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가수 박슬기 씨 첫 회, 엘실용음악학원 이경희 대표 대미 장식! 2021년에도 ‘셔블&서울 경주사람들’은 48회에 걸쳐 뜻 깊은 활동을 하고 있거나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룬 경주사람 54인을 실었다. 2021년 마지막 호를 맞아 어떤 인물들이 이 코너를 빛내주었는지 되돌아보고자 한다. 올해 첫 신문인 1417호에는 ‘미스 뮤지컬 선발대회’에서 1위에 오른 박슬기 씨가 초대됐다. 박슬기 씨는 인기 음악 유튜브 티키틱과 함께 신곡 ‘숙면소감’을 발표했고 현재 뮤지컬 앤에 주연으로 출연 중이며 새해 1월 8일부터는 ‘이상한 나라의 아빠’에서 여주인공역을 맡아 2022년이 더 기대된다. 올해 마지막 초대 손님은 경주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치고 연주하는 엘실용음악학원 이경희 대표였다. 이경희 대표는 대중음악에 대한 인식과 지원이 부족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경주의 대중음악을 발전시키려는 음악가들의 현황을 자세히 알렸다. 하다 보니 음악으로 시작해 음악으로 마친 셈이다. 올해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 코너를 빛내 주었다. 사업가, 법조인들을 비롯해 22분의 전문인들이 이 코너에 초대돼 자신들의 사업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술인들이 21분 초대됐다. 이들 중 미술인들 10분, 음악인 5분, 극예술 분야가 4분이다. 학계와 체육계 각각 2분, 기타 여러 분야의 손님들이 모셔졌다. -차재욱 클라이밍스쿨 교장, 김세훈 BCC글로벌 부사장, 박재평 보험 중개사 새로운 분야 관심 끌어 그 중 눈에 띄는 분야의 전문인은 경주클라이밍스쿨을 운영하며 인공암벽이나 등산이 인격형성에 얼마나 좋은 스포츠인지를 알려준 차재욱 교장, 기업의 해외진출을 돕는 국제적 컨설팅 기업인 BCC글로벌 김세훈 부사장의 맹렬한 이야기와 뜻밖의 보험 이야기로 배상책임보험의 유용성을 알려준 박재평 ㈜피엔에스보험중계 대표를 꼽을 수 있다. 올해 초대된 손님 중 가장 젊은 사람은 뮤지컬 가수 박슬기 씨이고 가장 연장자는 뉴코리아 필하모닉 송재용 단장이다. 그러나 박슬기 씨는 탁월한 가창력과 연기력으로 뮤지컬계에서 만만치 않은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송재용 단장은 언제나 왕성한 활동으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두드러지는 활동으로 2회에 걸쳐 이 코너를 장식해주신 예술인들도 특별히 기억난다. 경주를 사랑한 마산 출신 강원석 시인이 아름다운 시로 달빛 경주를 노래했고, 이 시가 가수 ‘조성모’ 씨와 작곡가 ‘알고보니혼수상태’ 듀엣의 작업으로 실제 대중가요로 탄생하면서 한 번 더 초대됐다. 평생이 보장된 국립박물관 학예사를 그만 두고 결연히 서예의 세계로 뛰어들어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작업을 펼치고 있는 서예가 박진우 작가도 2회에 걸쳐 초대됐다. 박진우 작가의 작업실 모습과 국립고궁박물관 도입부 전시에서 심혈을 기울인 역작 ‘적심(積心)을 선보이며 한 번 더 초대됐다. 올림픽이 열렸던 만큼 올림픽과 관련한 뒷이야기를 쓰면서 대한민국 탁구의 영원한 명장 강문수 감독을 연속해서 올리기도 했다. 올해 두 번 초대한 것은 아니나 지난해 이 코너에 소개된 정병웅 전 한국관광학회 회장과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이 새로운 주제를 들고 이 코너의 초대 손님에 응해 주었다. KBS유명 PD출신 연극감독에서 연기자로 변신 중인 엄기백 배우의 제2의 인생역전도 두 번째로 초대됐다. 지난해 경주 보문의 핫한 명소로 떠오른 키덜트뮤지엄 김동일 관장은 동해안 해양쓰레기를 수거하고 재활용하는 환경지킴이로 한 번 더 초대됐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양음악을 전하고 대한제국황실양악대를 조직한 프란츠 에케르트 서거 105주년을 맞아 음악 역사의 부활을 주도하는 뉴코리아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송재용 단장도 다시 초대됐다. -잉꼬 부부 세 쌍 해리원, 로만시티, 쭈사랑 불쭈꾸미 독자들에게 싱그러운 기쁨 안겨 사업가들 중에서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잉꼬’ 사업가 부부도 초대됐다. 남산동에서 한옥고택민박집을 운영하는 사진작가 한용석 선생과 아마추어 밴드로 활동하는 이경미 가수의 부부 캐미가 돋보였다. 이에 질세라 소티남길에서 생뚱맞아 보이지만 행복 가득한 브런치 카페를 경영하는 예술 PD 이동우 선생과 화가 박미희 작가 부부 이야기도 소담스러웠다. 분황사 맞은 편에서 대형식당 ‘쭈사랑불쭈구미’를 경영하며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는 오경철·황연신 부부사장의 따듯한 마음도 담을 수 있었다. 특별히 대비되는 초대 손님도 있다. 돌을 자연 그대로 감상하는 수석인(壽石人)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동적인 인터넷 수석카페인 무찰카페를 운영하는 윤병숙 선생이 초대되었는가 하면 경주남산의 화강암을 조각하며 신라인의 혼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오채현 조각가의 치열한 작업현장도 소개됐다. 이 셔블&서울 코너에 대해 일부 시민들과 독자들은 성공한 사람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란으로 오해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신문의 구조상 파급효과가 큰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속성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숨겨진 보석을 찾는 작업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우리 시대 경주사람이나 경주 출향인, 경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코너에 출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내세우고 싶은 사람이나 주변에 추천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박근영 기자와 경주신문을 찾아주기 바란다. 이 코너는 다름 아닌 경주 사람들, 여러분의 것이다.
경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인만큼 온갖 예술 문화가 농축돼 흐르고 있지만 유독 경주의 대중가요와 실용음악 부분은 다른 문화자산에 비해서는 부족하게 보인다. 경주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음악인들도 소수에 그치고 이들을 위한 공연 기회나 제도적 지원도 국악이나 클래식 등 다른 음악분야에 비해서는 충분하지 못한 편이다.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천만을 넘겼다고 호언하는 경주시에서 가장 일반적이어야 할 실용음악과 대중음악의 활동이 이처럼 부진한 것은 아이러니다. 경주 동천동에서 ‘엘실용음악학원’과 ‘EL팝오케스트라’를 함께 운영하며 작곡과 공연기획, 강의를 하고 있는 이경희 대표는 바로 이런 아쉬운 현상을 극복하고 경주를 실용음악과 대중가요소비의 측면에서도 좀 더 높은 경지로 이끌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음악인이다. 무엇보다 직접 운영하는 ‘EL팝오케스트라’의 활약에 눈길이 간다. “경주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2030 실용음악 전공자 뮤지션들로 2018년에 ‘EL밴드’를 창단했습니다. 뒤에 좀 더 다양하고 폭 넓은 활동을 위해 클래식 전공자 뮤지션도 영입, 2019년 ‘EL팝오케스트라’로 확대 개편해 실용음악분야에서 대중성을 추구하는 EL만의 매력을 예술성 있는 오케스트라로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경희 대표는 풀오케스트라 편성의 라이브 공연이 예산이나 맴버 구성의 어려움으로 인해 지역에서 운영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 소규모라도 기동성 있는 ‘EL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며 가까운 곳에서 경주시민들과 호흡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EL팝오케스트라에 참여하는 뮤지션들은 2030청년들 15명으로 경주가 고향인 선후배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출중한 연주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정기적인 공연이 힘들어 현재 대부분 학원을 운영하거나 학교 위탁강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 와중에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주급을 받는 피아노 연주자도 있고 SNS와 또는 황리단길에서 이미 유명인사가 된 섹소폰 연주다도 있다. 그들 모두 고향 경주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경주의 실용음악과 대중음악을 발전시키기를 희망한다. 그런 한편 EL오케스트라는 맴버들뿐만 아니라 클래식을 전공한 음악인들과 음악을 애호하는 시민들이 팝오케스트라 편성의 공연에 연주자로 참여하실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있으며 그에 맞는 콘텐츠도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야심찬 준비와 계획들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로 인해 공연 자체를 열지 못하면서 뮤지션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2020년 코로나19 시국으로 인한 공연계가 침체 되었을 때, 경주정신건강센터와 협력해 경주최초 드라이브 인 콘서트를 기획·제작했습니다. ‘위로’ 라는 주제로 공연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민들께서 찾아주신 와중에 ‘인원제한’으로 많은 분들이 차를 돌려야 했습니다. 그때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시 그 공연이 잘 진행되도록 시민들을 비롯 화랑마을 관계자들과 경주 보건소 및 정신건강센터 관계자들이 관람하고 뜨겁게 호응해줘 오히려 이경희 대표와 밴드 연주자들이 더 큰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 같은 이경희 대표에게 코로나 상황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실용음악에 대한 경주의 전반적인 정서가 다른 음악장르들에 비해서는 다소 소홀해 보이는 것에는 적지않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실용음악가들의 입장에서 본 경주의 대중음악은 불모지에 가깝다는 반응이다. 실제로 코로나 상황 전과 후를 막론하고 경주 곳곳에서 열리는 축제나 공연들에서 실용음악 중심의 공연이 열리거나 실용음악가들이 초대받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중가요 가수가 초대되어도 전국무대에서 활동하는 유명가수 중심이라 지역 대중음악인들이 설 자리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유명가수의 지명도에 따른 관중동원력 등을 인정하면서도 기왕 무대를 꾸미는 걸음에 지역뮤지션들을 소개하는 장도 마련해준다면 동반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인데 이런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경주 대중음악인들 설 수 있는 무대 지나치게 좁아. 음악 연습할 시간에 서류공부에 인맥쌓기 해야 할 판 “대중음악 여건은 처참합니다. 