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임스 강변에 있는 영국 왕림 그리니치 천문대를 가다. 런던 근처 전철역에 내려 ‘그리니치 공원’으로 향해 걸었습니다. 넓은 잔디밭을 지나, 테임스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공원언덕에 ‘영국 왕림 그리니치 천문대(Royal observatory greenwich)’가 있었습니다. 세계표준시인 지구경도의 원점(0도)이 정해져있던 세계 유일의 천문대인데, 그 시계가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기둥에 붙어있답니다. 이 천문대는 1675년 찰스2세에 의해 영국이 대항해시대를 맞아, 항해술 연구와 세계의 ‘시, 공간(時, 空間)’장악을 위해 세워졌다고해요. 그리고 워싱톤 회의(1884)에서 이 천문대를 지나는 선(線)을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으로 하여 세계 각국에 선포했다고 합니다. 이 곳은 영국 왕실이 휴게소로 이용하던 왕실 정원으로 테임스강을 내려다보던 망루가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2차 대전 때 켐프리지 대학으로 옮겼다가 1998년 문을 닫았고, 지금은 원조 천문대 박물관 역할만 하고 있어요. 그리니치란 이름은 이곳 런던 주변 동네 이름(Greenwich)을 따서 지은 것으로, 테임스 강과 런던시내 일부가 내려다보이는 공기 맑고 조용한 곳입니다. 옛 고교시절 책에서만 보고 그 이름을 열심히 암기하던 그 천문대를 반세기가 지난 지금, 수륙만리 건너와서 직접 볼 줄이야. -천문대 근처에 있는 영국 ‘울프’장군의 동상 천문대 앞 쉼터에 하늘로 높이 솟은 멋진 동상이 멀리 테임스강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천문대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닌 가 여겼는데, 영국 제임스 울프(1727-1759)장군의 동상이더군요. 그는 영국군이 카나다의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 군과 7년간의 싸움 끝에, 1759년 퀘백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카나다를 영국령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용감한 장군입니다. 30대의 젊은 나이로 전사함으로써 국가에 충성을 다한 그의 혼을 기리며, 또 이곳 그리니치에서 살았다고 해서 동상을 세웠다고 하는 데, 아마도 이 대영제국의 천문대를 잘 지켜 주십사 하는 바람에서 이 장군을 옆에 모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국 ‘국립해양박물관’과 ‘넬손제독 겔러리’ 이 공원 아래에 대영제국의 해양역사를 눈여겨 볼 수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이 있습니다. 250여만점의 해양수집품이 보존되어 있고, 영국해군의 발자취도 잘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이곳에는 트라팔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물리쳐 승리한 넬손 제독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해전관련 유물, 전투기록자료, 주화등 기념유품들을 별도 공간에 진열하여 놓고, 그를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는 적의 총탄을 맞고 숨질 때 “내 임무를 다할 수 있게 해준 신(神)께 감사한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3시간 만에 숨졌다고 해요. 그때 생긴 총탄 자국과 핏자국이 선명한 제복도 걸려있어요. 이곳 그리니치는 영국의수도 런던 옆에 붙어 있으면서, 대영 제국의 패권의 상징적인 도시로 보입니다. 제국의 패권에 열정적이던 엘리자베스 1세의 고향이며, 그녀에게 충직했던 울프 장군이 살았던 곳이에요. ‘세계의 모든 시간은 그리니치 천문대로부터 흘러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곳에 세계의 모든 시간과 공간까지 장악, 그 원점의 본산인 천문대를 만들고, 해양역사관까지 세우고, 국가에 충성한 유명장군을 추념하는 동상, 기념관을 만들어 그 내력을 잘 보존하는 것을 볼 때, 섬나라 영국인의 자존심과 강인한 민족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대학도시, 옥스포드의 모습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80여km 떨어진 옥스포드 시에 도착했습니다. 옥스포드는 온통 대학건물과 교정과 학생으로 이어진 교육도시입니다. 어느 것이 학교인지, 거리인지, 개인 집인지 분간키 어려웠어요. 유서 깊은 대학도시에, 여행 철이라 세계각지에서 모인 학생과 많은 관광객으로 시내가 가득했어요. 이곳 학생들과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배낭여행객들, 그리고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들로 인해, 이 도시는 살아 움직이는 듯이 벅찬 생동감으로 충만해 있었고요. 영어권 대학 중 세계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이 대학교는 1096년경에 설립되었다고 하며, 38여개의 단과대학(컬리지)이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합니다. 대처수상 등 많은 영국 총리와 노벨 수상자들이 배출된 곳으로 교정에 들어서면 점잖은 기품과 고고한 학풍이 풍기는 거대한 대학 타운 이었어요. -옥스포드 대학구내는 ‘헤리포드’ 촬영지로도 유명 옥스포드 대학교의 가장 큰 대학은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로 대학이자 성당이기도해요. 지금은 헤리포트 등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해진 곳입니다. 헤리포트 작가인 ‘조엔 k 롤링’이 이 대학에서 영감을 얻어 대학 식당, 예쁜 정원, 큰 잔디밭 ,성벽, 고목 등을 배경으로 하여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작가가 이 책을 처음 출간하기위해, 출판사를 찾았으나 모두 거절당했고 13번째로 ‘불름즈버리 퍼블리싱’ 출판사가 이를 승낙해 싼 단가에 대박을 터트렸다고 전 합니다. 결과 수십 개의 언어로 약 5억 권정도 발간되어 세계에서 성경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고 해요. 중세학교 성벽과 고목 숲, 잔디밭으로 이어지는 정원과 산책길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고풍스러워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쉬어가는 힐링장소로도 이용되고 있어요. 이곳 명문대학을 영국의 처음 방문지로 택한 것은 손자들이 세계 유명 대학을 직접보고 장래 포부를 크게 갖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놈들이 오직 헤리포트에 만 정신이 팔려, 유명 촬영지만을 찾아다니느라 한나절 의미 없이 보내고 만 것 같아요. -없는 책이 없다는 도서관 ‘옥스포드 보들리언 도서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인 보들리언 도서관을 구경했어요. 수백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한꺼번에 2500여명 정도 열람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매주 수많은 서적과 자료들이 반입된다고 하여 영국에서 ‘없는 책이 없는 도서관’으로 불려요. 옆에 있는 원형 도서관인 ‘레드 클리프 카메라’는 둥근 돔 모양으로 멋지게 생겨 관광객이 더 많습니다. 부자 외과의사 레드 글리프가 지원한 돈으로 건축했다고 해, 그의 이름을 땄다고 합니다. 밖에서는 3층 같아 보이나 안에서는 2층으로 돼있고 현재 보들리언 도서관의 열람실로 사용되며 두 도서관 사이에 지하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리고 여기서는 책을 열람할 수만 있고 대여는 안 된다고 합니다. -천년 대학에 고즈넉한 토속 풍광들 대학 교정을 돌아보다 유구한 명문 학교 분위기와 달리 토속적이고 고즈넉한 지역들이 도처에 보였습니다. 옛 성벽들로 이어진 산책길이 있고 주변에 돌로 쌓은 길 다란 옛 성(城)이 있는 가하면, 마치 우리네 고분처럼 생긴 둥근 무덤 같은 잔디 봉분에 큰 나무가 솟아 자라는 모습은 마치 경주 어느 고분을 보는 것 같았어요. 또한 천년역사의 대학인만큼 교정 구석구석에 거수목과 풀숲이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속에 고풍과 고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리포트의 촬영지로, 또 관광객의 휴식처로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크로아티아 시골마을에서 민박 스위스 근방의 호반 마을에서 2~3일을 보내고 슬로바니아 국경을 통과하여 8월 9일 크로아티아 국립공원 근처에 있는 ’메트로 짐멀‘ 마을 에 도착했습니다. 이 나라의 유명 관광지 '푸리트 비체'를 둘러보기 위해서 그곳 가까이에 숙소를 정해야했습니다. 캠핑 구역이 아니기 때문에 마을 안내센터에 가서 숙소를 알아보니, 노인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zimmer 10호)를 소개받았는데 주인이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집이 조용하고, 깨끗하며, 전형적인 시골집이라 정이 갔어요. 노인 집 방2개를 2일간 빌렸죠. 이 마을은 더구나 숲과 나무로 뒤덮인 산촌마을이라 우리네 시골과 비교도 해보고 싶었고요. 짐을 풀고 방정리가 끝나자 주인집에서 과일과 과자류를 내놓으며 우리를 환영하는 예의를 갖춰져 고마웠습니다. 숙소 뒤뜰에는 상추, 도마도, 포도, 호박, 고추 등이 자라고 있더군요. 우리네 채소와 과일 들이 이역만리 크로아티아 시골에서도 자라고 있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했어요. -죽기 전에 꼭 봐야하는 세계적인 자연 관광지 ‘프리트 비체’ 크로티아는 유럽동남부 발칸반도에 있으며 슬로베니아, 헝가리. 세르비아 등과 국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구 440만정도의 농업과 목축이 주산업인 국가예요. 근년에 유전 개발로 공업국으로 변화 식품가공, 석유, 섬유화학 등이 발전단계에 있으며 우리나라와는 1992년에 수교하였어요. 카르스트 산악지대의 울창한 숲속에 있는 프리트 비체는 석회암의 기암괴석 절벽과 20여개의 아름다운 호수, 크고 작은 100여개의 폭포 군으로 형성, 요정이 살고 있는 지상낙원처럼 어디를 가나 숨이 막히는 절경과 신비의 연속이 전개됩니다. 20여개의 트래킹 지정코스가 있어, 코스 당 3~4시간정도 걸리는 호수, 폭포, 계곡 따라 걸으며 구경할 수 있으며, 배를 타고 건너야하는 큰 호수 길도 있더군요. 수 십 개의 호수에서 떨어지는 폭포 물줄기의 장관, 수면에 노니는 물고기, 맑은 공기. 푸른 숲과 물속의 수초 등으로 펼쳐있는 동식물 서식지로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유네스코 자연 유산입니다. 여름 관광 시즌인 탓도 있겠지만 여기저기 구석구석. 사람들이 줄을 이었어요. 애들 어른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감탄사를 토해내게 하는 자연의 오묘한 신비 앞에서 우리도 애들과 함께 서너 시간 정도 감탄 연발이었습니다. -라스토케의 ‘동화마을’을 둘러보고 우리 숙소가 있는 마을 가까운 곳에 동화마을이 있어 둘러보았어요. 특히 한국인 관광객에 인기가 있어 잘 알려진 관광 코스입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 졸졸 맑은 계곡물, 그림 같은 예쁜 집과 숲길, 주변 환경이 모두 동화속의 인형이 사는 듯한 아름답고 오묘한 마을이에요. 프리트 비체에서 30km의 거리에 있는 '슬론'이라는 작은 마을 인데. 두 개의 강이 만나는 ’라스토케’에 있는 마을 입니다. 20여채의 깨끗하고 예쁜 고풍적인 집들이 숲에 싸여있고, 주변에 물줄기가 흐르며 작은 폭포도 떨어지는 동네입니다. 둘러보는 데 한 시간 정도, 숲과 길, 폭포, 카페, 시장, 물레방아간이 있으며, 특히 물레방아간은 수력 터빈으로 돌리며 밀과 옥수수 가루를 빻아주고 있어요. 마을 안을 자유스럽게 구경할 수 있으며 송어 요리 저녁식사가 유명하다고 해 먹어봤더니 분위기가 좋아 그런지 맛이 좋더군요. 마을 뒤쪽에 이어있는 높은 다리는 계곡 두 마을을 연결하는 교량으로 300여년 전 부터 바위위에 설치되었다고 해요. 동네 안에 마을 박물관이 있어 옛날 농기구도 전시되고, 기념품가게도 있어 마후라, 손수건 같은 토색 품도 팔고 있더군요. 