자세를 가진 것은 관심 분야이기도 했지만, 경주 인문학을 연재하면서 더 많은 넓이와 깊이의 공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책을 펼칠 때마다 한 번씩 울컥한다. 그분의 경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대하고 지극했는지를 느끼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이나 문화재를 공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주 사람들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가벼운 글을 쓰기 바쁜 필자가 학계의 대가이자 현존하고 계신 분에 대해 언급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한 꼭지를 남기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향 강우방 선생은 경주박물관장으로, 대학교수로 학계에 최고의 전문가이자 권위자라는 사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금도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으로 최근까지도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연구서를 발표할 정도로 왕성히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분이 일생에 걸쳐 이룬 학문적 업적과 성취보다는 경주와의 인연, 그리고 경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경주라는 인드라망 경주와의 인연은 마치 보이지 않는 인드라망에 의해 그대는 경주에 가서 살아라 하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질긴 인연의 끈은 고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경주 첫 방문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친구 셋이서 경주를 방문하여 유적지를 돌아다녔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 후, 대학 시절이던 1965년 홀로 천년고도 경주를 두 번째로 방문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땀범벅으로 걸어 올랐으며, 버스를 타면 하루가 걸리는 감은사지와 동해 바다를 마주했다.   그날 일기장에는 ‘언젠가는 신라문화를 꼭 연구하겠다’라고 썼다. 놀라운 일은 대학 졸업 무렵이었다. 1967년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할 당시 전공을 독문학에서 미술사로 바꿔 공부하고 싶었지만 막연했다.   그는 무작정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경주역 앞 근화여고로 무턱대고 들어가서 교장선생님을 찾아뵙고 청하기를 이 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며 신라문화를 연구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수녀인 교장 선생은 어안이 벙벙했다. 갑작스런 방문으로 선생이 될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교사자격증도 없었다. 어떡하면 경주에 정착할 수 있을까 방법을 찾아 보았지만 묘안이 없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편입을 했고, 그리고 결혼을 했다. 미술사 강좌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중퇴하고 국립박물관에 임시직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학예사가 되었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사직했다. 경주는 내 운명 열 달을 쉬는 동안 불현듯 깨달음이 오듯 ‘그래 경주로 가자, 경주에 가면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경주행을 결심했다. 돌 지난 아들, 두 달된 딸을 품에 안고 경주로 이사를 했다. 이때 도움을 주신 분이 최순우 선생이었다. 1970년 12월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학예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경주 생활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자리가 없던 최초의 학예사 자리였다.   박일훈 관장의 도움으로 사무실 뒤 두 평 남짓 조그만 방을 연구실로 삼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5년간 삼국유사를 정독하고 본격적으로 신라문화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주의 유적들을 손끝으로 느끼며 희열을 느끼곤 했다. 처음으로 마주했던 남산 삼릉계곡에 관음보살상과 대면을 시작으로 석굴암, 불국사, 성덕대왕신종, 용면와 등 찾아낸 비밀들이 어디 한 두 개 일까? 독보적인 한국미술사 연구의 기초는 경주에서 다져진 것이다. 책도 없고 선생도 없는 경주에서 상대할 것은 오로지 유적, 유물뿐이었다. 다른 연구가와 달리 책만이 아닌 유물과 몸으로 소통한 세월이었다. 발로 찾아가고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땀 흘리며 호흡하며 이룬 성과였다.   수 많은 저서들 책갈피에는 구 박물관(현 경주문화원)의 노란 은행나무잎과 남산 솔내음과 배반 뜰 바람 소리가 가득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뿐이겠는가! 경주 남산 바윗 속 부처님 말씀과 성덕대왕신종 종소리도 덩덩 울려 나올 것이다. 1982년까지 12년을 현장에서 호흡하면서 청춘을 경주에서 보냈다. 1997년 다시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해 와서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경주를 떠날 때까지 매일 박물관 뒤뜰 고선사지 탑을 버릇처럼 찾기도 했다. 고향 잃은 외로운 탑과의 선문답을 주고받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시작이 경주였으니 끝도 경주이기를 나름 문화재와 불교 공부를 한다고 불교문화해설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불교 미술을 강의해 주시는 분이 중앙승가대 강소연 교수이다, 바로 강우방 선생의 딸임을 가장 최근에 알았다. 얼굴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불교와 미술 분야의 해박함까지 닮았다.   사실 대를 이어 같은 분야에 투신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부친 못지않은 불교의 깊이를 미술 작품을 통해 배우고 있다. 단순 지식이 아닌 지혜까지 배우고 있으니, 필자는 복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일향 강우방 선생에 관한 이야기는 일 년 열두 달 내내 연재해도 다 싣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넓고 깊다. 희미하던 영기화생(靈氣化生)도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아울러 수많은 저서 속 경주 이야기는 다음편에 간략히 요약해서 싣고자 한다. 강우방 선생의 학문의 시작은 경주에서 시작하였기에 마무리도 경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경주 사람들 애정을 담아서 기념관이라도 세울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어려운 일이라면 아래의 문구를 고속도로 입구나 경주역 앞에 하나 세우면 어떨까? 경주를 찾는 내외국인이 쉽게 볼 수 있도록.......   “경주는 거기서 태어난 사람들만의 고향이 아니요, 우리 민족 모두의 고향이다”(“Gyeongju is not just the hometown of those who were born there, Gyeongju is the hometown of all our people”)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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