정기공연은 각 멤버의 사비로 진행하거나 황리단길에 자체 음향장비와 악기를 들고나가 버스킹을 하는 형태로 진행하는 정도입니다” 이경희 대표는 문화예술 컨텐츠를 제작할 때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면 대중음악이 참여할 수 있는 폭이 좀 더 넓어질 것이고 그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도 기대 이상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실제로 기자의 시각에서도 경주의 각종 정기공연들을 보면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비슷한 공연들이 대부분이고 대중가요를 베이스로 한 공연은 전무한 실정인 만큼 이경희 대표의 제안은 확실히 신선해 보인다. 그런 한편 이경희 대표는 각 공연단체들의 활약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자료를 토대로 ‘고과제’를 반영해 지원하자는 제안도 한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뮤션 자신들의 노력이 우선해야 하지만 최소한의 관심과 지원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통해 훨씬 비약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란 이경희 대표의 희망사항이다. “객관적인 성과를 평가해 지원한다면 비록 지원을 못 받더라도 불만을 가지기보다는 더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시민들이 참여해 평가한다면 시민들이 더 만족할 공연을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경희 대표는 경주 대중음악의 내일을 이끌겠다는 뮤지선들이 모인지 3년이 지났지만 지자체 차원의 공연 기회는 설립 후 한 번도 얻지 못했고 겨우 경주문화재단의 지역예술인 육성사업을 통해 공연한 것이 전부라며 소외된 심정을 토로한다. 특히 지자체가 사단법인에만 지원하는 관례들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시한다. 사단법인 설립 자체에 이미 상당한 자본과 인맥이 필요한데 그런 것이 뮤지션들의 직업 특성상 일종의 진입장벽이라는 것. “공연의 기회를 부여받기 위해서 음악을 열심히 연습하고 훌륭한 콘텐츠를 제작하는 게 더 중요한데 실제로는 서류작업에 골몰하고 사람관계를 넓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콘텐츠를 운용에 많은 자본이 들어 부담도 크지요” 결국 생계문제로 음악계를 떠나는 뮤지션들도 대부분이고 실력이 좋을수록 더 빨리 음악계를 떠나거나 아예 큰도시로 떠나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이 반복된다. 6세 때 어머니의 권유로 클래식 피아노를 시작하며 음악을 접한 이경희 대표는 고교시절 인터넷으로 해외 재즈연주자들과 팝뮤지션들의 음악을 접하며 실용음악세계로 빠져들었다. 음악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떠나 아르바이트로 모은 200만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해 실용음악을 공부했다. 쇼팽에 매료돼 단 두 음절 때문에 몇 시간씩 피아노와 씨름하기도 한 적도 있다는 이경희 대표는 한때 음악에 한계를 느껴 포기하고 경주로 돌아와 다른 사업을 시도하던 중 경주의 뛰어난 후배 뮤지션들을 안타깝게 접하면서 불현듯 음악으로의 꿈이 되살아났다. “‘경주는 가능성이 없다, 희망이 없다’며 떠나려는 인재들을 모아서 경주에서 활동해보자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경주 대중음악의 미래이자 희망이라 믿었지요. 경주 출신 뮤지션 중 서울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경주에 활동하기 좋은 음악 생태계가 마련된다면 경주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도 늘어날 것이고 경주를 떠났던 유명인들도 고향 경주로 돌아오겠지요” 계림중과 신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 SJA실용전문학교에서 작곡과 실용음악학을 전공한 이경희 대표는 실용음악과 대중음악을 배우려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가르치는 한편 경주시 관내 학교에서 밴드부 외부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한편 재외한국인 취업자들과 다문화 친구들에게도 음악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또 경주를 떠나 큰 도시로 나간 대중음악의 숱한 별들과 함께 마음껏 경주에서 공연하는 것이 이경희 대표의 가장 큰 꿈이다. 코로나가 극복된 후에는 경주에도 실용음악, 대중음악의 뜨거운 열기가 타오르기기를 기대한다.
지난 12월 1일부터 내년 2월 27일까지 경복궁 옆 국립고궁박물관 1층에서 경주 출신 박진우 작가의 아주 특별한 서예 전시회 ‘고궁연화(古宮年華)’전이 열린다. 경복궁 발굴복원 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전시회에서 박진우 작가가 도입부 전시를 맡아 자신의 기량을 한껏 펼쳐 보인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박진우 작가가 이 전시를 의뢰 받은 후 그야말로 심혈(心血)을 기울인 고심 끝에 찾아낸 화두인 ‘적심(積心)’이 서예로 승화된 현장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적심’은 궁궐 기둥을 세울 때 건물의 구조적인 안정을 위해 기둥 아래 구덩이를 파고 돌이나 자갈, 기와 등을 넣어 다진 기초를 일컫는다. 경복궁 발굴·복원을 ‘작가의 자유로운 시각으로 궁을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로 연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박진우 작가는 그때부터 치열한 내적 고심과 부담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건천궁 내 장안당 툇마루에 앉아 복원을 거의 끝내가는 향원정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들을 했습니다. ‘네 마음대로 해봐. 그런데 여기는 ‘국립’고궁박물관이라는 걸 염두해 둬!’ 이렇게 들리는 듯 했어요” 주어진 시간은 작품의 주제와 조형 아무것도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촉박하기 이를 데 없는 30일! 그때부터 박진우 작가는 경복궁 관련한 책들을 빌려오고 문화재청 사이트에 들어가 경복궁 발굴·복원과 관련한 발굴보고서는 모두 다운받아 공부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경복궁 발굴·복원 30주년 기념 학술대회도 꼼꼼하게 챙겨봤다. “고심을 거듭하다 문화재청 최인화 연구관님의 ‘적심’과 관련한 논문과 거기에 사용하신 이미지와 도표들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적심은 여러모로 박진우 작가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적심은 건물의 바탕이어서 일제가 건물과 기단부를 훼손시켰어도 적심이 복원의 실마리를 제공했지요. 그래서 적심을 ‘건물의 DNA’로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잘 다듬어진 장대석뿐 아니라 깨지고 모난 돌, 기와와 도자 파편, 여러 흙 등 볼품없고 이름 없는 것들이 한데 모여 큰 에너지를 응축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박진우 작가는 적심이라는 글자가 가진 그대로 ‘마음이 쌓여있다(積心)’는 점에 주목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전각들을 만든 옛사람들의 마음. 발굴과 복원을 하는 현재 우리들의 마음 등이 먼저 가슴 속에 들어왔는데 제가 하고 있는 적묵(積墨) 작업과도 유사성이 있었고요!” 그렇게 ‘적심’을 전시의 주제로 확정짓고 나니 3주의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이라는 물음의 답을 찾는 데만 한 주를 써버린 것이다. 그럼 이 적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했을까? “이 작업은 이전의 작업들과는 달리 3차원 공간 전체가 전시의 대상이었습니다. 도입부 공간이 가로, 세로 각 약 10미터, 높이 3미터의 30평 공간이었습니다. 단순히 작품을 벽면에 거는 것을 뛰어넘어 적심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적심의 ‘수평’과 ‘수직’ 개념이다. 발굴현장을 드론으로 찍듯 하늘에서 본 적심이 ‘수평단면 적심’이고 발굴현장의 토층을 정면에서 절개하듯 단면을 응용한 것이 ‘수직단면 적심’이다. 전시장에는 모두 7개의 수평단면 적심과 4개의 수직단면 적심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를 통해 경복궁 발굴 현장을 직접 갈 수는 없지만 발굴·복원의 핵심이자 실마리인 적심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다. “‘수평단면 적심’은 경복궁 발굴현장을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서 그 곳을 내려다보며 배회한다는 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바닥에 구현했고 ‘수직단면 적심’은 원본 혹은 크롭해 확대한 이미지를 ‘천’의 형태로 늘어뜨려 적심 위 기둥을 연상시켜 관람자가 땅 아래로 내려가 궁궐 내부의 기둥 사이사이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박진우 작가는 자신이 의도한 생각과 이미지 이상으로 실제 전시장에 해석해 구현시킨 ‘고궁연화 전시팀’ 이지혜 디자이너의 공을 크게 내세웠다. 실제 작업은 지난 번 한양대학교 박물관 ‘우주 시리즈’에서 보여준 먹물 뿌리기 - 드리핑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먹이 단순히 검기만 한 것이 아니고 먹 재료에 따라 다양한 색을 낸다는 박진우 작가의 평소 관념이 크게 작용했다. 다양한 먹색이 적심의 돌과 기와, 도자기 같은 여러 질감을 차별성 있게 구현한다는 것! 작업이 확정된 후 한지에 돌을 깔고 붓에 먹을 적셔 뿌리는 지난한 작업이 시작되었고 돌을 걷어낸 후 다시 흰 공간에 색을 들이는 고된 작업이 밤낮없이 되풀이 됐다. 이 과정에서 먹에 절은 손가락이 부르터 피가 났고 허리에 무리가 가 아내가 출산 때 찼던 복대를 차고 작업해야 했다. 이 내용은 아내 오다연씨의 페북 기록에서 찾은 내용이다. “언더그라운드 시리즈(Underground Series)의 첫 작업으로 선보인 <적심> 작업은 흙과 돌이 주제였습니다. ‘적심’은 ‘쌓다’라는 개념과 ‘돌’이라는 물성에 주목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지층이 쌓여있는 모습은 담묵(淡墨)부터 농묵(濃墨)까지 수만 가지의 먹색을 쌓아올리는 적묵(積墨)과 오버랩 되었습니다. 거기에 돌이 가진 단단한 힘과 에너지를 구현시키기 위해 실제 돌들을 과감하게 사용했고요” 전시장 전면에 연출한 ‘수평단면 적심’ 두 작품은 돌을 사용한 작업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작품 위에 실제 사영했던 돌들을 그대로 올려놓았다. 이렇게 ‘적심’이 완성되었다. 이런 치열한 과정을 거친 박진우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도중 ‘적심’의 뜻이 더욱 분명하게 인식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는 더더욱 가치 있게 보인다. “전시를 진행하면서 이 전시에 참여하는 앞서 밝힌 역사와 시간 발굴의 노력과 땀뿐 아니라 박물관 전시팀과 디자이너들의 치열한 마음과 정성, 제 곁에서 고뇌하고 작업에 미쳐 있는 저를 본 아내의 애처로운 마음까지 차곡차곡 쌓여 감을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적심 그 자체였지요!”