주변 산세와 지형, 폭포, 물줄기 등 마을 형세가 동화속의 마을처럼 아담하고 신비스러워 ‘작은 프리트 비체’ 마을 이라고도 불리 웁니다. -민박집의 소박한 이야기 민박의 노인장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때 출전하여 왼손에 부상을 당한 전상 유공자로, 마음이 착하고 욕심 없는 할아버지였습니다. 저녁한때 자기 2층집 방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 해주었어요, 아들 둘이 있는 데 모두 외국에서 결혼해 독립해 산다고 하더군요. 자식 자랑을 하다가 아들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인지 책상위에 있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더군요. 나이들면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그곳이나 우리나 마찬가지 인것같아요. 같은 노인 입장에서인지, 2박 3일, 한집에서 지내는 동안 마음 터놓고 잘 지냈으며 반찬이나 과일 채소도 자주 얻어먹는 행운도 누렸어요. 동부유럽의 시골 풍경과 인심을 알아보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중세도시의 고풍스러움이 넘쳐나는 도시 ‘베른’ 베른은 스위스의 행정수도로 깔끔한 현대 도시이나, 중세도시의 고풍스러움과 옛 기운이 함께 깔려있는 도시입니다. 아레 강을 사이에 두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몇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있어요. 인구 43만으로 기계, 전기장비와 화학제품및 약품생산을 주로 하고 있고요. 12세기경, 처음 이도시가 군사도시로 개발될 때, 숲에서 가장 먼저 잡은 동물이 곰이라서, 곰이 이 도시의 상징동물로, 곰을 뜻하는 ‘bear’를 따서 ‘베른’이라 명칭을 부쳤다 고 전합니다. 시내 곳곳에 곰 동상과 큰 곰 인형들이 눈에 뜨이며 구경할 만한 곳으로 분수대, 이상한 시계탑, 시청건물, 아인슈타인 박물관등이 있습니다. -베른의 랜드 마크, 이상한 시계탑(지트글러게) 베른의 상징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이상한 시계탑은 1530년에 만든 오래된 시계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에 높은 시계탑이 서있고, 매시 4분전만 되면 인형들이 탑 밖으로 나와 시각을 알리는 쇼를 하는데, 닭 인형이 울고, 곰과 각종 인형들이 나와 이상한 몸짓으로 흔들어 뎁니다. 길 가든 사람들이 신기해 넋을 잃고 쳐다보곤 하는데 그 정식 이름은 ‘지트글러게’이나, ‘이상한 시계탑’이라고들 불러요. 베른시를 스위스의 분수도시라고들 합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각양각색의 분수대가 곳곳마다 눈에 뜨이는데, 모양에 따라 역사적 인물이나 식인분수. 사자의 입 분수 등으로, 이를 포함해 구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어요. -푸른 잔디밭의 베른 야영장 몽퇴르 시에서 차량파손도난사고로 깨진 유리창문을 보수하느라 부지런히 카 정비소를 찾아다녔고 식자재와 취사도구 등을 구입하러 베른시의 여러 곳을 다녔으며, 또한 여권발급이다, 집사람의 베른대 종합병원 진료 등 처음 겪는 일들로 모두들 심신이 지쳐있었어요. 하루 정도 쉬기로 하고, 베른 야영장을 찾았습니다. ‘아레' 강 옆 푸른 잔디밭이 있는 큰 야영장이에요. 우리 부부는 강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딸 가족은 베른 아이스 하기 연습장으로 현지 경기구경을 갔어요. 맑은 강물과 깨끗한 환경에서 강가를 걷는 주민들이 마냥 평화롭게만 보였습니다. -올림픽의 도시, ‘로잔’을 돌아보며 스위스 서부 레만호 북쪽에 위치한 국제 올림픽위원회(Ioc)가 있는 체육 올림픽 도시입니다. 로마 제국시절부터 건설된 오랜 역사도시이며 15만의 인구인 관광도시로 레만호를 바라다보는 언덕위에 자리를 잡아 전망이 아름답고 구시가지의 풍경이 좋아 스위스에서 인기 좋은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94년 올림픽 도시로 인정받아 각종 세계스포츠 관련기구가 위치하고 있고 국제회의가 자주 열리는 국제도시이며 올림픽 박물관이 설치되어 있어요. 이 도시의 랜드마크인 ‘로잔 대성당’이 언덕위에 위치하여 그 위에서 레만호수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어 더욱 좋아요. 특히 이 성당은 밤 10시와 새벽2시에 종지기가 올라와 타종을 하는 데, 도시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600여년 간이나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1993년에 세워진 ‘올림픽 박물관’에는 역대 올림픽에 관한 많은 것이 전시되고 있는 데 우리나라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가 이 도시에서 결정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해요. 4층 건물로 1988년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성화, 메달도 전시되고 있더군요. -스위스 로잔의 명품 길에서 로잔시 언덕 위, 구 시가지에 오르는 길에 ‘로잔의 명품길’이란 명품판매 거리가 있어요. 레만호를 내려다 보기위해 걷는 곳이라 관광객들이 많아 스위스 유명상품을 진열해놓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정갈하며 산뜻해 아름다운 길로 통합니다, 시계 줄을 하나 살까하고 가게에 들렀어요. 시계의 고장 스위스에서, 그것도 명품거리라는 곳이기에 추억이 될 것 같아서요.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코리아'라고 하니 싱긋 웃으며 스위스 시계제품 한 셑트를 권해요. 가죽 시계 줄만 20프랑 주고 샀는데, 6년이 지난 지금에도 큰 흠 없이 잘 차고 다녀요. 가끔 이 시계 줄을 볼 때마다 당시 로잔의 명품거리 어느 시계 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차량도난 사고 후 수습정리 시옹성 차량 도난 사건(7/25) 후 우리는 베른 한국 대사관에서 여권을 발급받았으나 잃어버린 취사기구, 식자재, 전기소품과 기본적인 최소한의 옷 등을 사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우리식구의 취사도구 중 밥통인 전기밥솥은 이곳에서는 사용치 않은 물건이라 쉽게 구할 수가 없었어요. 여행이란 얻는 게 많아서인지 때로는 잃어버리고, 비우는 것도 좋은 추억으로 생각키로 하고 불편해도 참기로 했답니다. 루체론 시에 있는 리도 캠핑장에 도착해 시내를 돌며, 필요한 물건 등을 보충해갔습니다. 마침 근처에 한인 식품점도 있어 고추장, 된장 등 식자재확보에 도움이 되었어요. 이 켐핑장은 포폴리스 강변에 있어 아름답고 한적한 호수 가에서 재충전의 의미에서 수영을 하며 하루 동안 쉬었습니다. -루체론 시의 ‘카펠교’를 건너며 루체론 시는 8만5000여명의 인구로 취리히 남서쪽 로이스강을 끼고 있습니다. 수도 베른에서 1시간 20여분이 소요되며 섬유, 식품공업, 금세공이 발달 되었고, 특히 호반의 도시로 조용하며 스위스 최대의 관광지로 소문이 나있어요. 8, 9월이면 세계적인 음악제가 열리는 음악의 도시이기도해요. 특히 이곳 루체론의 역사(驛舍)가 서울역을 많이 닮았어요. 알아보니 1971년 이곳 역이 불났을 때, 서울역을 본떠서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전 서울역(일제강점기 경성역)을 처음 만들 때, 여기 루체론 역 청사를 모방하여 지었다고 하니, 두 건물은 지붕 의 돔형식이라든지 붉은 벽돌 등이 서로 닮아 있을 수밖에요. 카펠교는 14세기경 건립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예요. 동양적인 지붕과 회랑이 있는 목조다리라 서양풍습에 어울리지 않는 이색적인 모습으로 낯설게 보입니다. 로이스 강을 거슬러 양쪽 시가지를 연결해 주고 있어요. 길이가 1km 정도 완만한 모형으로 커브를 틀고 있고, 다리 중간쯤에 높이 30여m의 탑이 서있습니다. 옛날에는 보물, 문서창고, 감옥으로 사용했다고 하는 데 지금은 기념품판매소로 활용되고 있네요. 다리 입구 주변에는 여러 가지 꽃으로 치장이 되어있고 주위 수면에는 오리, 거위, 비둘기 등이 노닐고 있어 무척 평화롭게 보입니다. 다리강변 식당, 카페에서는 관람객들이 앉아 카펠교를 바라보며 식사, 차를 즐기고 있어 무척 아름답고 한가롭게 보입니다. 우리도 여기서 샌드위치, 아이스크림 등으로 점심을 대신했어요. -굴(窟) 벽속에 만들어 놓은 조각 '빈사의 사자 상' 1824년 덴마크의 조각가 '루카스 아호론'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굴 벽면에 조각해놓은 길이 10m, 높이 6m의 대형 사자상 조각이 힘없이 누워있어요. 어깨에 부서진 창이 꽂혀 있는 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 앞발에는 백합을 지키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사자위에는 라틴어로 ‘스위스의 충성심과 용감함“이란 문구가 조각되어있어요. 프랑스 혁명 때인 1972년 루이 16세가 거주하든 투일리 궁을 지키다가 전멸한 근위대원 786명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져있어요. -스위스 베른 종합대학 병원에서의 진료 집사람이 갑자기 몸이 아파 베른 대학 종합병원을 들렸어요. 6월 여행을 떠난 후 한 달 20여일동안 가족의 식사, 설거지, 빨래 등으로 무리한 탓이었습니다. 초음파검사등 기본적인 진료를 마친 후 5일분의 약을 받고 나왔어요. 좋지 않은 병으로 여행을 중지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다는 불안에 초조해 했는데 다행이었습니다. 이 진료 중에 이곳 병원의 이색적인 진료 모습을 보았어요. 우리나라처럼 초음파실, 체혈실, 엑스레이방 등으로 환자가 직접 왔다 갔다 하게 하는 게 아니라. 환자가 있는 진료실에 그 관련 검사 기구가 자동 이동되어 주치의사가 직접 첵크 할 수 있게 치료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있어요. 환자가 한곳에서 편히 진료 받을 수 있고, 시간도 절약되더군요. 3시간 치료에 900프랑(130만원)이라는 비싼 치료비를 여행 후 귀가하여 송금해야했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레만 호수로 가는 길 우리는 7월 25일 오후 프랑스와 스위스에 걸쳐있는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만 호수에 도착했습니다. 이 호수는 일명 제네바 호수라고도 하며 자그마한 도시인 몽퇴르 시가지를 지나갑니다. 맑고 아름다운 풍경에 파란 하늘과 초록 산허리가 어우러진 자연 환경에 입이 벌어졌어요. 순간 40여 년 전 KBS1 TV 에서 방영한 한운사 선생의 각본인 연속극, ‘레만호에 지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한국 전쟁 때 헤어진 남북한 부부의 애틋한 사연을 주제로 한 연속극으로 이곳에서 촬영 한 것인데,레만호를 보는 순간 ‘와~’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어요. -유명한 휴양도시 몽퇴르 호반 산책 인구 2만정도의 작은 휴양도시로 포도가 많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레만 호수를 끼고 약 16km의 산책로가 이어있어 대부분의 관광객은 이 코스를 걷게돼요. 호반 동서로 아름다운 주택들이 강을 바라보고 서있고, 호수 가에는 여기저기 거위들이 몇 마리씩 무리를 지어 꺅꺅거리며 헤엄쳐 놀고, 강에는 보트들이 한가로이 떠다녀요. 유람선도 도시와 강과 산으로 돌며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요. 호수 건너편에는 프랑스의 산들이 둘러있어 호수를 사이에 두고 하늘과 산, 도회 그리고 강물이 그림처럼 어울러 보여요. 호수라기보다 70여km의 길이에 그 강폭이 커서 마치 큰 강과 같은 느낌을 주어요. 산책로 중간쯤에는 다양한 예술 조형물들이 여기저기 서있는 데, 특히 록 클럽의 대부(代父)인 ‘프레디 머퀴리’의 동상이 오른 손을 번쩍 들고 호수를 향해 서있는 게 눈에 띕니다. 이 호반도시를 무척 사랑하고 이곳에서 생활하며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고 해요. 7월 중순이면 이 동상 중심으로 시행되는 째즈 페시티벌 축제가 유명한데, 그래서인지 요즘에 이곳에 관광객들이 많이 모인다고 합니다. -레만호의 시옹성(城) 관광 몽트뢰에서 호반 산책로를 따라 동쪽으로 4km 정도 가면 ‘시옹성’이 있어요. 매년 평균 35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9C에 지어진 중세 시대 고성입니다. 거대한 암반위에 세워진 성으로 2개의 원형 벽, 25채의 건물, 3개의 정원으로 되어있어요. 꼭데기가 여러 개의 원추형으로 생긴 성인데, 그간 와인저장소, 지하 감옥, 중세 상인들의 통행세 수금소 등의 역할을 했었다고 합니다. 병사 숙소와 성주 숙소와 예배당, 감옥이 있으며 제네바의 종교 지도자, 보니바르가 4년간 수감된 곳이기도 해, 영국시인 ‘바이런’이 이곳에 들러, 이를 주제로 ‘시옹성의 죄수’라는 시를 지어 남기기도 했답니다. -시옹성 주차차장에서 생긴 일 시옹성 구경을 하는 동안, 주차장에 세워둔 차안에 둔 짐이 도난당하는 황당한 일이 생겼어요. 렌트카 우측 유리창이 박살이 나고, 짐 가방 2개가 없어졌어요. 더욱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건 가족 여권 4개가 짐 따라 없어졌다. 이곳에 간간히 생기는 집시들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경찰이 현장에 나와 조사를 하고 한국대사관에 연락, 상황신고와 여권 발급 신청을 했어요. -주 스위스 한국 대사관에서 여권 재발급 한국대사관은 스위스 수도 ‘베른’에 있어요. 이튿날 대사관을 찾았습니다. 숲속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으며. 정문 우측기둥에 ‘대한민국 대사관'이라 적혀있었고, 하늘에는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정원에는 울긋불긋한 무궁화가 피어있어, 여정에 지친 우리의 심란한 마음을 품어 안아 주었어요. 여직원이 신분 확인, 사진입수, 본국 조회 등 한나절 동안이나 점심을 거르면서까지 여권 발급에 최선을 다해주었어요. 맡은 직분에 충실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진정한 공직자상을 보았어요. 새로 만든 여권 4개를 넘겨주며 정문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주는 그녀의 배려에서 진한 동포애를 느꼈습니다. 정문을 나서는데 무궁화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고 창공에 휘날리는 태극기는 무한히 평화롭고 멋져보였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인임이 자랑스럽고 내 조국 대한민국에 감사했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빛의 채석장 가는 길 아비뇽에서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자동차로 30여km 산속으로 들어가니 산 능선에 굵은 바위들 무리가 나타났어요. 길 가에 자동차들이 이어있고 작은 주차장에도 차들이 꽉차있었습니다. 자연이 빚은 돌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주변 산허리를 감싸고 멋지게 펼쳐져 있어요. 굴[穴〕 같이 생긴 석벽 입구 상단에 ‘까리 에르드 루미에르’라고 쓰인 건물 이름이 있는 데 우리말로 ‘빛의 채석장’이라고 한답니다. 그 옆에 출입구와 매표소가 있습니다. 입장료로 어른 13유로, 학생 11유로를 주고 들어갔어요. 마을과 멀리 떨어져 폐광되어 버려진 채석장인 굴 내부에 있는 미술전시장이었습니다. 굴속에 여러 각도의 넓은 벽면을 만들고 그를 통해 유명화가들의 미술 작품을 확대 영상으로 비춰 보여주는 굴속의 전시장이었습니다.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프로방스지역의 숨은 진주 같은 관광지인데 해가 지날수록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옛 채석장동굴속에 어울리는 빛과 그림과 음악의 앙상블 여기는 남 프랑스 레보드 프로방스에 위치해 있습니다. 1920대까지 실제 채석장으로 운영하든 곳인데 이 채석장의 석회석으로 프로방스지역 마을과 주변 성(城)을 쌓았다고 합니다. 1935년 폐쇄되면서 리모델링해, 2012년부터 미술전시공간으로 개장돼 운영되고 있다고 해요 굴속 돌기둥에 200여개의 H.D.프로젝트와 스피커들을 빈틈없이 달아 놓고, 그림이나 프로젝트 아트를 감상케 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전시장이예요. 쉽게 말해 버려진 채석장 석굴 내부 곳곳에,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빔으로 쏘아, 확대영상으로 만들어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전시하는 공연장으로, 매회1시간 정도 멋진 음악과 함께 그림영상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크고 울퉁붙퉁한 벽면이 한 장의 그림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우람하고 거대하겠어요? 시끄러운 도시 건물속보다 운치 있고 좋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 굴 안에서 감상분위기 측면에서도 한결 멋 잇고, 경이롭고 자유스럽더군요. 프랑스인의 남다를 예술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유명화가의 좋은 그림을 크게 확대하여 빛과 음악과 함께 거대한 석벽하나 하나에 비쳐질 때, 그 생동감은 지구를 떠나 별도 공간 세계에 온 것 같은 몽환적인 인상을 받게 했습니다. 매년 60여만명의 관람객들이 들린다고 해요. 우리가 입장한 때는 천지창조, 모나리자 등이 전시되었고 전시장 한쪽에는 화장실, 기념품가게, 카페 등의 별도 공간도 있었습니다. 그림을 감상하고 채석장내부를 자유롭게 다니며 구석구석을 살피며 휴식을 할 수 있어 그림구경과 힐링을 동시에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손자 녀석들은 별스런 놀이터로 생각되는 지 요리조리 잘도 뛰어다니더군요. -제주도에 ‘빛의 벙커’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서귀포 성산읍 고성리에 프랑스의 '빛의 채석장'과 같은 병커 속의 전시장이 있습니다. 그 쪽에 알아보니 900평 규모의 크기에 옛 국가 시설 벙커로 활용한 곳인데, 2018년 개관하여 몰입형 미디어 아트전시관으로 그림을 전시하고 있어요. 1회 상영시간이 1시간정도 되고요. 개관이후 벌써 3차례에 걸쳐 전시회가 있었답니다. 이곳도 외부의 빛과 소리가 완전차단 된 내부 공간 벽에 자연공기 순환방식, 연중 16도 실내 온도 유지, 해충이나 벌레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수 십대의 프로젝터와 스피커를 설치하여 빛과 음악과 함께 그림들을 확대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요. 현재까지 100만명 정도 관람을 했고 금년 4월부터 내년 2월까지 예정으로 현재 전시 중에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남프랑스지역 출신의 유명화가인 모네, 사갈, 르느와르등의 작품 5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그림의 도시, 아를에 가다 아를은 프로방스지역에 위치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합니다. 아비뇽에서 서남쪽으로 30여km, 론강을 끼고 있는 인구 5만3000여명쯤 되는 그림의 도시, 예술의 고도입니다.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아레나)과 ‘빈센트 고흐’에 관한 유적인 많은 관광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1888년부터 1889년 5월까지 고흐(1853~1890.7)가 머물며 불후의 명작인 ‘별이 빛나는 밤에’ ‘해바라기’ ‘카페 테라스’등 300여점의 작품을 이 도시에서 그렸다고 합니다. 주요관광지로는 ‘포랭광장(고흐가 그림 그리던 반고흐 카페, 레스트랑들이 있는 지역)’이 있고, 고흐와 고갱이 같이 살던 집이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자르고 입원했던 정신병원(에스파스 반 고흐) )등이 여기에 있어 미술애호가, 학생, 기타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아를’은 고흐가 사랑했던, 그리고 그의 흔적이 많은 도시 네델란드의 천재화가 고흐는 1882년 아를로 이사를 합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광으로 그림도 그리고 요양도 할 겸 해서요. 론강 하류에 있는 이곳은 프랑스에서 매우 아름다운 도시중 하나로 중세 예술의 고도이며 맑은 공기와 연중 따뜻한 기후 때문에 휴양지로도 좋습니다. 걸어서 30여분이면 중요 볼거리를 다 볼 수 있는 관광명소의 근접성으로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데 고흐와 관계되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거의 다 노란색으로 줄지어있는 포랭광장은 사람들의 물결로 꽉 차 있었어요. 특히 진한 노란색의 파라솔이 있는 ‘반 고흐 카페’는 고흐가 그린 유명한 ‘밤의 카페’의 배경이 된 곳으로 지금도 그 모습이 그의 그림과 거의 같아요. 고흐는 얼마동안 고갱과 같이 생활을 했으나 두 달도 되지 않아 성격차이로 헤어지고, 그는 갈등과 정신분열로 면도칼로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행위로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데. 이때 그가 그린 당시의 정신병원 그림이, 지금 그 근처 앞 나무에 똑같은 모습으로 걸려있었어요. 이 정신병원은 고흐관련 종합 문화 센터로 바꿔져 반 고흐의 삶과 예술의 자료 및 작품진열, 영상자료 보관, 도서관 등으로 아를 문화 활동의 중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흐가 1년 3개월 동안 300여점의 많은 그림을 그린 것은 아를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때가 고흐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 까 생각됩니다. -고흐의 대표 명작에 관하여(별이 빛나는 밤에, 해바라기) 유럽인들은 해바라기를 유난히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남프랑스를 다니다보면 넓은 들녘, 이곳저곳 노란 해바라기가 너르게 피어있어요. 고흐 역시 이 꽃을 좋아 하고, 또 그 색깔인 노란색을 좋아하여 고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있습니다. 아를에서 그린 그림가운데 ‘해바라기’그림이 많고, 많은 작품의 모델로 삼아 ‘해바라기 화가’로 불렀답니다. 고갱을 위해 심혈을 기울려 4점의 해바라기 꽃을 그려, 아를 입주 동거 환영의 선물로 주었다고도 합니다. 고흐는 같이 살던 고갱이 떠나간 뒤 고독과 괴로움으로 보내든 시기에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어머니 회갑기념으로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렸다고 해요. 화면위의 모든 색상이 꿈틀거리는 걸보면, 분노의 몸부림이 휘몰고, 광기를 유발하고 있는 듯합니다. 왼쪽에는 사이프르스(실 펜백나무)가 솟아있고 밤하늘엔 별들의 빛의 잔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고흐를 노란색의 화가, 해바라기 화가, 빛의 화가라고 하나 봅니다.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만 팔렸을 뿐, 평생 동생한테 얹혀 가난, 궁핍, 정신 질환의 어두운 생활 속에 살다가 1890년 7월 어느 날 머물던 여관에서 운명했다고 전합니다. -‘아를’에 있는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아레나)을 찾아 아레나는 B.C 90여년 전에 세워진 투우경기장으로 로마시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해요. 길이 136m, 높이 107m 타원형으로 2만여명 이상을 수용한다고 합니다. 역사성이 깊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지정되어있어요. 옛날엔 검투사와 소(牛) 등 야생동물이 싸우는 피비린내 나는 혈전의 투기장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1년에 2회 투우경기가 열리면서 소(牛)와 함께 어울리는 시민 축제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침 스텐드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상부 2층 계단 한쪽으로 조용히 올라 보니 타원형의 대형 경기장이 크게 돋보이고 고풍스런 아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베르동 협곡에 오르다. 