재난과 재해, 질병과 고통, 감추어진 곳에 숨어 있는 숱한 어려움, 하다못해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에 경험하는 불편 등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어두운 부산물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어두움을 이겨내는 데도 역시 사람이 나선다. 2003년 이후 우리나라 대부분 재해와 재난의 현장을 온몸으로 누비며 현장을 복구하고 치유하던 베테랑 지휘자로 활동하다 지난해 서울에서 가장 많은 자원봉사자가 등록된 강서구자원봉사센터 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는 경주 출향인 김삼렬 센터장을 만났다. -연평도, 세월호, 경주지진까지 전국 115개 지차체 누비며 구호사업 참여 및 진두지휘. 우리나라 재해구호기술 최고수준! 현재는 자원봉사센터에 근무하지만 17년간 전국의 재난 재해 현장을 온몸으로 뛰었던 경험을 먼저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영남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세 번이나 도전하고 낙방하는 과정에서 나이가 많아져버렸습니다. 여러 기업들에 도전했지만 나이 때문에 속속 좌절되던 중 저를 받아준 곳이 재해구호협회였습니다” 취업자체를 위해 입사한 재해구호협회였지만 입사 후의 책임감은 누구보다 무겁고 분명했다고 회고하는 김삼렬 센터장은 지금도 재난관련 사고에서 자문을 아끼지 않는다. 재해구호협회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비상위원회 위원장 시절 만든 단체다. 김삼렬 센터장이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곳이 채 법정기관이 되기 전이었다고. “전국의 재해재난 현장에서 가슴 아픈 순간도 많았고 하나씩 구호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람도 많이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고난과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나마 일으켜 줄 수 있었기에 그 일을 천직처럼 알고 살았습니다” 김삼렬 센터장의 말대로 대한민국 곳곳의 재난현장에는 어김없이 김삼렬 센터장의 땀이 배어있다. 북한의 무도한 도발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던 연평도 포격 현장(2010), 갑작스런 대진동으로 위협을 준 경주 지진 현장(2016), 엄청난 피해를 입힌 울산 태풍 치바 현장(2016),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준 대구 서문시장 화재 현장(2016), 인천 소래포구 화재 현장(2017), 강릉산불 현장(2018), 지열반전 문제를 야기한 포항 지진 피해 현장(2018) 등 전국의 크고 작은 현장에 걸쳐 무려 115개 지자체와 구호사업을 함께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재난현장을 다니면서도 딱 한 곳, 자신마저도 좌절과 눈물 속에서 희망이라는 말조자도 꺼낼 수 없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팽묵항, 세월호 참사현장이었다며 고개를 숙인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합니다. 어른으로서, 재난구호자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뼈아프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김삼렬 센터장은 재난에 대응하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재난이 일어났을 때 그 현장을 통제하는 사람들의 현명한 판단과 현장을 책임진 사람들의 확고한 책임의식이 훨씬 중요한 것임을 누차 역설한다. 그런 한편 김삼렬 센터장은 재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국가적인 행사도 참여했고 미래 세대의 재해구호자를 양성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했다. 2018평창 올림픽에서 자원봉사자를 선발하는 임원으로 참가하기도 했고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하는 2010년 희망브리지봉사단을 창설해 지금까지도 전국 전국 8개 대학 동아리 운영 중이다. “이 희망봉사단을 통해 무려 8800여명의 학생들이 재해구조를 배웠고 이들이 해준 집수리 가구 3000가구에 이르렀을 정도로 파급효과가 컸습니다” 이외에도 재해와 재난에 대해 외국의 기술과 사례를 공부하기 위해 행안부와 함께 해외로 연수단을 파견한 것도 김삼렬 센터장이 시행했던 사업이다. 각종 재해 관련 연구단체에서 위촉된 임원 활동이나 각종 재해 관련 세미나. 포럼 등에 참석한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 과정 속에서 구호사업팀장을 거쳐 사업국장에 오르는 등 재난 현장의 주요 지휘자로 승진하기도 했고 재해대책유공 행정자치부 장관상 수상(2011), 대구서문시장 화재 구호 관련 유공 대구시장상(2017), 포항 지진 유공 포항시장상(2018) 등을 받기도 했다. 김삼렬 센터장은 법학을 전공한 법학도답게 재해구호와 관련해 유효한 법을 개정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2005년~2007년 재해구호법 전면 개정을 위해 국회 입법활동을 했고 2009년에는 재해구호협회를 법인으로 등록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그런 김삼렬 센터장에게 우리나라 재해현장의 기술수준을 물었다. 대답이 놀라웠다. “우리나라 재해 관련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일례로 연평참사 현장에 독일 취재진이 우리 기술을 보고 깜짝 놀란 적 있었는데 그 이유가 조립식 임시 주거시설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가 2010년, 독일 같으면 텐트나 겨우 치고 현장구호를 하고 있었을 것인데 우리는 사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난방에 뜨거운 물까지 나오는 집을 지어 대응하는 것을 보고 감탄을 연발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재해 대응 기술은 어떤 선진국에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세부적이고 견고하고 깊은 배려가 수반되어 있다고 단언한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는 이제 재해에 대한 준비가 매우 잘 되어 있는 편이어서 어지간한 제해와 재난에는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을 만큼 안정적이 되었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이전 같으면 조금만 비가 내려도 홍수가 났을 곳들이 이제는 훨씬 많은 비가 와도 문제없이 지나가는 것이나 사스나 메르스, 지금의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안정적으로 대응하는 모습 등이 대표적인 증거라고 주장한다. 사전에 방지하지는 못했지만 대구지하철 참사를 겪으며 ‘소방방재청’이 발족된 것이나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국민안전처’가 신설되어 재난에 대해 보다 발 빠르게 대응하게 된 것도 중요한 변수라고 밝힌다. -서울에서 자원봉사자 가장 많은 강서구, 자원봉사는 자아실현의 가장 훌륭한 방법, 중산층 기준이라야! 이렇듯 재해와 재난을 능동적으로 관리하고 보니 이제는 재해나 재난에 직접 투입되기보다 복지적인 측면에서 활동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2011년부터 재해구호협회가 적극적으로 시작한 ‘집수리 로드사업’은 김삼렬 센터장이 8년이나 참여하고 진두지휘한 것이다. 이렇게 재해와 재난이 안정화 된 것이 최고의 재해재난 전문가인 김삼렬 센터장인 강서구 자워봉사센터에 근무하게 된 작은 배경이기도 하다. 2020년 9월에 강서구 자원봉사센터 센터장으로 공개채용 된 김삼렬 센터장은 자원 봉사에 대해서도 각별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 자원봉사가 이전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의미가 많았다면 이제는 환경을 보존하고 미래세대를 가르치고 나아가 자아실현까지 이르게 하는 훨씬 광범위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특히 김삼렬 센터장은 강서구가 서울시에서 가장 많은 18만70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활동하는데 어려운 이웃들이 많이 있다 보니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많아졌을 것이라며 강서구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소문난 지역들에 비해 훨씬 행복한 곳이라며 흡족해 한다. 김삼렬 센터장은 자원봉사를 자칫 거창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자원봉사는 생활 속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고 설명한다. 일례로 자원봉사자의 수가 60~70대에서 가장 많은데 이것은 이 연령대의 어른들에게 자아실현욕구가 가장 강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심지어 80대 어르신들이 90대 어르신들께 전화해서 건강한지 안부 묻는 일도 자원봉사가 될 수 있다고. 김삼렬 센터장은 그 자신 오랜 기간 자원봉사를 생활화 해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학 다니며 후배들에게 민법을 가르친 경험을 살려 2007년부터 천주교 살레시오회에서 ‘6호 보호관찰 청소년’을 위한 야학활동을 하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검정고시를 볼 수 있도록 지도해 온 것. 뒤늦은 학구열로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경영학, 경제학, 교육학을 연거푸 마치며 방송통신대학교 제1기 홍보단장을 지낸 것도 봉사의 한 예다. 참고로 김삼렬 센터장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과정도 수료했다. 한편 재해기술 수준이 선진국들에 비해 높은 반면 아직 우리나라 자원봉사자 비율은 인구대비 30%로 50%대인 구미선진국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이에 대해 김삼렬 센터장은 경제적인 여유 수준만 가지고 중산층이라 칭하는 우리나라에 비해 프랑스 중산층은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을 주요 덕목으로 두고 있다며 자원봉사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양남면 대현 출신으로 중학교 졸업 후 울산과 대구, 서울로 타향살이를 해온 김삼렬 센터장은 경주지진 당시 고향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마음 쓴 것이 늘 자랑스런 고향을 위해 작게나마 마음을 낸 경험이라며 경주의 자원봉사자들에게 응원을 보냈다.