액상 프로방스를 떠나 아침나절에 ‘별의 마을’을 향해 두어 시간 달렸습니다. 점심은 시냇가에서 사온 빵으로 때웠어요. 차츰 고산(高山) 능성을 오르게 되면서 협곡도로는 차 두 대가 겨우 교행할 수 있게 좁아지고 있었어요. 아래로 내려다보면 산허리들이 매우 깊은 계곡으로 빠져들며 유럽의 베르동강이 이 협곡을 따라 멀리서 굽이굽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빙하가 녹은 물이 알프스에서 흘러내려 석회암 고원을 깎으면서 만들어진 거대한 계곡이라고 합니다. 협곡길이가 250여km, 높이 400~800여m로 유럽에서 가장 큰 협곡이에요. 세계에서 미국의 그랜드 캐년 다음으로 크다고 합니다. 이 협곡 도로를 달리다 전망대에 내려 계곡을 내려다보았어요. 전망대 난간에 감히 접근할 수 없었어요. 아찔해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어질 것만 같아 불안하니까요. 주변 사방은 멋진 장관을 펼치며 끝없이 꼬불꼬불 이어집니다. 높고 험한 산길이라 차량들도 줄면서 우리 혼자인 것처럼, 조심조심, 무섭기도 했습니다. 마침 지나는 계곡 길에 호수가 있었어요. 가까이 가보니 베르동 국립공원 ‘생터 크로아 호수’라고 적혀 있었어요. 베르동 협곡에 있는 맑은 옥색의 매우 큰 호수였습니다. 수영은 물론, 수상레저 보트를 타며 카약으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발을 담그고 좀 쉬었습니다. -아름다운 '별의 마을', '무스티에 생트마리'에 가다. 생트크로아 호수를 지나 30분을 달리니 베르동 계곡의 한쪽을 뒷산으로 삼아 비스듬히 자리잡은 중세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커다란 바위산 아래 집들이 위태롭게 숨어있는 듯한 동네입니다. '무스티에 생트마리', 즉 ‘성모마리아를 모시는 수도원'이라는 뜻이라는 데, 일명 ’별의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이곳은 옛날 수도원이 있던 곳으로 두 개의 절벽 산 사이에 항상 별이 떠있는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알려져 있답니다. 해발 650여m 지점, 바위산이 2개로 갈라진 곳에 사람 수 70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작고 평화스런 동네입니다. 마을 안에 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고 도로변에 집들이 있으며 성당, 슈퍼, 약국, 빵집, 식당, 가게들하며, 마을 홍보관도 있습니다. 인형, 도자기, 비누, 그릇, 컵 등을 만들어 전시 판매하며, 특히 관광 상품으로 여러 가지 색상의 도자기들이 많은데 프랑스에서도 이곳 도자기는 알아준다고 합니다. 관람 코스는 동네 어귀에서 마을 언덕을 오르고 돌계단 260여 개를 지나 예배당, 수도원과 성당 까지 약 1시간정도 걸립니다. 양쪽 협곡 사이에 걸려 있는 별은 크기가 125cm 정도 되며, 굵은 로프로 별과 양쪽 바위산을 연결해놓고 있어요. 멀리서보면 언제나 하늘에 떠있는 별처럼 흰점으로 보이며 그래서 별이 지지 않는 마을, ‘별의 마을’로 통해요. -두 산골짝 마을에 별을 만들어 단 이야기 십자군 원정 때 이 마을 어느 청년기사가 성모마리아에게 출전하기 전, 만약 자기를 살아 돌아오게만 해주신다면 이 마을 협곡사이 하늘에 별을 달겠다고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갔었다고 합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고 사내는 자신의 약속을 지켜 이 별을 만들어 달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꼭지 점 16개의 80cm 정도의 작은 별이었으나, 1882년 꼭지점 5개의 별로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 몇 번 떨어져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다시 설치하곤 했답니다. 마을의 평화를 지키는 상징적인 별로, 그리고 마을을 보호하는 수호 스타로, 마을에서 공동 관리해오고 있다고 해요. 작은 중세 마을 이지만 협곡 하늘에 걸려있는 별과 그 아름다운 사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동네, 그리고 낭만적이며 아름다운 그림 같은 마을 전경 때문에 이렇게 뜨거운 여름날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많은 사람들이 이 산골 마을로 애써 찾아오나 봅니다. 두 개의 절벽 바위산을 이어 하늘에 매달아 놓은 하얀 점의 인공별!, 볼수록 신기하고, 멋있네요.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론 강변의 성벽도시 아비뇽으로 아비뇽은 남프랑스 론(Rhone) 강변에 있는 성곽도시입니다. 엑상 프로방스에서 두어 시간 정도 차를 몰았습니다. 론강 둑 근처에 차를 세우고, 잔디 곱게 덮인 강둑으로 올라갔어요. 론강 물결이 유유히 흐르고, 반쯤 잘려진 아비뇽다리가 가로질러있으며, 강둑 위쪽 성곽으로 연결되어 있는 옛 교황청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은 아비뇽의 중요 볼거리들이 어우러져 한눈에 들어오는 가장 경치 좋은 곳으로, 관광객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특구지역이랍니다. 인구 8만 정도로 포도주, 밀가루, 기름, 비누, 등 의 제조업이 주산업이며, 남부 프랑스에서 교통의 중심지요, 중세풍물의 고도인 예술의 도시로, 프로방스 여행의 중심지이기도합니다. 도시가 성벽으로 싸여있고 중세시대 70여 년간 교황청이 있던 도시인만큼 중세 예술, 문화. 종교역사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지요. -중세 교황청이 위치해 있었던 고도(古都), 아비뇽 론강을 바라다보며 강둑에서 준비해간 점심을 먹고, 구 교황청으로 오르는 성곽을 따라 30여분정도 올라갔습니다. 론강 물결, 아비뇽다리. 시내모습, 교황청 건물로 이어지는 풍경은 그간 우리가 본 여행 풍경 가운데서도 더욱 은은하고 성스럽고, 조용하고, 포근한 멋진 경치였습니다. 교황청이 로마에서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0여년간 7명의 교황이 아비뇽 교황청사로 옮겨 거주한 일입니다. 프랑스 왕 필립 4세가 교황을 황제권 지배하에 두기위한 조치로 교황의 권력을 줄이고, 또 세금을 뜯어내기 위한 구실이었다고 해요. 성벽도로를 따라 올라 구 교황청에 오르는 길에는 고딕양식의 교황청사와 성곽 등 화려했던 시절의 역사 유적 등이 그대로 잘 남아 있었습니다. 교황청은 바위산을 뒤에 두고 견고한 요새처럼 론강을 바라보고 근엄하게 건축되어있어요. 성벽높이 50m, 면적 1만5000㎡ 성곽 안에 고풍스럽고 화려한 파리 왕궁을 모방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내부에는 25여개의 방과, 예배당, 수도원, 식당, 연회실 등이 있고 벽에는 그간 여기서 성직을 수행했던 교황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론강의 ‘생배네제다리’와 그 전설 이야기 일명 ‘아비뇽다리’라고 합니다. 론 강을 가로질러 아비뇽으로 연결되는 석조 아치 다리이죠. 길이 920m, 넓이 4m로 강을 건너 교황청 옆으로 이어지는 교량이에요. 1177~1185년 사이에 건축된, 처음 22개의 아취가 있는 다리였는데, 그동안 론강의 범람으로 유실되어 지금 4개만이 남아있고 그 다리위에 ‘생니콜라’란 예배당이 하나 서있을 뿐입니다. 이 다리건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해요. 젊은 목자인 ‘생배네재’가 꿈에 신(神)으로부터 론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만들라는 계시를 받게 되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모두 코웃음을 치며 비협조적이었어요. 목자가 아비뇽 주교에게 도움을 받으러 갔어요. 주교는 강변에 수십명의 청년들을 모아놓고 큰 돌덩이 한 개를 가져와 누구든지 들어보라고 하였으나, 모두 쩔쩔매매 포기하자 목자더러 옮겨 보라고 했어요. 소년이 가볍게 들어 올리게 되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많은 금화를 모아 기부하게 됩니다. 이 헌금으로 다리를 건설했고 목자의 이름을 부쳐 ‘생 배네재다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다리 건설에 참여한 청년들을 위해 이곳 처녀들이 부르며 춤을 추었다는 아름다운 노래가 이 지역에 전해오는 데...... 아비뇽 다리위에서, 우리는 춤을 추네, 우리는 춤을 추네. 아비뇽다리위에서, 우리는 둥글게 춤을 추네. 잘생긴 아저씨들이 그렇게 하네, 그리고 나서 또 그렇게. 예쁜 숙녀들이 그렇게 하네, 그리고 나서 또 그렇게. 별이 빛나는 밤에, 은빛 론 강물 에서 아름다운 처녀 총각들이 어울려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다리를 쌓았을 그 아름다운 모습이 머리에 그려지면서 이 다리가 더욱 신비스런 다리로 멋있게 보였습니다. -아비뇽 페스티벌(연극축제)에서 한국 국악단을 만나다. 마침 우리가 구교황청에 간 날(7월 20일)은 앞마당에서 연극 페스티벌 축제가 있는 날이었어요. 매년 7월이면 거의 한 달 동안 개최되는 세계적인 예술 공연 행사인데, 항상 휴가철을 맞아 많은 관광객이 참여, 함께 어울리는 한마당 축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나라 국악. 풍물단원들을 만났어요. 우리네 전통풍물 복장을 하고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어요. 실제출연은 볼 수 없었지만 좋은 평가 얻기를 바란다고 인사하고 헤어졌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액상 프로방스’로 가는 길 어제 우리가 묵었던 마르세유에서 북쪽으로 약 30km정도 떨어진 도시입니다.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도시이죠. 새로 렌트한 자동차로 우리만 승차한 단출한 분위기에, 애들도 들뜨고, 좋아하며 자유스런 분위기에, 신나게 달렸습니다. ‘액상(aix-en)’이란 말은 ‘물’이란 뜻으로 남프랑스에서 물이 많은 도시. 즉, ‘물이 많은 프로방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도시전체에 100여개의 분수가 마련되어 있다고 하니 물이 흔한 도시, 깨끗한 도시, 그리고 온정이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어요. 15만의 인구 중 30~40%가 학생인 만큼, 항상 활기가 넘치고 자유와 낭만이 충만하며 많은 문학, 예술인이 자유로이 살아가는 생기 있는 예술의 도시로의 인상을 받고 있죠. 또한 깨끗한 공기에 집들이 노란색 일색으로 안온하며 자동차가 거의 없고 복잡하지 않는 환경, 시끄러움이 없는 평화롭고 편안한 도시로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인지, 프랑스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로 선망되고 있답니다. 프랑스 인상파의 거장이자 정물화의 대가 ‘폴 센잔느’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액상 프로방스의 유명거리 ‘미라보 대로’ 이 도시 여행은 드골광장에 있는 미라보 거리에서 시작됩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바쁘고 활기찬 거리이며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길입니다. 길이 440여m, 폭40여m 정도 되는 큰 길로, 17세기경 루이 14세 때 건설한 도로인데, 프랑스 혁명 지도자인 웅변가 ‘미라보’의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 도시의 메인 도로이며 랜드마크 입니다. 1650년대 마차가 다니던 길 그대로 현존하고 있는 유서 깊은 길이랍니다. 풀라타나스 가로수가 있고 로통드 분수가 있으며 카페와 레스트랑, 각종 상점들과 17~18세기 때 지어진 고풍스런 대 저택들이 늘어서있어 그 당시의 중세풍 마을로 착각되기도 합니다. -로 통드 분수 미라보 거리 중심에 서있는 대표적인 분수입니다. 여행자나 시민들이 미라보 거리에만 오면 언제나 볼 수 있고 앉아서 놀 수 있는 이곳의 쉼터입니다. 분수 폭 32m, 높이 12m로 분수 꼭대기에 3개의 조각상이 조합되어 있어요. 이것은 사람들이 지켜야할 3가지의 룰을 상징하는 것으로, 법(法), 농업, 예술창작을 뜻하는 것이랍니다. 아를, 마르세유, 아비뇽, 이 3곳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고 전해 오니 아마도 프로방스 사람들이 지켜야할 신조 3가지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 곳에 조각해놓고 잘 지키자는 멘토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요. 