보험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아직은 편하지 않다.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보험료가 부담되어 망설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대체적으로 지인으로 인해 보험을 가입하고 나서 금방 설계해준 지인이 그만두는 경우가 잦아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지 염려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보험은 다양화되고 있고 어려운 질병이나 위험한 사고들이 항상 존재하는 만큼 보험은 더 다양하고 전문화될 수밖에 없다. ㈜피엔에스보험중개 박재평 대표이사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며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보험의 범주를 일찌감치 뛰어넘어 전문성을 한껏 발휘하는 아주 특별한 보험중개사(Insurance Broker)다. “보험업은 보험회사가 직접 고용하는 직원들과 대리점, 흔히 보험설계사라고 하는 분들, 그리고 제가 하는 보험중개사가 있습니다. 보험 중개사는 국내 보험상품은 물론 해외 보험상품까지 전부 취급하며 고객의 필요나 리스크의 종류에 따라 보험회사들과 직접 연결해 고객에 맞게 컨설팅해 주는 사업자입니다. 보험내용의 설계나 보험료율까지 조정이 가능하지요!” -배상책임보험 전문 - 임원배상, 임상시험배상, 건축설계, 사이버·미디어 전문인 배상 등 차별화된 영역의 전문가 박재평 대표 역시 일반적인 보험업무를 모두 처리하고 있지만 이것은 업무의 일부일 뿐, 실제로는 일반인에게는 매우 낯선 분야에서 입지를 굳힌 전문중개사다. “저의 전문분야는 배상책임보험입니다.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한 임원배상책임보험, 의료·제약·헬스케어·바이오 등 생명공학기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배상책임보험, 건축설계회사를 대상으로 한 건축설계, CM전문인배상책임보험, IT 기업이나 게임회사·미디어 분야에 필요한 사이버보험, 미디어전문인배상책임보험 등입니다” 여러 가지 보험상품에 어리둥절해 하자 박 대표가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한다. “대개 상장기업의 임원들은 책임성 높은 결정에 시달리는데 자신의 결정에 문제가 생겨 피해나 손해가 났을 때 회사에 대해서만 아니고 결정권자인 임원에게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에 대비해 민형사상 책임에서 법률비용까지, 상당수의 임원들이 미리 보험을 들고 있지요” 초기에는 이 보험이 생소했으나 이제 어지간한 상장사 임원들은 대체적으로 이 보험에 가입할 만큼 일반화 되어 있고 일찍 이 분야에 공을 들인 만큼 이 분야 탑 클레스의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고. 건축설계회사를 대상으로 한 ‘건축설계보험’은 박재평 대표의 실력이 십분 발휘된 ‘보석’ 같은 분야다. 이 보험은 이름 그대로 건축설계사들이 주로 드는 보험으로 특히 전세계로 진출한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설계사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국제적인 첨단건축은 사소한 실수 하나라도 큰 리스크를 수반합니다. 설계에 따른 비용도 엄청나게 비싸지만 건축에 문제가 생겼을 때 손해배상의 책임도 크게 따르지요. 그런 점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보험을 설계해 놓으면 보다 안정감 있게 설계를 할 수 있지요” 박 대표가 보험 설계를 해준 대표적인 건물을 나열하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올림픽스타디움, 아제르바이잔 석유공사인 SOCAR TOWER(본사), 우즈베키스탄 아이스링크경기장, 카타르 월드컵경기장, 알투마마 스타디움, 카루사일플라자타워 등 말만 들어도 놀랍다. 국내에 보험 설계한 건축으로는 수도권의 새로운 명소로 부각될 ‘춘천 레고랜드’, 서울외국인학교, 주한 프랑스대사관 등이다. 건축분야 국내1위 회사인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범건축 등 국내 굴지의 건축회사들이 박재평 대표의 고객이다. 질병이 다양해지고 국제적으로 번지는 양상이 심각해지는 만큼 제약사들의 임상시험도 갈수록 다양화되고 첨예해진다. 당연히 리스크도 크다. 박재평 대표는 최근의 코로나19 백신 임상시험, 코로나19 치료제 임상시험과 관련한 보험을 치밀하게 연구·설계해 이 분야에서도 상당한 고객을 유치했다. 뿐만 아니라 루게릭 치료제, 헌터라제, 백혈병, 파킨슨병 치료제, 면역질환 치료제 등에 대한 국내 및 해외 임상시험에도 꾸준히 보험설계를 해왔다. 생명공학분야인 녹십자, 일양약품, 루트로닉, 오스코텍, 티움바이오, 메드팩토, 유바이오로직스 등 20여개 회사가 박재평 대표의 고객이다. “특히 임상실험에 관해서는 정보의 보호가 가장 중요한 만큼 보험 설계 전 반드시 건건마다 비밀유지계약서를 씁니다. 자칫 중대한 정보가 새나갈 경우 해당 제약사에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 대표는 인터넷 게임이 대세를 이루고 엄청난 유저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이 분야 리스크 관리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눈을 떴다. IT 기업이나 게임회사, 미디어 분야에 필요한 사이버보험, 미디어전문인배상책임보험 등에 해박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게임회사, IT, 미디어 분야 기업으로 게임빌, 컴투스, iMBC 등 게이머나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업들이 박재평 대표의 고객이다. 이밖에도 일반 기업들의 다양한 리스크에 맞춘 보험설계를 담당, 코리아나화장품, SFA그룹, 탑엔지니어링, 파워로직스, 텔레칩스 등 중견 상장 기업 15여 곳을 오랜 기간 관리하며 신뢰를 쌓아왔다. 이렇게 다양한 전문분야에서 보험 설계를 하다보니 박재평 대표는 자칫 자신이 업무를 실수할 우려까지 고려, 자신에게 맞은 보험도 따로 들어놓았을 정도라고. “이처럼 다양한 직종에 걸쳐서 전문성을 발휘하게 된 대는 저 나름의 프론티어 정신 같은 것이 컸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가 추구하는 분야가 모두 공부를 깊이 해야 하는 분야라 남들이 따라 하기 힘들다 보니 경쟁률이 낮지요. 이런 이점을 미리 선점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연구해 왔지요” -영남대 법대 출신, 9년 고시공부가 전문 보험중개사 비결로 승화, 지금은 오히려 이 길에 만족 !! 그런 한편, 박 대표가 전문적인 보험중개사로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남대 법대생 출신이라는 장점이 작용했다. “판·검사의 꿈을 안고 무려 9년에 걸쳐 사법시험에 도전했지만 모두 떨어졌어요. 그 꿈을 포기하고 나니 문득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나이는 들대로 들어서 취업하기도 어렵고 개인사업을 하려니 자금도 없었지요” 막막하던 그때 마침 신문에 난 보험중개사시험 광고를 보고 급격히 관심이 생겼다. 마침 시험과목에 법학 관련 시험이 있는 것을 알고 자신감도 생겼다.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보험관련 교육을 받으면서 처음부터 자신의 목표를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으로 잡았다. 그런 목표를 세웠던 가장 큰 이유는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전분야에서 ‘법’에 익숙해야 하는데 법대를 포함 13년이나 법 공부를 해온 자신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분야였기 때문. “처음 보험회사에 입사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지인영업을 위해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때 저는 망설임 없이 컴퓨터 켜놓고 배상책임보험에 관련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초기에 남들은 천편일률적인 상품으로 지인영업을 시작해 수입이 부쩍부쩍 올랐지만 저는 못 본 체 했습니다. 처음부터 지인영업을 해서는 오래가기 힘들다고 생각해 심지어 저희 가족들에게도 보험 들라고 해본 적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더군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던 박재평 대표는 결국 자신의 아성을 구축하게 된다. 박 대표는 자신이 올린 첫 번째 계약의 순간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SK와이번스가 쌍방울로부터 야구단을 인수한다고 했을 때, 야구단 운영에 따른 리스크를 분석해 무작정 구단 인수 TF 관계자들을 찾아 갔고 치밀한 설득 끝에 마침내 SK계열 보험회사를 제치고 보험계약을 체결했던 것. 당시 이 일이 애초에 SK계열사에서 취급할 수 없는 전문영역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꼼꼼하게 리스크를 제시하면서도 훨씬 저렴한 보험료로 대응했던 것이 계약의 관건이었다. 그후 SK와이번스는 아직도 박재평 대표와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주고객이 되었다. “제 일의 가장 큰 장점은 저에게 부담을 가지지 않는 고객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필요에 의해 저를 찾는 분들이고 그분들을 통해 또 다른 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요. 이게 제가 추구하는 보험업의 가장 다른 점이지요!” 이렇게 전문분야를 아우르는 박재평 대표는 매년 12월이 되면 보험사업을 통해 자신이 얼마만큼 기업과 국가에 기여했는지를 평가해보곤 한다. 그 결과 놀랍게도 2020년은 무려 9500억원의 리스크를 관리했고 올해 역시 이미 9600억원의 리스크를 관리했다. “제가 법조인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한 것으로 인해 뜻밖에 다른 꿈을 이루었지요. 지금은 오히려 훨씬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 박 대표는 고향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봉사에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이다. 영남대법대·로스쿨재경동창회 부회장 겸 총무, 영남대재경총동창회 이사, 서울천마합창단 사무국장을 오랜 기간 맡고 있으며 집안 모임인 월명회(명계출신월성박씨서울종친회)에서 총무를 맡은 지도 10년 훨씬 넘었다. 사전에 알지는 못했어도 일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주 사람들을 만나 뜻밖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는 박재평 대표는 고향사람 만나는 즐거움이 봉사의 노고를 말끔히 씻어준단다.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이제는 어머니마저 계시지 않아 경주를 떠올릴 때마다 애틋함이 크다는 박재평 대표는 은퇴하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집안가계도를 정리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며 말을 맺었다. 