프로방스는 라틴어 ‘프로빈시아(province)’에서 나온 말로 ‘물의 도시’라고 하는데, 고대도시 건설 때부터 지하수가 발견되어 온천물과 함께 도시중앙으로 물줄기가 흐르면서 많은 분수들이 만들어져있답니다. 이 분수가 햇빛을 막아주고 시원함을 주고 아침마다 미라보 거리에 물청소에까지 사용되면서 상쾌한 아침을 열어준다고 하니 참 행복한 도시이죠? -액상 프로방스의 화가, ‘폴 세잔느’동상 미라보 거리에 로통드 분수대를 향해 프랑스 인상파의 거장 폴 세잔느(1839-1906)의 동상이 우뚝 서있습니다. 높이 12m 대형동상이 예요. 구레나룻을 한 세잔느가 모자를 쓰고 등 뒤에 화구와 자리를 말아 지고, 양손을 모으고 지팡이를 짚고 뚜벅뚜벅 걷는 모습이에요. 그는 이곳 출신으로 ‘사과와 오렌지’ ‘목욕하는 사람들’ 등의 작품을 그린 유명한 화가입니다. 여기서 태어나 그림공부와 작품 활동을 하였고, 그리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감한 엑상 프로방스 사람이라고 합니다. -액상 프로방스의 장날 풍경 이렇게 한가한 미라보 거리 광장주변에도 5일장이 서더군요. 아침부터 과일과 채소, 골동품과 공예품, 공산품과 생활 용품, 그리고 꽃과 화초 등 갖가지 물건들이 길에 널렸어요, 값도 싸고 질 좋은 물건들이 보여 우리는 각자 취향대로 한두 개씩 샀어요. 나도 친구에게 선물할 가죽 혁대를 3개 샀는데 50유로 주었습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잘 메고 다니며, 허리가 편하다고 좋아라고 해요.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스페인 바로셀로나 공항에서 프랑스 관광도시 마르세유로 가다. 4박 5일의 스페인 관광을 마치고, 바로셀로나 공항에서 오전 9시30분발 마르세유행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프랑스 남부 해안 마르세유에서 시작하여 프로방스지역을 둘러보고 서 유럽 쪽으로 렌트카와 켐핑으로 자유 여행을 할 계획입니다. 마르세유 해안가에 예약한 숙소에 짐을 풀고, 렌트카를 인수하여 루ㅡ프를 달고 텐트를 살피고, 기타 식자재를 구입을 했습니다. 오후 한 나절(7/16일)은 여행준비에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마르세유는 남부 프랑스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도시입니다. 프랑스 제2의 도시로 인구 86만정도 되는, 겨울은 온난다습하고 여름은 건조하여 여행하기 좋은 자연환경입니다. 또한 연간 많은 물량의 화물이 유입되는 지중해 제1의 무역도시요, 상업도시로 여행객 대부분이 이곳을 남프랑스 여행의 출발지로 시작하여 프로방스지역과 주변 유럽국가로 여행을 합니다. 이곳의 중요 볼거리는 마르세유 항구와 지중해 연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노틀담(노틀담 드라가르드)성당, 소설 ‘몬테크리스트 백작’의 배경지인 ‘이프’섬이 해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해안선 따라 수많은 요트들의 아름다운 정박 풍경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마르세유 산 정상에 있는 ‘노틀담 드라가르드’ 성당에 오르면 이 성당은 1214년에 지어진 마르세유에서 가장 큰 성당이며, 대표적인 건축물로 해발 150여m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르세유 항구와 지중해를 내려다보며 떠나가는 배의 안전을 기원하고, 또 입항하는 배의 귀향을 환영하는 메신저 역을 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성당 지붕 꼭대기에 큰 금빛 성모상이 서있어, 해적들로부터 마르세유의 안전을 지키는 수호성당으로 시민과 관광객을 품어주는 대모(代母) 역할도 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당 내부는 화려한 천장에 금으로 장식된 돔이 유명하며, 옛 부터 선박들의 안전한 항해를 바라는 염원에서 배 모형을 내부에 만들어 놓고 기도를 권하고 있답니다. 옛날 프랑스 신부들이 처음 한국에 파견될 때 마르세유 항에서 출발하기 전 이곳 노틀담 성당에 들러 출국 전 항해 안전 기도를 드린 곳으로도 알려져 있어요. -듀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트 백작’-의 배경, ‘이프’섬을 쳐다보며 노틀담 성당에서 앞쪽 지중해 연안을 바라보면, 3~4km 쯤 떨어진 바다에 섬이 보입니다. ‘이프’섬이라고 해요. 이곳은 1844년 ‘듀마’가 지은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지로, 소설속의 감옥이 있든 섬입니다. 주인공(단테스)이 악당의 음모에 의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마르세유 앞에 있는 이 섬에 투옥, 14년 동안 고생을 하게 되는 데 다른 죄수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 이태리의 몬테크리스토섬에서 보물을 찾아내어 백작으로 행세하며 복수한다는 줄거리이죠. 실제 이 섬은 16C경 군사용 방어 시설로, 또 감옥으로도 사용하다가 지금은 소설배경지로 부상, 마르세유의 관광지로 그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이곳에 하루 2~3회씩 유람선이 왕복하고 있어요. -마르세유 전통 해안마을의 아름다운 요트들의 풍경 마르세유 항구를 돌아보면 전통적인 어촌 마을에 크고 작은 요트들이 정박하고 있는 모습이 특히 눈에 잘 뜨입니다. 낭만이 있고 풍요롭고 질서정연하며, 또한 평화스럽고 여유로워 남 프랑스 최남단의 프로방스 첫 관문인 자기역할을 톡톡히 잘 해내고 있는 듯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마살리아(massalia)’라고 알려진 이 도시에는 현재 관광 크루즈선도 방문하는 아름다운 관광지로 항상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두 가족 따로 따로 여행 바로셀로나에서 이틀정도 지나자 주변방향과 거리 감각이 조금 넓어졌어요. 오늘은 딸네 가족과 우리부부가 각각 따로 관광을 하기로 하고 애들과 헤어졌어요. 딸애가 100유로를 주면서 다 쓰고, 그리고 길조심 차 조심 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네요. 부모 자식 간 입장이 바뀐 것 같아요. 애들은 해변으로 피서를 가겠다고 했고 우리는 람브라스 거리에서 왼쪽으로 피카소 미술관을 찾아보고 바로셀로나 해수욕장으로 가보기로 했어요. 바닷가로 가는 버스가 있지만 티켓구입도 귀찮고 1시간 정도면 가능할 것 같아 거리구경도 할 겸 걸어서 가기로 했습니다. 막상 거리로 나오니 여름 더위 열기가 대단하여 숨이 턱턱 막혀요. -바로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 구엘 저택을 구경하고 우리는 람브라스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편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을 찾아갔어요. 가까운 거리에 있어 쉽게 찾았으나 미술관 입장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습니다. 좁은 골목길에 관람객들이 길게 이어져 있기 때문이죠. 어딜 가든 유명인사들과 관련 된 곳이라면 인산인해인데 바로셀로나 관광명소에는 그 현상이 더 합니다. 이 미술관은 세계에 산재해있는 피카소 미술관중, 제일 먼저 개관 한 곳으로 건물자체가 유럽풍 고딕양식에 대 저택 같은 분위기를 풍겨요. 그리고 여기도 좁아 주변 건물 5채를 구입,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이 미술관에 전시 보관중인 그림은 3000여점인데 그가 유년시절 그렸던 낙서, 스케치 드로잉한 것 까지 합쳐 놓은 것이라고 해요. 그림은 물론 피카소의 화풍에 대한 변천과정까지 알 수 있게 그 내역을 전시실 앞에 영상물로 준비해놓고 있어요. 1층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을 모티브한 기념물 판매소가 있고 그 맞은편에 상점과 카페가 있어 기념품도 사고 차도 마실 수 있는 쉼터공간으로 이용되고 있고요. 이곳 전시중인 그림 가운데 중요한 그림은 ‘시녀들’이란 제목의 40여점의 시리즈인데 이 그림은 17세기경 스페인 궁정화가인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그린 것입니다. 어린공주가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모습을 담은 연작 그림인데, 복잡한 개체를 간단하게 그린 것이에요. 유럽 회화사에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답니다.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만라가에서 출생하여 미술선생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림 신동으로 불리었다고 해요. 마드리드에서 공부하고 바로셀로나에서 작품 활동하며 살다가 프랑스 남부지방을 좋아해 그곳 무쟁에서 1973년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피카소를 프랑스 화가로 오인하는 데 그는 스페인 사람으로서 20세기 현대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입체파화가이며 조각가로서도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만국박람회 대회장, 사우타데야 공원 서쪽해변으로 방향을 잡고 가다가 큰 공원을 만났어요. 사우타데야 공원이라고 해요. 예상에 없었으나 더위와 소음에 잘됐다싶어 들어가 쉬기로 했어요. 시원하고 경관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공원은 만국박람회 때(1888년)대회장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종합공원으로 시민공원 휴식처라고 합니다. 분수와 호수가 있어 시민들이 보트를 타며 물놀이를 할 수가 있었어요. 대회 본관 건물 옥상에는 황금색 말 4필이 함께 힘차게 달리는 조각물이 있고, 현관 앞에는 솟아오르는 폭포수가 전면 연못으로 떨어지면서 더운 여름날에 시원함을 주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한 30여분을 보내고 바로셀로나 해변을 향해 큰 도로변으로 나왔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서투른 영어로 길을 물어 지하도를 지나고 해변 입구까지 왔어요. 말이 짧으니 몸이 불편하더군요. -바로셀로네타 해수욕장에서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때 인공으로 만든 해수욕장이라고 합니다. 지중해를 바라보며 긴 백사장이 넓게 이어있고 레스토랑과 호텔과 카페들이 뒤편에 들어서있으며 몬주익 동산까지 케이블카가 길게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일광욕과 서빙을 즐기는 곳으로 이름나있어요. 수영장에 양탄자나. 돗자리를 팔러 다니는 상인들이 더러 있어 더운 여름에 이상타했더니 해변 모래가 뜨거워 깔고 앉아 쉬라고 팔러 다닌다고 해요. 혹 애들이 어디 있을 까 두리번거렸지만 그들은 이미 이곳을 둘러 시내 쪽에 나가있었어요. 숙소로 갈 때는 오든 길 반대쪽으로 버스를 탔고 람브라스까지 15분 정도 걸렸어요. 버스비 28유로와 점심(빵값), 음료대 등 총 50유로 정도 썼고 나머지는 딸에게 반납했지요. 뜨거운 여름날 시니어 부부만의 바로셀로나 데이트는 이렇게 싱겁게 끝났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바로셀로나 '몬주익 동산'에 올라 바로셀로나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야트막한 동산입니다. 해발 200여 미터 되는 언덕에 오르니, 시가지와 지중해의 푸른 바다, 그리고 바로셀로나 해변이 내려다보여 속이 시원합니다. 특히 언덕 벤치에 앉아 지중해로 떠나가는 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람브라스 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 동산 입구에 내려, 케이블카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몬주익 동산’은 원래 ‘유대인의 산’ 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14세기경 스페인 각지에서 이주한유대인들이 이곳 언덕 주변에 모여 살며, 오랫동안 소외된 지역으로 방치돼 왔다고 합니다.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개최로, 주경기장과 체육시설이 들어서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예술과 스포츠 환경이 함께 조성된 복합 공원으로, 시민과 관광객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어요. 시가지와 지중해 바다, 모래해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동산 아래는 식물원, 박물관, 미술관등이 연이어 있어, 더욱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특히,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고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건 곳으로 대한민국 건아의 꿋꿋한 투혼의 흔적이 있기에 한국관광객은 필수 코스로 이곳을 다녀가고 있습니다. -몬주익 정상에 있는 성곽(城郭) 몬주익 동산 꼭데기에 오르니 작은 성곽이 있습니다. 17세기에 건설된 요새로, 당시 전투기지와 해상 무역 감시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감옥과 무기창고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군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해안포 잔재가 그대로 있고 성 주변에는 푸른 잔디로 잘 다듬어져있어요. 케이블카로 오르내릴 수 있으며 바로셀로나 시가지와 지중해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입니다. -바로셀로나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에서 생긴 일 몬주익 동산에 위치한 이 올림픽 주경기장은 7만여명 수용 규모라고 합니다. 입구에서 전체 윤곽만 대강 쳐다 보았지만 엄청 큰 경기장입니다. 1992년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건 곳이지요. 일본선수(모리시타)에 뒤질 새라 전력질주하며 계속 선두에서 이 언덕길을 쳐다보며 뛰고, 또 뛰어 올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에게는 지옥의 언덕이요, 또 영광의 길이기도 한 곳입니다. 이 주경기장에 들어오고 1위가 결정되는 순간(기록: 2시간 13분 23초) 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고 해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 있는 마라톤 금메달 쾌거였습니다. 수많은 관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더욱이 그가 받은 금메달을 관중석에 앉아 있든 '손기정' 노 선배님의 목에다 걸어드려 그 금메달이 더욱 빛났다고 합니다. 1936년 베르린 올림픽 때 우승은 했지만 일장기를 달아야했던 대선배님의 한(恨)을 풀어드린 것입니다. -마라톤 영웅 황영조 선수 동상과 기념비 이야기 이곳 메인 스타디움 근처에 황영조 선수의 동상이 있습니다. 2001년 바로셀로나 시와 경기도의 자매결연 기념으로 공동으로 세운 동상과 기념비 인데, 전력질주하는 그의 모습이 석벽 면에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어요. 일본선수와 선두를 다투면서 이 힘든 몬주익 언덕을 오를 때, 그는 조국을 생각하며 필승일등을 다짐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관중의 기립 박수와 그때의 환호성이 들리고, 그의 감격의 눈물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 동상에는 열심히 달린 그의 두발의 발바닥이 조각되어있고, 기념비 뒤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역사와 예술의 나라 스페인 바로셀로나, 이곳에 동방의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 경기도, 그 힘찬 빛 이같이 어리어 있다니, 아- 뜨거운 우정, 만방에 영원하리라” 지금 우리 식구들은 관광으로 즐겁게 이 동상과 기념비를 구경하고 있지만, 그 때 황 선수는 이 몬주익 동산 마지막코스 언덕을 얼마나 힘들게 뛰어 올랐을까? 그것도 어깨에 조국(korea)을 둘러매고... 마라톤의 영웅 '황영조 선수!' 수고했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없는 것이 없다는 바로셀로나 ‘보케리어 시장’ 투어 람브라스 거리 옆에 붙어있는 유럽최대의 재래시장입니다. 바로셀로나 최고의 관광명소로 이 도시 관광객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리는 곳입니다. 생선, 과일, 채소, 육류, 햄, 과자, 빵, 기타 농수산 먹거리 등 무엇이든지 다 있다고 해요. 상품이 신선하고 깨끗하며 상품의 진열 또한 예술품처럼 예쁘고 아름다워요. 거대한 원형의 천연색 물산 광장으로 여겨집니다. 곳곳에 커피와 간식을 즐기는 바(bar)가 있고, 뒤쪽엔 레스토랑들도 있어 맛있는 음식과 음료를 언제든지 사먹을 수 있습니다. ‘보케리아’는 ‘고기를 파는 광장’ 이란 뜻으로 1836년에 개설, 하루 약 30여 만 명이 출입한답니다. 상인들의 표정도 밝고 즐거운 인상과 다정다감함이 관광객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우리교민이 운영하는 가게, ‘마싯타’이야기 점심때쯤 보케리어 시장 안을 구경하다가 한쪽 코너에서 한국어로 '마싯타'라고 써진 간이 음식점을 보았어요. 무척 반가웠어요. 두어 평정도 크기에 아줌마 2명이 가게를 보는 데 깨끗하고 정갈했어요. 메뉴는 한글로 김치, 라면, 김밥, 잡채 등이 쓰여 있고 한국교민이나 관광객이 필요로 하는 고추장, 간장, 된장 등 간단한 식품류도 팔고 있더군요. 이민 온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데 목이 괜찮아 장사는 잘된다고 했어요. 애들이 라면을 보자 정신없이 달려들고 우리 모두 점심으로 라면(1그릇/6000원)과 김밥을 먹었어요. 6명이 옆으로 서서 가게 가판을 독점하는 것 같아 다른 손님에게 자리를 양보하기위해 우리는 먹거리를 들고 두어 걸음 떨어진 허름한 공터로 비켜 나와 식사를 했어요. 동포인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이 미친 것이지요. 이국에서 세계인들 속에서 당당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이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그리고 친절하고 밝고 여유로운 표정에 우리도 덩달아 마음이 편했답니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지은 예술작품 같은 건축물 순례 -가우디가 친구 ‘구엘’을 위해 지은 별궁 같은 집, ‘구엘저택’ 람부라스 거리를 따라 내려가다, 보케리어 시장 앞을 지나면 우측에 구엘저택이 있습니다. 가우디가 자신의 후원자이며, 친구인 사업가 ‘구엘’ 백작을 위해 설계한 저택이랍니다. 카톨릭 건축양식과 이슬람양식이 혼합된 육중하고도 권위가 넘쳐나는 집인데 1888년 바로셀로나 만국박람회 때 전 세계에 이 건물의 아름다움이 알려졌다고 합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는 화려한 나무장식과 고급스런 대리석으로 된 건축물이지요. 저택의 구석구석 실내 복도에는 기둥들이 육중하고 위압적으로 서있고 복도 계단마다 아름다운 카페트가 깔려있어요. 지하 1층에는 마구간과 마차 차고가 있고 1층에는 현관과 로비, 2층에는 서재와 응접실이 있으며 3층에는 침실이, 그리고 4층은 하인들 방과 주방이 배치돼있어요. 중앙 홀은 이중으로 돼있고, 천장까지 많은 창이 뚫려있어 자연 채광으로 인해 밝으면서도 신비롭게 느껴져요. 옥상 지붕에는 타일조각으로 꾸며진 18개의 굴뚝이 여기저기 울퉁불퉁 재미있는 모습으로 서있고 굴뚝 색상 또한 울긋불긋 어린이들이 좋아하겠끔 만들어져 있었어요. 실내에는 자연 채광 덕분에 집안 실내분위기가 매우 온화하고 은은하게 무슨 궁전처럼 느껴졌습니다. 구엘이 사용하던 서재, 응접실, 피아노와 책상이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가우디의 최대 걸작, ‘구엘공원’ 돌아보고 바로셀로나 도심의 북쪽에 있는 페라다산 기슭에 위치해 도시 전경과 지중해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어요. 당초 공원부지가 바위투성인 야산이요, 비탈져, 건축공사가 어려웠으나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설계했다고 해요. 가우디 건축의 진수, 곡선의 미를 우선시하여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울퉁불퉁한 기둥, 다리, 언덕, 계단이며 화려한 타일모양이 어우러진 독특한 공원이에요. 처음에는 구엘이 가우디에게 평소 자기가 바라던 영국 전원도시처럼 중산층에 맞는 주택단지를 지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기가 없어지고 구엘도 중도에 사망하는 등 여건변화에 따라 주택 공사계획이 중단되고 시(市)에서 인수해 공원을 만드는 재공사를 했다고 해요. 공원 내 중요 볼거리는 입구에 (1)경비실과 관리실 용도로 쓰이는 집 두 채 건물 (2)알록달록한 색 갈로 도자기로 모자이크된 도마뱀 분수, (4)파도처럼 꾸불꾸불하게 타일로 만든 용(龍) (5)공원 아름다운 꽃과 파도 동굴 (6)자연광장과 친화적인 산책로 등 자연을 묘사한 구축물이 많아 시민들의 산책 장소와 여행객들의 쉼터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어요.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그라나다에서 바로셀로나 행 야간열차를 타고 바로셀로나로 가는 밤 9시 30분(7/13 ) 야간 침대열차를 탔습니다. 버스로 가면 14시간이나 걸리지만 야간열차는 3시간을 줄이고, 잠을 잘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은 처음 타보는 야간침대열차에 대한 호기심과 그 여행의 참 맛을 느끼고 싶어서였습니다. 1실/4인용으로 1인당 44유로(한화 6만원)씩 이더군요. 1인용 침대 4개(1, 2층 상하 각 2개), 선반, 화장대, 세면대가 있으며, 수건, 치약, 칫솔, 식수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개인용 커텐이 쳐져있고요, 침구와 실내 환경도 괜찮았어요. 딸네가족 4명은 1실을 사용, 집사람과 나는 다른 객실에 1인씩 분산배정을 받았습니다. 이국에서 처음 타보는 야간열차라 집사람이 걱정되었지만 한국 숙녀 2명과 동숙하게 되어 안심이 되었어요. 나는 바로셀로나에 거주하는 식당 지배인과 함께 했고, 그가 주는 스페인 과자도 함께 먹었어요. 중간 중간 철거덕거리는 기차소리에 설 잠은 잤지만, 이튿날 아침 8시 30분에 가족들과 바로셀로나 기차역에 잘 도착했습니다. 낭만과 즐거움을 기대하며 마음 설렜던 ‘유럽에서 야간 기차여행’은 어둠과 잠속에 파묻혀버려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유럽 최고의 관광지 ‘바로 셀로나’ 바로셀로나 역에서 택시로 미리 정해둔 민박집에 들렀어요. 스페인 여행이 다소 길어질 것 같아서, 포르투칼에 가기 전 이곳에 들러 이 숙소를 정해두고, 주요 짐까지 맡겨둔 상태였죠. 딸애의 친구 지인인 한국교포아줌마가 운영하는 집이라 안전하고, 이 도시 중심거리인 람브라스 거리 한 블럭 정도 옆에 위치해 더욱 좋았어요. 바로셀로나는 스페인의 제2도시로 유럽인들이 가장 살아보고 싶어 하는 도시 중 하나라고 합니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며, 산업도시, 관광도시로, 예술, 문화, 건축, 음식, 자연 등 모든 게 잘 갖추어져 있는 매력적인 도시라고 해요. 특히 연중 좋은 지중해 기후로 시민들이 언제나 활기차고 삶에 대한 열정이 충만한 도시랍니다. 기원전 3세기경, 한니발 장군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잠시 쉬어간 마을인데 너무 아름다워 아버지인 바르카 장군에게 선물로 바치면서 그 가문의 도시로 삼아 ‘바르시노’라고 명명한 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데요. 이곳은 1992년 하계올림픽을 개최한 곳으로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곳 이예요. 중요 포스트는 시내중심의 람브라스 거리, 보케리어 시장, 가우디가 설계한 구엘 공원과 구엘 저택, 그리고 몬주익 언덕 및 올림픽 경기장주변, 피카소미술관, 사그리다 파밀리어 성당 등이 있습니다. -바로셀로나 관광의 중심지 ‘람브라스 거리’ 바로셀로나 여행은 람브라스 거리에서 시작되어 여기에서 끝난다고 할 만치 가장 인기 있는 곳이랍니다. 이 도시를 찾는 여행객은 한번쯤은 걸어보는 우리나라 서울의 경우, 명동거리나 남대문 시장 같은 곳이죠. 