글로벌 시장의 전문 보험중개사의 꿈치고는 전혀 엉뚱한 전통에로의 복귀인 셈이다. 원래 그가 보험업을 시작했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그 꿈 역시 멋지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경주 시내에서 북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만나는 황룡동 어느 폐교에는 바다에 띄우는 부표와 낡은 그물, 바다에서 건져 올린 버려진 어로장비들과 나무둥치, 각종 스티로폼들과 기타 해양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폐교에는 목공기계들과 철공기계들이 갖추어진 작업장이 있고 주변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해양쓰레기들이 변신한 미술작품들이 곳곳에 서있다. 이곳에서 ‘뜻밖에도’ 보문호반에서 가장 핫한 관광지로 알려진 키덜트 뮤지엄의 김동일 관장을 만났다. 김동일 관장은 작업복 차림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키덜트 뮤지엄 입구에 서있는 해양쓰레기로 만든 미술품들과 역시 김동일 관장이 운영하고 있는 황성동의 네트로 자게 갤러리 카페 입구에 서 있는 해양쓰레기로 만든 미술작품들은 바로 김동일 관장이 이곳에서 손수 만든 작업물들이다. -코로나19로 개점 휴업, 바다에 밀려드는 해양쓰레기 수거하다 심각한 문제 깨달아.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걸 왜 만드느냐고요? 이렇게 해서라도 경주 바다를 좀 살려 보려고요!!” 김동일 관장이 해양쓰레기 수거와 미술품 작업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해 초, 코로나19로 인해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부터였다. 네이버에서 ‘경주 핫 플레이스’ 검색하면 황리단길 다음으로 인기순위 2위까지 오르던 키덜트 뮤지엄이 코로나19 방역대책으로 인해 개점휴업 상태였기에 무료하고 불안하던 김동일 관장은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양남이나 양북, 감포 등 경주 인근 해변을 자주 거닐었다. “그때 보니까 해양 쓰레기들이 지나치게 많은 겁니다. 관광객들은 중요한 일부 해변만 다니거나 해변 중에서도 백사장이나 먼 바다. 등대처럼 눈에 띄는 곳만 보니까 해양쓰레기가 눈에 잘 안 띌지 모르겠지만 제 눈에는 보통 심각한 모습이 아니었어요!” 이때부터 ‘가만히 놀 바에야 환경정비사업이라도 하자’며 키덜트 뮤지엄 김광석 대표와 함께 닥치는 대로 쓰레기를 수거하기 시작한 김동일 관장은 쓰레기를 수거하면 할수록 심각한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바다에서 밀려들어오는 쓰레기들을 아무리 주워 올려도 2~3주 지나서 가면 또 다시 온갖 쓰레기들이 밀려와 있어서 애써 치워놓은 해변들이 도로 엉망으로 더럽혀져 있었던 것. 특히 김동일 관장은 이런 해양 쓰레기들이 주로 어민들과 해안 근처에 사는 주민들에 의해 버려진다는 것에서 심각성을 느꼈다고. “이건 마치 습관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특히 비가 많이 오거나 태풍이 부는 날에 맞추어 일부러 쓰레기를 버리는 주민들을 보기도 했어요” 그나마 경주는 관광 해변이 많아 주민들이 관광객들에게 보여질 바다를 의식해 무턱대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다른 지역보다는 덜 한 편인데도 그런 쓰레기들이 바다를 돌고 돌아 결국 안착하는 곳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 해안이라는 것이다. 심각성을 느낀 김동일 관장은 지난 9월 기자에게 직접 현장을 안내하며 경주시권역에 해당하는 양남, 양북, 감포 등지의 해변 7곳을 보여주었다. 본지 9월 30일자 ‘경주해변. 해양생활쓰레기로 몸살, 심각한 오염’ 제목의 기사는 실상 김동일 관장과 동행 취재한 현장답사 기사였다. 함께 동행한 김광석 대표와 변성희 한국관광정보정책연구원 원장은 해안을 답사하며 해양쓰레기들이 주민들이 버린 생활형 쓰레기들이 절대다수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었다. 해당기사에서 다양한 방향의 문제점을 제기한 장본인이 김동일 관장이었기에 현장에 대한 상세한 안내도 빠르고 쉬웠다. 기사가 나간 후 경주시청 담당공무원과 이 문제에 대해 통화했으나 당시로는 시에서 별다른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각성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 채 다만 태풍이 지나간 후 환경단체들과 지역민들이 힘을 합쳐 해양쓰레기를 수거하는 캠페인을 벌인 정도로 해양쓰레기를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담당 주무관은 오히려 기사를 보면서 문제점을 알았다며 상위자에 보고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해양쓰레기 문제에 대처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시청에 소속된 해양 감시원이 15명 활동하고 있지만 해양쓰레기들이 심각하게 널려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정기적으로 현장을 감시하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미흡한 실정임에 분명하다. 당시 답사에 동행한 일행들은 해양쓰레기 문제는 교육과 계몽이 함께 진행돼야 할 문제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며 해결을 위해서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해양쓰레기를 버리는 주민들을 쉽게 제지하지 못하는 데는 부표나 그물 같은 어구들은 부피가 크고 처리비용이 많아서인 만큼 이를 국가나 지자체에서 정기적으로 무료로 수거하거나 주민들이 안심하고 버릴 수 있는 폐기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중요하게 제기되었다. 해안 주민들에게 ‘해양쓰레기를 버릴 경우 결국 쓰레기에 의해 수자원의 질이 떨어지고 해변으로 도로 돌아와 결국 쓰레기를 버리는 주민 자신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꾸준히 홍보할 필요가 있다는 데도 입을 모았다. 특히 김동일 관장은 그동안 해양쓰레기를 수거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자주 만나본 결과 주민들이 환경의 중요성에 우선 공감할 수 있어야 해양쓰레기 문제가 장기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너무나 오랜 기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레기를 바다에 버려도 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분들이라 해양 쓰레기의 문제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심각하게 꾸준히 홍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끗한 바다가 어족을 불러오고 사람도 불러온다는 것을 알고 나면 버리라고 해도 안 버릴 겁니다” -해양쓰레기들로 깜짝 놀랄 작품제작! 해안길 혹은 해변에 해양쓰레기 이용한 테마파크 만들면 일석삼조!! 김동일 관장은 그런 한편 기존의 해양쓰레기들은 키덜트 뮤지엄에 전시된 작품들처럼 미술품화 시키는 작업을 통해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경주의 경우 특정한 해안이나 해변의 빈 땅을 이용해 해양쓰레기를 이용한 전용 설치미술 테마파크 같은 것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운영하면 해양 쓰레기를 무리 없이 재활용할 수도 있고 그 자체로 새로운 관광지를 만들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김동일 관장은 이 방면으로 그간 실현가능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놓았다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변성희 원장 역시 해양쓰레기를 이용한 테마파크나 해안길 조성 등의 작업은 해양쓰레기를 줄이는 것은 물론 가치 있게 재활용하고 관광상품화 시킬 수 있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이런 아이디어는 비단 경주뿐만 아니라 해양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전국 해양 지자체들이 공감할 만한 아이디어지요. 해양쓰레기 처리는 궁극적으로 국토를 깨끗하게 보전하는 일이고 장기적으로 꾸준히 진행해야 할 환경사업인 만큼 국가나 지자체는 물론 지역의 주요 공기업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지원해야 합니다” 마침 지난 해 2020년 12월에는 해양환경공단이 주최한 ‘해양쓰레기 업사이클링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김동일 관장과 키덜트 뮤지엄 관계자들이 함께 제작한 작품이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키덜트 뮤지엄 앞에 전시된 당시의 작품은 지금도 키덜트 뮤지엄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차지하며 해양쓰레기의 심각성을 홍보하는 매개체로 사용되는 중이다. 인테리어 전문가 출신인 김동일 관장은 해양쓰레기들을 가지고 재미있는 미술품들을 꾸준히 만들어 왔는데 이 중 한 작품을 재미삼아 출품한 것이 당선된 것이라고. “이렇게 만들어 놓으니까 해양쓰레기가 그냥 쓰레기가 아니고 아주 괜찮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바다에 버려져 있을 때는 눈살 찌푸리는 쓰레기지만 이렇게 잘 다듬어 놓으니 어떤 재료보다 유용한 미술품 재료가 되었잖습니까? 해양쓰레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이런 데서 생기는 겁니다” 김동일 관장은 요즘도 틈나는 대로 바다로 나가 해양쓰레기를 수거하고 있으며 이를 활용해 여러 가지 작품들을 만드는 작업도 계속하고 있다. 김동일 관장은 추후 여건이 허락되면 이런 해양쓰레기들을 가지고 해안 인근 주민들이나 환경에 관심 있는 학생들, 해변을 찾는 관광객들이 손수 작품을 만들어 설치할 수 있는 방법도 구상 중이다. “해양 쓰레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쓰레기의 양은 줄어 들겠지요. 적어도 경주에서 만큼은 쓰레기 줄이는 일에 꾸준히 매진할 각오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 문제에 기꺼이 참여하시는 분들도 늘어나겠지요. 우선 제가 먼저 해 보는 겁니다!” 한편 김동일 관장은 최근 키덜트 뮤지엄이 변화를 시도했다고 소개한다. 그간 다소 복잡한 전시들에 공간상의 여유를 주었고 최근 오징어게임의 인기를 반영해 관람객들이 잠시나마 오징어게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했다. 키덜트 뮤지엄 입구에는 당연히 해양쓰레기로 만든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다고. 경주 보문 호반에 근현대를 관통하는 다양한 추억물을 전시해 인기 높은 관광지를 만들어준 것도 모자라 직접 해안을 돌며 해양쓰레기를 수거하고 심지어는 그 수거물로 또 다른 경주의 미래를 만들어갈 원대한 포부를 지닌 김동일 관장. 그의 뜨거운 경주사랑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바다에 가서 딱 하나씩이라도 쓰레기를 주워오자.
신라의 토우(土偶)를 자세히 보면 표정들이 매우 밝다. 모습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원초적이고 자유롭다. 부장품인데도 이렇게 밝고 활기찬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신라 사람들이 얼마나 삶을 사랑하고 죽음조차 밝게 보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배리의 석조삼존불이나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나 인면와당으로 유명한 ‘신라인의 미소’ 수막새 역시 신라인들의 밝은 심성을 보여주는 즐거운 예다. 작가를 소개하는 글에서 토우의 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할 듯하다. 이번에 소개할 박수미 작가가 토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박수미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흥겨움’이었다. 심지어 작품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한지를 꼬아 만든 10호도 안 되는 작은 작품을 카카오톡 사진으로 받아본 것인데도 한 동안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품이 즐겁게 느껴져 한참이나 작품 사진 보낸 변성희 한국관광정책정보연구원 원장과 작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작품은 박수미 작가가 지난 4월 (사)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회장 최영조)가 기획한 제1회 ‘그림사기 좋은 날’에 출품한 것이었다. 한지를 한 가닥씩 꼬아 화면 가득 굴곡지게 배치한 작품에 농도가 다른 푸른 색 물감으로 염색한 한지로 춤추는 듯한 실루엣 하나를 새겨 넣은 작품이었다. 얼핏 보면 색칠 된 부분만 춤사위 같지만 화면 전체가 역동성을 가지지 않고서는 표현될 수 없는 즐거움이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화상에서 꽃과 풍경 이어 ‘말’을 잡은 후 만난 토우, 그리고 즐거움 가득한 한지 작품 지난달 29일 오후, 변성희 원장과 함께 박수미 작가의 솟티길 작업실을 찾았다. 전시회를 통해 작품을 보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그럴 기회가 없어 작업실에서라도 박수미 작가의 작품을 더 접해보고 싶었고 작품을 보면서 처음 느꼈던 즐거움의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박수미 작가의 작업실은 생활공간 자체가 자신의 작품들로 차분하게 둘러져 있었고 지금도 예의 한지 작품도 몇 점이나 걸려 있었다. “한지로 작업한 것은 여러 과정을 거친 후의 결과이지만 어느덧 20년 정도 지난 것 같아요” 박 작가는 대구대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할 때의 기억부터 자신의 미술세상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대학시절 대상을 그리기 위해 사진 작업을 열심히 했는데 어느 순간 사진 없이는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이 주는 소재에서 벗어나 선택한 것이 자화상. “제 내면에 뭐가 있는 작업을 20대까지 했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뭐 이렇다 할 게 없더라고요 사실 제 속에 대단한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요” 실상을 따지면 20대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치열하게 자신의 미술세계를 고민했다는 증거일 것이라고 동석한 두 사람이 입을 모았다. 60이 되고도 자신이 별 개 아니란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고 결국 자기의 틀 속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자화상에서 벗어나면서 박수미 작가는 꽃과 풍경 등 자연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꽃과 풍경을 그리려니 이 분야의 그림이 뜻대로 그려지지 않아 대학시절 이에 대해 제대로 배워두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고 그런 만큼 꽃을 확대하거나 구조를 파악하는데 열중하면서 그리기에 몰두했고 한지에 흙을 붙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재료를 다양화 시키며 나름의 꽃을 그려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제가 ‘꽃 작가’로 불린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시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꽃을 일체 그리지 않게 되었지요” 그렇게 갈등을 겪을 무렵 마침 경주창작미술협회에서 1년에 한 번씩 하는 테마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해 테마가 ‘물’이었는데 물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심하다가 자신의 속에서 폭포가 넘쳐흐르는 듯한 표현을 해보자는 의도로 작업을 했는데 의도한 대로 분명한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때 마침 학생들 모집하기 위해 뿌리고 남은 전단지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걸 꼬아서 꿈틀이 지렁이 젤리처럼 입에서 늘어뜨리듯 작업하고 나니 비로소 의도하는 대로 작품이 완성되었어요” 그게 종이와의 첫 인연이었고 이후로 마트전단지 신문전단지 등을 활용하며 작업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이런 전단지들이 지나치게 어지럽다는 판단을 하며 조금 더 좋은 소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자연스럽게 한지가 떠올랐다. 한국화를 전공하면서 이미 익숙했던 소재와 비로서 다시 만난 것. “이때부터 한지를 염색하고 꼬아서 일일이 잘라 그림에 맞추어 붙이는 작업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이게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어요” 한 번 작업하기 시작하면 일일이 그림에 맞추어 꼬아놓은 한지를 배치하기 위해 10호 내외의 작품에도 하루에 열서너 시간, 며칠씩 사투를 벌이느라 허리와 어깨가 욱씬거리기 일쑤였다고. “이 작업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제가 머릿속에 계획은 하지만 재료를 꼬아서 배치하는 과정에서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종의 특별한 흐름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저의 계획과 재료의 물성이 함께 어울려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새로운 결과가 나오는 것이 여간 흥미롭지 않은 겁니다” 박 작가의 한지 작품이 유난히 흥겹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가 비로소 객관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특히 한지 작품을 하면서 형태나 색감보다는 선에 대해 생각이 더 많아졌다고 고백하는 부분에서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곡선을 주로 사용하는 박수미 작가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파도나 바람이 조화롭게 휘둘리듯 어느 접선에서도 머뭇거리거나 걸리는 데가 없다. ‘재료를 믿고 작업했다’는 박 작가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서 보듯 작품에 사용된 한지들이 스스로 어울려 접선 자체를 잊어버리고 유유히 흐른다는 표현이 맞을 법하다. -제1회 경주미술인상에 선정, 2020년 중소기업벤쳐부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사업에 선정, 토우 캐릭터 ‘경주다운 기념품’ 제작도 지금의 작품과 달리 한 때 박수미 작가의 작품 속에는 우리의 말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그 시절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10여년 전 ‘말을 잡다’는 주제로 역시 한지를 꼬고 염색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말이란 것이 실체가 없으니 결국 한글을 형상화 시켰는데 말마다 그 말의 쓰임과 사용하는 사람, 분위기, 기분에 따라 다르다 보니 결국 이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면서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진 것. 박 작가의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10여 년 전 인사동에서 남리 최영조 화백의 인솔로 진행되었던 ‘경주의 유망작가 7인전’ 전시회가 떠올랐다. 그 당시 박 작가가 잡았던 ‘말’은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생기와 열정을 더해 어느 새 흥겨운 춤사위가 되어 ‘삶을 추는’ 경지로 다다르게 된 것이다. 박수작가의 작업실 벽에 걸린 작품 2018년 ‘삶을 추다’ 전에 출품했던 작품과 박수미 작가가 기자를 위해 일부러 꺼내 보여준 굴곡진 작품 한 점은 박수미 작가의 한지 작업이 물이나 바람처럼 자유롭게 흘러 그 자체 느긋하고 즐거운 춤사위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 작품들 속에서 바로 그 밝은 표정의 신라 토우들이 유유히 노닐고 있고 어느 시점에서는 20대 때 극렬히 추구했던 박 작가 자신이 그 속에 녹이 있음이 느껴졌다. 천 년 전 신라의 장인들이 표현했던 토우들의 웃음과 율동이 박 작가의 작품 속에서 온전히 살아난 느낌은 그 자체로 기막히게 특별한 발견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 작가의 흥과 즐거움 가득한 승승장구가 누구보다 기대된다. 마침 박 작가는 지난 6월에 (사)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에서 기획한 경주미술인상에서 첫 번째 추천작가로 경주예술의 전당 알천미술관에서 개인저 ‘때창’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는 보지 못했지만 작업실에 걸려 있는 때수건-이태리 타월로 제작된 작품을 일부나마 감상하면서 박 작가가 한지가 아닌 때수건이라는 소재를 쓰면서 선에 못지않게 색을 자유자재로 쓰는 놀라울 만큼 대담한 감각을 보여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박수미 작가를 취재하는 와중에 접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은 미술의 생활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토우들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들로 2020년 중소기업벤쳐부에서 주최한 ‘지역기반 로컬크리에이터 활성화 지원사업’에 지원, 무려 22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정되어 경주를 알릴 기념품들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 결과 아트토이, 마스킹 테이프, 그림엽서, 파우치, 필통, 키링, 손수건, 간이 다이어리 등 10여점의 상품이 만들어져 있지만 코로나19의 여파와 지속적인 마케팅의 부재로 활성화 되고 있지 못한 것이 아쉽다. 경주의 관공서나 기업, 학교와 출향 단체들이 단체로 ‘경주다운 기념품’을 만들 때 적극적으로 고려해봄직한 핫한 아이템들이다.