카타루나 광장에서 시작하여 보케리아 시장과 콜럼버스 탑을 지나 바로셀로나 항구까지 거의 직선으로 약 1키로미터의 구간인데 양쪽 가로수 사이에 항상 수많은 인파가 붐비는 거리입니다. 기차역, 버스정류장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로 축제나 행사가 있는 카타루나 광장에서 꽃가게, 기념품상점, 노천식당이 이어있고 거리의 화가, 행위 예술가들이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노크한다고 해요. 거리 중간쯤엔 보케리어 시장이 있어요. 500여개의 점포가 있는 질 좋은 싱싱한 농산물 집합장으로 유럽최대의 시장으로 불린답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우측에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지은 거대한 별장 ‘구엘 저택’이 있고, 거리 아래 쪽에 ‘콜럼버스의 탑’이 서있어요. -창공을 뻗어있는 ‘콜럼버스의 탑’ 이야기 이 탑은 1888년 만국 박람회 때 미국과의 교역기념으로 세운 탑이 예요. 높이 60여미터 탑 위에 콜럼버스동상이 서있어요. 머리를 처다 보려니 목이 아프네요. 에레베이트로 정상에 올라 지중해바다와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어요. 탑 둘레에는 그의 항해과정이 새겨있고 그의 오른손은 신대륙을 가르키고 왼손에는 담배파이프를 들고 있답니다. 청동여신 4명과 8마리의 사자조각상이 둘러싸고 있어 콜럼버스를 보호하는 것 같아요. 대항해시대 스페인을 해양왕국으로 만들어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지중해가 보이는 이 거리에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스페인 ‘그라나다’가는 길 절벽의 도시 론다역에서 아침 일찍 기차로 그라나다로 향해 출발했으나 중간에서 기차가 정차를 했습니다. 승객들이 모두 내려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탔어요. 철로 공사로 인해 버스로 갈아탄 것입니다. 버스차장 밖으로 끝없이 전개되는 올리브 들판, 가축들과 푸른 초원, 석류나무 단지등 목가적인 풍경이 율동적으로 이어지면서, 이방인의 피곤한 심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습니다. 그라나다는 서유럽에서 이슬람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스페인 남쪽의 도시로, 인구 12만정도의 그라나다주의 주도입니다. 그라나다가 ‘석류’라는 뜻을 가지고 있듯이 석류, 올리브, 술, 과일 등의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고 있어요. 이곳에는 아름다운 농촌풍경에, 특별히 이슬람 무어인의 ‘알람브라 궁전’과 ‘알카사바 요새’ ‘알바이신’ 등 훌륭한 이슬람 계 건축물이 있어, 세계의 유명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살아 생전 꼭 한번 보아야할 아름다운 건축물 '알람브라 궁전' 오후 2시쯤 미니버스를 타고 알람브라 성 앞에 도착했습니다. 몇 개의 언덕으로 된 이 도시에서는 고지대 좁은 길이 많아, 미니버스가 주된 운송수단이예요. 천천히 언덕을 돌며 내려다뵈는 마을 경관이 나무 사이로 좋은 구경꺼리가 되어, 멋도 있어요. 알람브라 궁전은 그라나다 시내 어디서나 쳐다보이는 800여미터 언덕에 요새처럼 도사리고 있는 알카사바 성안에 있어요. 죽기 전에 꼭 한번 가 보아야할 곳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성안에 들어서자마자 ‘사자의 정원’이 우람하게 나타납니다. 흰 대리석으로 된 12마리의 사자상이 떠받치는 분수가 있는 곳인데, 사자 입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정원에 이어지는 수로(水路)를 따라 구석구석 흘러간답니다. 아랍인들의 평소 물에 대한 애착심이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아요. 알람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라는 뜻으로, 붉은 벽돌로 쌓아 만든 견고한 성이지요. 이성을 지키기 위해 무어인들의 피나는 노력과 그라나다인들의 희생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는 의미가 포함된 성으로 이해돼요. 이 궁전은 이슬람의 나스르 왕조가 건설(1238-1358)한 것으로 알카사바 성곽, 나스르 궁, 카롤로스 5세 궁전 등으로 나누어있어요. 나스르 궁에는 대 항해 시대 많은 식민지 사신과 대사의 접견실로 사용되던 ‘대사의 방’ 으로 불리는 많은 방들이 있으며, 왕비가 사용하던 ’두 자매의 방’이 호화스럽게 만들어져있어 시선을 끕니다. 이슬람 왕가에서 여름에 사용하던 분수와 꽃으로 가꾼‘왕의 여름별궁’도 있고요, 왕족들이 투우를 즐겼다고 전하는 원형의 ‘카롤로스 5세 궁전’은 지금은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알람브라 궁전을 유명하게 만든 이야기들 (1)나스르 왕조 마지막 왕이 스페인 페르난도 2세에게 항복하고, 이 궁전을 바치고 떠나면서 ‘그라나다를 잃는 것 보다 알람브라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더 슬프다’라고 독백할 만치 궁전의 위용과 아름다움은 이슬람건축의 으뜸으로 평가를 받고 있어요. (2)스페인의 세계적인 기타 작곡가인 「타레카」(1852-1909)가 만든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궁전에서 받은 쓸쓸한 영감을 기타로 노래한 애잔한 곡으로, 궁전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회자되는 노래랍니다. 타레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나, 거절당하고 이별 길에 이 궁전에 들러, 궁전의 서글픈 역사와 자신의 비련을 비유하여 지은 노래인데, 불세출의 좋은 기타 곡으로 이 궁전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3)스페인의 카톨릭왕조가 이슬람 무어왕으로 부터 항복을 받아 무혈 입성하였으나 그 후 이 궁전은 거의 방치되어왔어요. 1832년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 이 궁전에 머물며, 궁전과 무어인들의 전설을 담은 ‘알람브라의 이야기’란 책을 쓰면서, 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고, 스페인 정부가 이 궁을 복원함으로써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스페인을 여행하던 헤밍웨이가 “스페인에서 단 한곳만 가라고 한다면 그라나다로 가야한다”고 말했다는데 아마도 알람브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 같아요. 하루 평균 관람자수가 1만여 명 정도라고 하니 대단하지요. ▲알람브라궁전, 구경할 곳은 많고, 날씨는 뜨겁고 이 성안과 궁전은 찬찬히 보기에는 너무 볼거리가 많고, 너무 넓고, 너무 오묘하며, 미로의 연속이었습니다. 스페인 7월의 오후는 뜨거운 햇빛에 애들하고 대식구가 다니기는 너무 더웠어요. 그러나 딸 내외는 측백나무 터널, 성곽 수로길, 가급적 나무 그늘이 있는 정원으로, 그리고 수로(水路) 쪽으로 햇빛을 피해 잘도 다니면서, 자식들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애를 쓰더군요. 그런 그들을 보는 우리는 꼬마들이 힘들까봐, 대충보고 나가자고 말하고 싶지만, 그들 가족의 일이라 입안에서만 맴돌았어요. 성안에 편의점이 있어 아이스크림이나 찬 음료를 사서 먹어도 먹을 때 뿐, 이곳의 오후 2-3시간은 모두에게 힘들었던, 뜨거운 여름 한 때의 여행이었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우리 ‘론다’로 갑니다 세비야에서 출발 2시간 후, 자그마한 론다 기차역을 나왔어요. 주변에 오렌지 나무들이 둘러 서있고 굵은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마침 한국 여학생 3~4명이 이곳 관광을 마치고 역 마당 그늘에서 돌아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반가워 먼저 말을 걸면서 그들에게서 론다 관광의 주요 포인트를 얻어 들었어요. 구경거리, 숙소, 맛집 등 여러 가지를 잘 가르쳐 주더군요. 론다는 해발 800여m 절벽위에 세워진 인구 약 3만 명의 작은 도시입니다. 타호협곡이 가르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연결해주는 누에보다리로 유명하죠. 절벽위의 하얀 마을, 헤밍웨이의 산책길, 오래된 투우장등이 이 도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 입니다. 더구나 헤밍웨이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도시요, 집필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함께 보내기 가장 좋은 곳’이라 극찬한 도시이기도 해, 많은 관광객들이 여기를 찾습니다. ▲협곡위에 세워진 론다의 ‘누에보 다리’ 론다 여행의 가장 핵심적인 곳이 여기예요. 론다역에서 15분정도 걸어 나오면 이 다리가 보입니다. 시내가 좁아 별도의 교통수단 없이 걸으며, 거리를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어 좋습니다. 옛 부터 과다레빈 강이 타호 협곡으로 흘러 마을을 두 개로 갈라놓았는데 이를 이어주는 120여m 높이의 다리로 아찔해서 현기증이 날 정도의 다리입니다. 두 시가지를 연결하는 3개의 다리중 제일 늦게 건설된 다리, 즉 가장 새로운 다리라는 뜻에서 ‘누에보(새로운 것)’라고 이름 지었다고 전합니다. 다리높이 120m, 길이 30여m 정도인데, 협곡아래로부터 벽돌로 쌓아 올렸어요. 건축시작 8개월 후 공사 중인 다리가 무너져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다시 짓기 시작한지 43년만인 1793에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다리는 스페인 내전당시 감옥 및 고문장소로 활용되면서, 포로들을 창문에서 골짜기 아래로 내던져 사형을 시키는 잔혹한 장소였다고 합니다. 아찔한 절벽사이의 근사한 비유(view)와 아름다운 모습의 다리이지만, 이런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비운의 다리이기도합니다. 더불어 헤밍웨이가 쓴 소설의 탄생지요. 그와 많은 예술인들이 사랑했던 도시이며 투우의 최초 발생지입니다. 평소 투우를 좋아했던 헤밍웨이의 흉상과 기념비가 근처에 있어 세계적인 유명관광지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헤밍웨이의 산책로’를 거닐다. 헤밍웨이가 걸었던 산책로는 누에보 다리에서 ‘론다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입니다. 전망대에서 멀리, 아래로 넓은 평원과 농촌마을을 바라볼 수 있어 가슴이 탁 트여요. 그는 이 길 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사색하면서 스페인 내전을 다룬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37세 때 스페인 내전에 참전 했고 그 전쟁과 론다를 배경으로 소설을 썼지요. 그 대표적인 자리에 누에보 다리가 있고 이런 대문호의 생전 실화와 그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있는 주변에서 그가 걷든 산책로를 거닐어 본다는 사실이 정말 영광스럽고 감격 했습니다. ▲누에보 다리 아래의 특별한 비경(秘境) 누에보 다리의 보통 관광 코스는 다리 위를 걸어가, 구시가지 주변을 둘러보고 되돌아오는 정도인데, 우리는 좀 달랐어요. 다행히 다리 옆쪽 가까이에 숙소를 정하는 바람에 다리측면 부분도 자세히 볼 수 있었고, 밤에는 불빛 찬란한 그 주변의 근사한 야경도 잘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또 특별한 것은 다리를 건너가 구시가지에서 아래 계곡까지 200여m의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가면서 계곡바닥과 다리를 생생히 올려다보았어요. 그러고 론다의 절벽아래 마을에서 오렌지, 올리브 숲 등 평화스런 농촌풍경까지도 구경했습니다. 누에보 다리는 다리위에서 보는 경관도 좋지만 다리 아래서 다리와 절벽을 쳐다보는 경치도 좋더군요. 두어 시간정도 일상코스를 벗어나, 모처럼 맑은 공기와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애들과 함께 유명한 누에보 다리 밑의 시골길을 걸으며 그 아래 전개되는 별도의 전원비경도 보았다는 것에 뿌듯한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스페인 「세비야」 가는 길 리스본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밤 10시, 야간버스로 7시간을 달려 이튿날 새벽 5시쯤에 세비야에 도착해 예약해놓은 유스호스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초등생인 애들이 이젠 자기관리에 익숙해져 다행입니다. 