지난 2019년 11월 19일, 본지 창간 3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리는 날 점심시간, 뉴코리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 송재용 단장이 이끄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가평군 어린이 합창단, CTS 어린이 합창단 단원들 80여명이 분황사 옆 소문난 맛집 ‘쭈사랑불쭈꾸미’에 대거 자리잡았었다. 마침 이날은 문화고에서 매년 기획해온 뉴코리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 초청공연이 1차 열렸다. 빠듯한 예산으로 두 차례 공연을 치러야 하는 송재용 단장은 문화고등학교 박홍근 교장에게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때 단원들 식사라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한 박홍근 교장이 문화고 졸업생이자 평소 자선과 나눔을 실천해 온 오경철 사장을 주선했다. 오경철 사장은 흔쾌히 이를 수락, 자신의 식당에 단원들을 초대해 경주의 명물 ‘쭈사랑불쭈꾸미’를 대접했다. 불쭈꾸미를 먹은 단원들이 이구동성 이렇게 맛있는 쭈꾸미를 먹게 될 줄 몰랐다며 환호했다. 당시 이 일을 직접 목격한 기자는 오경철 사장의 넉넉한 마음에 감사하는 한편 이 맛있는 불쭈미 식당을 본지에 제대로 소개하고 싶다는 의견을 오경철 사장에게 전하고 허락 받았다. 오 사장의 따뜻한 마음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불쭈꾸미 자체의 특별한 맛이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9년 말부터 불어 닥친 코로나19의 파동은 세계적인 불황을 초래했고 특히 요식업소들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취재하고 기사화 하겠다는 약속을 해놓고도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취재를 미루다 보니 2년이 훌쩍 지났다. -변함없는 시스템 통한 꾸준한 맛이 비결, 처음 시작할 때 직원들이 그대로 근무하고 있어! 다행히 백신 접종률이 70%를 넘겼고 위드코로나 국면으로 접어 들었기에 경주와 서울 출향인의 여러 맛집 중 가장 먼저 ‘쭈사랑불쭈꾸미’를 떠올렸다. 송재용 단장을 통해 인터뷰 요청을 확인한 바, 오경철 사장은 흔쾌히 탐방을 허락했다. 인터뷰에 앞서 오 사장 몰래 미식가로 알려진 변성희 교수(한국관광정보정책연구원 원장)와 미리 가서 불쭈꾸미를 먹으며 다시 한 번 맛을 음미했다. 2년 전에 먹던 맛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식당을 나와 근처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거닐다 약속시간이 되어 다시 ‘쭈사랑불쭈꾸미’를 방문, 오경철 사장을 찾았다. 오사장은 잠시 기다리라며 부인 황연신 사장을 홀로 불렀다. “사실은 저는 쭈사랑불쭈꾸미의 총괄본부장쯤 되고 아내가 우리 식당의 정식 사장님입니다” 첫 대면부터 유쾌한 모습이었다. 아내의 전문성과 대표성을 기꺼이 인정하며 인터뷰를 시작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까 보니까 매장에 두 분 중 아무도 안 계시던데 그래도 됩니까?” 그러자 부부가 의미 깊은 웃음을 띤다. “사실은 저희 부부가 꼭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직원들 대부분 처음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해온 분들이라서 주방은 주방대로 홀은 홀 대로 체계적으로 잘 돌아가거든요” 코로나19로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다음으로 나갔다. “당연히 힘들었지요. 매출이 이전에 비해 반 이상 줄었는데요. 다행히 포장해 가시는 고객들과 배달 고객들이 늘어나 그나마 이렇게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고객분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지요!!” 특히나 쭈사랑불쭈미는 매장 규모와 매출액 기준으로 인해 정부가 지급하는 코로나지원금 혜택도 받지 못했지만 그 와중에도 각종 SNS 정보를 접한 관광객들의 방문과 오랜 경주의 단골 고객들의 방문 또는 포장 주문으로 인해 직원들의 축소조차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쭈사랑불쭈꾸미는 2015년 7월 4일 문을 열어 이제 만 6년 반을 넘긴 맛집이다. 이전에는 감포에서 무려 20년간 정식으로 횟집을 경영했다는 오경철·황연신 부부사장은 횟집들이 급격히 일식집으로 바뀌던 시기, 수산 쪽에서 오래 일해 온 강점과 ‘건강을 추구하는 맛’의 변화를 간파해 쭈꾸미집으로 승부를 걸었다고. 이게 코로나 사태 전 연간 10만 명 방문을 자랑하는 쭈사랑불쭈꾸미 신화의 시작이었다. 쭈사랑불쭈꾸미의 메뉴는 당연히 불쭈꾸미가 중심이고 사이드 메뉴들이 바뀌며 구성된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불쭈꾸미가 메인인 쭈사랑 A, B, C 세 세트!! 여기에는 불쭈꾸미 볶음에 샐러드와 묵사발이 나오고 세트 별로 A-피자, B-고기만두, C-새우튀김이 따로 나온다. 여기에 쭈꾸미와 제육볶음이 함께 나오는 서브 메뉴가 있어 돼지 고기 좋아하는 고객의 입맛을 고려했다. “사실은 저희 가족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이런 메뉴를 고심 끝에 만들었습니다. 매콤한 불쭈꾸미가 어린이들이나 매운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께는 부담이 될 수 있는데 피자와 만두 등이 그것을 완화시켜주지요. 술 한 잔 드실 분들에게는 새우튀김이 좋고요” 이를테면 세대별 기호별 요구를 모두 충족한 셈. 그 외 오랜 횟집의 오징어, 도다리, 우럭 등 각종 회를 준비하고 있고 물회와 횟밥, 오징어 통찜 등을 따로 마련하고 있지만 메인 메뉴는 역시 불쭈꾸미다!! 쭈사랑불쭈미가 빠른 시간 맛집으로 소문 난 바탕에는 무엇보다 부부사장이 없어도 시스템화 된 엄격한 레시피가 있다. 여기에 쭈사랑불쭈꾸미의 공공연한 강점들이 포진하고 있다. -네이버 맛집 리뷰 363개, 하나도 돈 들인 곳 없어!! 코로나19 이후 프랜차이즈 본격화 계획. 네이버에는 쭈사랑불쭈꾸미에 대해 무려 363개의 맛집 리뷰가 올라와 있는데 가장 높은 ‘점수가 음식이 맛있어요(36%)’고 다음으로 ‘주차하기 쉽다(21.4%)’는 리뷰가 있다. 가성비가 좋다는 리뷰(17%)와 매장이 넓어서 좋다는 리뷰(14.2%)가 다음을 잇고 양이 많다는 리뷰(11.4%)도 올라와 있다. 음식에 대한 추천이 65%에 육박하는 것은 쭈사랑불쭈꾸미에 대한 근본적 만족감을 잘 나타내주는 지표다. 여기에 5~60 대는 거뜬히 주차할 수 있는 넓은 주차장은 주차의 걱정을 없애준다. 전체 120석 매장은 10~20석씩 낮은 분리대로 나누어져 있어 개인 고객이건 단체 고객이건 용도에 맞게 이용하기에도 좋다. 고객의 80%가 경주시민들일 만큼 붙박이 고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고 관광지로서 주말이면 전국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에게 맛과 함께 중요한 방문 요건들이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 오경철 사장은 이들 리뷰들이 모두 자발적인 리뷰들로 단 한 곳도 억지로 돈을 들여 올린 것이 없다고 단언한다. 뉴코리아오케스트라 등의 단원들을 맞아 나눔을 실천한 것에서 보듯 두 부부사장은 이웃을 위한 나눔과 봉사를 오랫동안 실천해온 장본인들이다. 이미 경주 로타리와 JC, 자유총연맹 등을 통해 봉사에 익숙했던 부부 사장은 특히 매년 5월에는 이웃의 노인들을 초대해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열어왔고 교회를 통한 자선에 오랜 기간 기여하며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데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네팔과 필리핀의 빈민층을 지원하는 선교사업에 깊이 후원하고 있고 초록어린이 재단의 후원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경주의 많은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자원봉사자 신분증을 지참하는 고객들에게는 무조건 10%의 할인을 해주고 있기도 하다. 이런 부부 사장의 모습을 보면 왜 쭈사랑불쭈미 직원들이 오랜 기간 변함없이 근무해왔는지. 왜 쭈사랑불쭈꾸미의 맛이 변함없이 좋은지, 왜 쭈사랑불쭈꾸미에 고객이 넘쳐났고 코로나19에도 포장이 배달이 줄을 이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쭈사랑불쭈꾸미에 담긴 사랑과 쭈사랑불쭈꾸미가 나누는 사랑이 고객들에게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오경철·황연신 부부사장이 작심한 듯 중요한 선언을 한다. “원래 쭈사람불쭈구미는 프랜차이즈 전문점으로 계획된 것인데 처음 3년은 스스로 맛과 시스템을 검증했고 그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를 실행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코로나19로 인해 계획이 연기되었지요. 맛과 시스템이 안정된 만큼 이제 쭈사랑불쭈꾸미를 본격적으로 넓혀나갈 계획입니다” 앞으로 분황사 앞에서 뿐만 아니라 경주의 다른 지역, 전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쭈사랑불쭈꾸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 당찬 부부사장의 결기가 한층 단단해 보인다. 경주의 새로운 맛을 전하는 쭈사랑불쭈꾸미가 활짝 웃는 부부사장의 표정처럼 주변을 밝히는 최고의 맛집이 되기를 기원한다.