세비야는 안달루시아 주도로 인구 70여만의 스페인 4번째 큰 도시 입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서부 550km 떨어져있는 항구도시며 문화관광 중심 도시이기도하지요. 올리브, 포도주, 과일, 담배, 도자기류가 주 생산품이며, 미술, 오페라, 음악등 예술의 도시로도 각광을 받고 있어요. 대성당, 알카사르 궁전, 히랄다 탑등 유명한 종교시설 이 있으며 집시의 춤인 풀라멩고의 본 고장이라고 합니다. ▲세계 세번째 큰 성당, 세비야 대성당 여행하면서 본 성당 중 어느 성당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장엄했습니다. 이 성당을 지을 때,(1401년)참사회(중세이후 도시의 시정 관리기관)로 부터 “그 어떤 성당보다 크고 아름답게 지어, 훗날 이 성당을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어라”라고 엄명을 받고 지어, 105년이나 걸려 1506년에 완공되었다고 해요, 이스람 사원 자리에 스페인 왕국의 부와 힘을 과시하기위해 건립되었다고 하는 데 성당에 들어가면 황금색의 중앙제단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이 성당의 주(主) 제단 인데 높이가 27m, 폭 18m정도, 화려하고 섬세하고, 웅장하고 장엄해 어안이 벙벙해요, 성경속의 인물 1000명을 황금색으로 조각해놓은 제단으로 제작에 80년 정도가 걸렸고 황금 20여톤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더구나 성당 천장도 많은 황금으로 장식됐다고 하는데, 성당 내부가 값비싼 예술품과 보물의 거대한 창고처럼 보여요. 대항해시대 식민지에서 모은 스페인의 막강한 부의 산물인 황금으로 치장한 세계최대의 황금제단이요, 예술의 극치입니다. 왕실전용 예배당과 성가실 면적도 대단하고요. 모든 게 크고 아름답고 웅장해 당시 참사회지시대로 훗날(지금) 우리가 볼 때 그때 사람들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엄청 거대합니다. 성당 근처에 알카사르 궁전이 있는 데, 타일 장식과 시원한 분수와 아름다운 연못이며, 야자수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로 멋진 정원을 만들고 있었어요. 또한 근처에 대성당의 종탑인 높이 97m 정도의 희랄다 탑에서는 28개의 종이 매 시간마다 울려요, 이탑은 오르는 계단대신 경사로만 만들어져 거리간격만 표시 놓고 있는 게 특이해요. 귀족들이 탑에 오를 때 말을 타고 쉽게 오르도록 그렇게 만들었다고 전해와요. 탑 정상에 올라보면 아름다운 세비야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관광객들이 힘들지만 애써 올라오나 봅니다. ▲세비야 성당 안에 있는 콜롬버스의 묘〔관〕이야기 성당 안쪽에 4명의 스페인 왕들이 어깨에 콜럼버스의 관을 상여처럼 둘러메고 서있는 조각이 있어요.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랍니다. ‘죽어서도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으리 라’는 그의 유언대로 관이 땅에 묻히지 않고 공중에 떠있는 모양이에요. 콜롬버스(1451~1506)는 이태리 출신이지만 항해가로서, 스페인 왕실 후원으로 대항해시대에 많은 황금과 부를 스페인에게 안겨주었지요. 그러나 그를 지지하던 이사벨여왕이 죽자 말년에는 냉대를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해요. 스페인 카스티아 지방에서 죽을 때 절대 스페인 땅에 묻지 말라고 유언을 했데요. 사후 도미니카, 큐바 등으로 옮겨지면서 외국으로 떠돌다가 400여년 만에 스페인(세비야)에 왔어요. 당시 스페인 4대 왕국의 왕이 그에게 잘못을 사죄하고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의 유언대로 유골을 내려 땅에 묻지 못하고 떠메고 있는 의미래요. 앞쪽 두왕( 카스티아, 레온)은 고개를 들고 있고 뒤쪽 두 왕(나바라, 이라곤)은 반성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앞쪽 두 왕은 콜롬버스를 지지한 왕이었고 뒤쪽 두 왕은 그를 반대했던 왕이래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앞쪽 두 왕의 발이 유난히 반짝거린다는 거예요. 이들의 발을 만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세비야에 다시 온다는 신념과 부자가 된다는 속설 때문으로, 관광객들이 즐겨 만져서 그러하답니다. 저희도 다시 오고 싶어서 그들의 발등을 만졌습니다. ▲정열의 춤, 세비야의 플라멩고 저녁에 예약해놓은 풀라멩고 춤 공연장으로 갔어요. 이 춤의 본고향이 이곳인 만큼, 추억에 남을 것 같아서 애들과 사위는 숙소에 남고, 나머지 세 사람만 관람키로 했어요. 30여명 정도 모인 장소인데, 1시간에 20유로정도로 입장료가 비싼 편이더군요. 싱어 1명, 키타리스트1명, 댄서2명(남녀각 1명)총 4명이 출연진이었는데, 이 3종류를 플라멩고의 3대 요소라고한데요. 풀라멩고는 스페인의 전통춤과 노래의 통칭으로. 남부지방에서 발달했고, 세비야가 본 고장이라고 합니다. 14세기경 스페인의 민요에서 유래된 것으로 집시들의 한과 외로움을 춤과 노래로 표출한 정열적인 소리와 빠른 몸짓이에요. 세비야 근처의 「과달키비르」 강을 통해 무역이 활발할 때 집시들이 강가언덕에서 춤을 추면 무역상인들이 돈을 던져줘서 생계를 유지한 그들의 생계수단이었고 19c 이후부터 춤 무대가 공연장으로 이동되면서 직업적인 춤추기와 관광수단으로 발전됐다고 합니다. 4명이 연출하는 박수치기, 케스터넷츠 흔드는 소리, 키타 연주소리, 구두로 바닥을 치며 내는 소리, 남녀 커플의 현란한 춤사위 등 요란하고 격정적인 1시간이 금방 가버리더군요. 집시들의 희노애락이 섞인 격동의 율동과 노래는 온몸으로 피를 토하는 분노와 서러움의 절규로 보였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5년 6월, 2개월간 유럽지역 자유 캠핑 여행을 했습니다. 우리부부와 딸 내외, 외손주 2명(초등생)등 가족 6명이 함께 했어요. 이동하기 힘든 인원에 짐 가방도 7~8개 나 되어 여간 힘들지 않았어요. 영국, 스코트란드, 아이스란드를 거쳐 동서 유럽권과 포르투칼, 스페인 등 12개국이 여행 대상지였죠. 각국의 생소한 노정과 낯선 풍물에 힘들었지만 호기심을 등불 삼아 좋은 경험을 했어요. 지금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려운 만큼, 당시의 기행 관련사항을 참고해 주요 발자취를 연재합니다. 독자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르투칼의 에그 타르트 빵 포르투칼 관광객이면 꼭 맛봐야한다는 ‘에그타르트’ 빵의 원조가게가 리스본 제로니무스수도원 건물 옆에 있어요. 관광객들이 가게 앞에서 도로를 따라 장사진이었고 먹고 가는 사람이 서있는 줄과 그냥 사가는 줄로 시끌벅적해요. 빵 1개 1.05유로(1430원)이며 하루 평균 1만여개가 팔린다고 합니다. 오렌지 색깔 둥근 빵으로 겉은 바삭 바삭 속은 말랑말랑, 달콤하고 부드러워요. 나이든 나도 맛이 좋은데 손자 녀석들이야 오죽하겠어요. 이 빵은 원래 이 옆 수도원에서 제조되어 온 것으로 달걀 노른자위로 만들어진다고 해요. 수도원이 번성할 때 해마다 수녀복에 풀을 먹이기 위해 수천 개의 계란 흰자위를 사용하였는데 버려지는 노른자위가 아깝고, 또 수사들의 식재를 위해 빵을 만들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수도원 근처 설탕 정제 공장으로 운영권이 넘어가 1837년부터 공장주가 가게 문을 열어, 지금까지 이 후손들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고 해요. 지금도 수도원에서 전수된 레스피대로 만들고 있으며 이 비법은 주인과 2~3명의 핵심요원만이 알고 있다고 합니다. 빵가게 이름은 ‘파스테이스 데 벨렘’이라고 불러요. ▲리스본의 28번 트램(전차)과 우리가족 소매치기 사건 리스본시내 일반교통수단은 주로 트램(전차)인데 그중에서도 노란색상의 28번이 고지대가 많은 리스본 중심부와 주변을 두루 관통하는 혈관 같은 교통수단입니다. 따라서 시내에서는 많은 관광객들이 이 노선을 즐겨 이용하고 있어요. 오랜 기간 운행된 낡은 전차이며 좁은 철로에 언덕길과 골목을 요리조리 다니다보니 복잡하고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리스본 시내모습을 제대로 보려고 하면, ‘상조르제성’까지 올라가야하는 데 이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이 코스가 필수예요, 그래서 항상 이 트램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따라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주의말도 듣게 되요. 그런데 설마 하던 우리가 털렸어요. 사위가 100유로 (1유로/1365원) 1장을 소매치기 당하고 말았어요. 호주머니 한 쪽에 비상용으로 꼭꼭 접어 두었는데, 그놈들의 빼기 술법이 교묘한 모양이죠. 몇 명이 한조를 만들어 찜한 자를 밀치고, 정신을 딴 데로 홀린 다음 슬쩍한 모양이에요. 흔들리고 복잡한 차내에서 아이 둘까지 커버해야하니 자신(사위)보안에는 다소 소홀했구나 싶어요. 차비가 1회에 3유로이니, 이 전차를 30여번 더 탈 수 있는 거금인데 하필 멀리 코리아에서 찾아온 우리한테 마(魔)가 뻗혔는지 그땐 억울했어요. 그러나 가끔 이 에피소드를 끄집어내어 얘기할 땐 좋은 여행 자산이 되어 웃곤 합니다. ▲대서양의 최서단 해수욕장과 한국 해산물 식사 연일 뜨거워지는 7월의 포르투칼, 폭염을 피하기도하고 애들을 위해 해변투어를 하기로 했습니다. 아침 맑은 날씨에 해안을 따라 500번 2층 빨간 버스는 신나게 달립니다. 해변 도로는 깨끗하고 이름 모를 서양나무들이 줄을 서서 지나갑니다. 언덕에는 좋은 저택들이 바다를 향해 서있고 해안 곳곳에 요트들이 접안돼 있어 그들의 풍요로움이 부럽기도 해요. 약 한 시간 후 푸른 바다와 모래사장이 넓은 어느 해수욕장에 내렸어요. 포르투 북서쪽 근교에 있는 마토지뉴스 해수욕장이랍니다. 멀리 대서양의 확 트인 만경창파가 수평선으로 아득해지면서 우리가 대서양의 최서단 해변에 와있구나 싶어 약간 흥분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서핑과 해수욕장으로 이름나있다고 하는데 모래벌이 넓고 길어요. 더운 여름치고 피서객들이 많지 않고 한적해서 좋았어요. 애들은 물가에서 두 형제끼리 첨벙거리며 놀았어요. 딸 내외는 저희 둘 만의 시간을 갖고 우리 둘은 애들의 동태를 주시하며 지냈죠. 보통 애들의 안전은 내가, 조석식사는 집사람이 주로 맡고 숙소예약과 노정 찾기는 딸 내외가 하게 되는 데 가족인데도 가끔은 의견충돌이 생겨 서로 짜증과 오해가 생겨요. 이럴 때 마음을 푸는 프리타임 시간이 필요하게 되더군요. 점심때는 뒤쪽 도시 골목 식당에 들렀어요.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도미, 청어, 오징어 등 영락없는 한국생선이 올라오더군요. 대서양에서도 우리나라 어족이 자라나 싶어 무척 반가웠어요. 그리고 큰 석쇠에다 소금을 뿌려, 생선을 굽는 모습도 우리와 똑같았어요. 그러고 보니 포르투칼이 한국 음식문화와 비슷하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포르투에서 멋진 시민축제행열을 보다. 도루강 주변 야경을 보기위해,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아름다운 상벤투 기차역을 지나갔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라고 합니다. 마침 시민축제행렬이 요란한 밴드 음악소리를 앞세워 시내로 들어오고 있었어요. 뜻밖에 좋은 구경거리를 만나게 됐죠. 시내 각 지역 주민들이 지역 전통의상을 입고 특산품을 들고 밴드를 앞세워 춤을 추고 노래하며 거리를 자유스럽게 행진하는 일종의 연중 민속놀이라고 합니다. 일반시민과 관람객들은 도로가에 서서 구경하고 나중에는 그들과 같이 어울리기도 하더군요. 농어민과 상공인 등 직업 따라 자기들이 가꾼 과일, 채소, 빵, 생선, 기타 축산 및 공산물을 자랑하며 웃고 떠들며 거리를 활보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가진 것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관중들에게도 나누어 주더군요. 축제시민들의 얼굴은 모두들 즐겁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여유와 웃음과 재치로 시민들이 서로 즐겁게 소통하는 이런 축제행사쯤을 우리나라도 언제가 가질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