2017년, 우리나라 법조인의 등용문이었던 사법시험이 전격 폐지되면서 로스쿨(Low School)로 지칭되는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유일한 법조인 양성의 창구가 되었다. 로스쿨은 2009년 3월 첫 학기를 시작한 제도로 현재 25개 대학에서 총 2000명 규모로 운영되고 있다. 로스쿨은 기존 사법시험이 법학과 관련 깊은 학과 학생들에게 유리했던 기존의 일방적이고 단순한 체제에서 벗어나 기존의 사회·인문계열을 비롯 이공계열, 의학 등 각계의 다양한 전공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전공을 마친 후 3년의 법학전문대학과정을 수료하고 전문 변호사로 출신할 수 있도록 개혁되었다. 이에 따라 로스쿨을 채택한 대학들은 이후 대학과정에서 법대를 모두 없애는 등 사법시험이 폐지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고 법대로 진학한 학생들은 다소의 혼란을 겪으며 점이지대의 진통을 겪기도 했다. -법대 전공한 로스쿨 출신 ‘낀 세대 변호사’, 다양한 경험 통해 융통성, 추진력, 포용력 등 겸비 박명상 변호사는 바로 이런 점이지대, ‘낀 세대’로 법학을 전공하고 사법시험과 로스쿨 사이에서 갈등하며 변호사가 된 출향인이다. 그 과정이 이전의 사법시험으로 법조인이 된 사람들과 사뭇 다르다. “제가 군대 가기 전에 로스쿨 제도가 신설된다는 안이 확정됐고 전역했을 때는 제1기 로스쿨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법대 3학년에 복학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진로를 잡을지 고심이 많았습니다” 박 변호사가 복학했을 때는 사법시험도 존재했을 때고 로스쿨도 운행되던 시기. 긍정적으로 보면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각오를 다지고 승부를 거는 면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이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외국어대학 법학과에 다니면서 2학년 때 사법시험이 어떤 것인지 경험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응시했다가 당연히 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했는데 제대하고 나니까 로스쿨이 이미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를 회고해 보면 로스쿨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는 것이 박 변호사의 때늦은 결론이다. 로스쿨이 아직 제 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기였던 만큼 변호사 시험의 난이도가 다소 낮았고 법학전공자들이 아직도 유리하던 시기였다는 것. 그러나 로스쿨 제도가 살아남을지도 의문이었고 당시에는 사법시험이 엄연히 존재하며 그 권위를 더 인정하는 듯한 사회분위기였던 만큼 갈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신껏 당초 계획대로 사법시험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에서 몇 차례 혼신을 다해 사법시험에 도전했지만 아쉽게도 번번이 떨어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세 번 떨어지고 나니까 그 뒤에는 집중이 잘 안 되더라고요. 이러다 자칫 고시폐인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그런 불안감이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으로 작용했습니다” 외동아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는 부모님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일지 모르겠다면서도 박 변호사는 한동안 공부는 뒷전인 채 신림동 고시원과 학교를 전전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털어놓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불안과 낙담의 시기를 거치면서 냉담한 사회를 경험한 것이 자신에게 보약이 되었다는 진단이다. 자신을 분명히 내세울 수 있는 무기가 없다면 세상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결국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 이를 즈음 자신이 왜 법조인이 되고자 했는지에 대한 원론적인 인식이 새롭게 각성됐다고. “어렸을 때부터 법조인, 정확하게는 검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마침 삼촌 한 분이 오랜 기간 고시공부를 하셨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셨는데 제가 대신 꿈을 이루어 드리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중학교 때 어머니께서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집안에 경찰 삼촌이 계셨는데도 이 사건이 끝내 미제로 끝나버렸어요. 그 일을 계기로 검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이 좀 더 구체화됐습니다. 적어도 나쁜 사람을 혼내주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30대로 접어드는 순간, 화들짝 놀란 마음으로 다시 선택한 것이 로스쿨이었다. 시기적으로 곧 사라질 사법시험에 매달리기보다는 자신을 추스르며 찬찬히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한 것. 이렇게 결정한 박 변호사는 2015년 모교인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했고 법학대학원 졸업 후 2019년 치른 제8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서 법조인 인생을 시작했다. 마침 같은 시기 국정원 시험 최종심에도 오르는 등 자신의 실력을 검증한 바도 있다. 현재 ‘법무법인 해온(解溫)’에서 활동 중인 박명상 변호사는 그간 다양한 변론 경험을 통해 기초를 다지는데 충실했다고 자평하며 2022년부터는 자신의 역량을 대폭 실현하는 해로 만들어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간 민·형사 사건을 비롯, 해온의 강점인 부동산과 조세, 보험 관련 변호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특화된 무기를 장착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앞으로는 대학에서 각종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한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본격적으로 대세를 이룰 만큼 자신만의 ‘전문분야’를 개척하는 것은 역시 ‘낀 세대 변호사’로서 매우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1, 2, 3학년대표, 총학생회장 후보로도 추천, 공부만 한 엘리트 변호사들과 차별점 강조 가장 기억에 남는 변호로 ‘하수도 음식물 처리 기계’ 관련 사건을 무죄로 이끈 것을 꼽는다. 이 사건으로 패소했을 경우 자칫 문 닫을 뻔한 좋은 기업을 기사회생시켰다는 만족감도 생겼고 환경을 지키는 데도 한 몫 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몇 차례 형사사건에 승소한 것도 기억나지만 변호사란 직업이 당초에 꿈꾼 정의실현과 반대로 직업상 죄 지은 사람을 변호한다는 것에서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죄 지은 사람도 변호 받을 인권이 있다는 논리를 딱히 신봉해서라기보다는 법이 정한 만큼 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역량을 발휘해 형량을 낮추었다면 그것은 제가 낮춘 것이 아니라 원래 법대로 적용한 결과였겠지요. 저는 그 법을 제대로 찾은 것이고요” 박 변호사는 어떤 사건을 맡건 사건을 입체적으로 뜯어보고 요점을 파악하는데 주력한다고 자신만의 변론방법을 소개한다. 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하면 ‘좀 놀았을 때’의 여유와 태평을 소환해 한 발 물러서서 사건을 보는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여기에다 대학시절 학생회에서 1,2,3학년 연속 학년대표를 맡아 활동했고 총학생회장으로 추천 받았을 만큼 적극적이고 추진력 강했던 자신의 면모는 어떤 사건이건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는 열정의 밑바탕이기도 하다. 흔히 ‘법조인’하면 공부만 한 엘리트나 ‘센님’이란 이미지가 강한데 박명상 변호사는 이런 부분에서 분명히 차별점이 있다. 비록 ‘방황의 기간’이 있었지만 이 시기를 통해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할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이 세상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도 강점이다. 다소 어려운 과정을 거친 만큼 박명상 변호사는 자신의 어려웠던 시간 속에서 배운 경험을 후배들에게 돌려주는 일에도 적극적이고 법조인으로서 자신의 범주를 뛰어넘어 법조계에 헌신하고자 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무엇보다 외국어대학교에서 매년 로스쿨 후배들을 위해 노하우를 전해주기 위한 상담을 해주는 ‘글로벌 법률상담소 법률봉사’를 하고 있고 대한변호사협회 비상임이사, 대한변호사협회 청년변호사사 특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주고를 졸업한 박명상 변호사는 고교 1학년 신라문화제 때 화랑선발전에 출전 최종 5인에 드는 경험을 가지고 있어 누구보다 경주에 대한 향수가 짙다. 고교시절까지는 말 한 마디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무서웠던 아버지를 떠올리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사랑과 포용력이 느껴져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세상 누구보다 존경한다며 경주는 아버지·어머니가 살고 계시다는 자체로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정겨운 곳이라 정의한다. 2019년 봄 경주중고서울동창회 동문전체등반대회에 참가해 ‘동떨어진’ 가장 막내 기수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던 박명상 변호사.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동문이건 향우건 모일 기회가 없었다며 코로나 충격이 완화되면 출향인 사회에도 적극 참여하겠다고 약속한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듬직한 체격, 시원시원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박명상 변호사를 보면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법조계 뿐 아니라 출향인 사회에서도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된다.
광고는 공공기관과 기업, 단체와 사람을 알리는 모든 작업을 다 아울러 말하는 용어다. 광고는 매우 다양하게 세분화 되지만 TV와 신문에 나오는 매체광고를 제외하면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광고는 대체적으로 간판, 현수막 같은 옥외설치광고와, 팸플릿, 브로슈어 등 인쇄광고가 대부분이다. 박성범 우리 광고사 대표는 옥외설치광고와 인쇄광고 부분에서 빠르게 시장을 넓혀가고 있는 신예 주자다. 비록 광고업에 뛰어든 것은 2년 정도로 오래 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간판, 현수막, 인쇄물 등, 경험 많은 디자이너가 고객의 요구에 맞춰 조율하면서 만족감 높여, 비타민들에게도 자부심!! “고객의 니즈에 가장 부합할 수 있도록 디자인 하는데 가장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광고는 디자인이 생명인데 저희 회사에서 디자인을 전담하고 있는 실장님이 벚꽃 마라톤, 신라문화제, 화랑대기 축구대회 등 큰 행사들에 익숙한 능력 있는 분이시죠” 박성범 대표는 비록 디자인에 자신이 있어도 고객이 원하는 스타일을 충분히 반영하는 데도 각별한 신경을 써서 수차례 수정을 거치면서 최대한 고객의 바람에 맞도록 일을 진행하는 것이 비결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급하게 일을 맡기고는 부랴부랴 서두르는 고객들이 가끔 있어서 차분히 좋은 디자인을 하지 못해서 아쉬울 때가 있다며 어떤 광고건 서두르면 좋은 작업을 하기 힘 든다며 광고사를 대하는 요령을 알려준다. “작업을 잘 마치고 나면 수익 이외에 또 다른 덤이 있습니다. 종종 작업의 결과에 대해 고객분들이 과할 만큼 만족감을 표시하고 칭찬하실 때가 있는데 이럴 때는 일하는 보람이 훨씬 커집니다” 특히 박성범 대표는 하나 둘 우리 광고사가 만든 작업의 결과물들이 시내에 배치될 때마다 ‘비타민’이라고 칭하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한껏 자랑스럽다며 또 다른 보람을 내세운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제가 한 작업들을 제 친구들에게 자랑했다는 말을 하면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해지더라고요. 고객들께는 물론이지만 늘 저를 지켜보는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라도 더욱 성의 있게 작업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집니다” 이제 한창 지역 광고업계에 이름을 드러내는 입장이고 보니 박성범 대표 입장에서는 다소 어리둥절한 일도 자주 생긴다. “어떤 현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시던 어떤 분이 명함을 하나 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무심코 명함을 드렸는데 다음날 명함 가져간 분이 전화해 ‘가게를 여는 중인데 간판 작업을 맡아 달라’고 했다는 것. 누구에게 소개 받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일을 맡기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이랬다. “일 하는 모습이 너무 열정적이고 일도 꼼꼼히 잘하는 것 같습디다. 무엇보다 일 하는데 흥이 느껴져 좋은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기왕에 일 맡길 거면 즐겁게 일하는 업체가 더 좋지 않겠어요?” 그 고객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박성범 대표의 카카오 스토리나 페이스 북 같은 SNS활동을 보노라면 박성범 대표의 일에 대한 열정은 쉽게 느껴진다. 특히 자신이 작업한 옥외 광고물들은 어김없이 자신의 SNS에 올려 어느 지역 어느 분의 사업장이라고 밝히고 심지어 그 사업장을 홍보하는 데도 열성이다. 경주 SNS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고 친구만 SNS의 한계선인 5천 명이 넘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박성범 대표이다 보니 박대표에게 일을 맡긴 광고주는 간판은 기본으로 달고 동시에 박성범 대표를 통해 홍보효과도 누리는 셈이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고 이런 시기에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무척 어렵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시기에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조금이나마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저를 선택해 주시는 고객들에게 전혀 다른 보답이 될 테고요” 다행히 이렇게 SNS에 올릴 때마다 SNS친구들이 대거 응원하고 호응해 주어 더욱 큰 고마움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이런 활동을 통해 제2 제3의 잠재 고객들이 우리 광고사를 분명히 기억해 주는 또 다른 효과도 있다는 박성범 대표다. -황오동 기반 각종 봉사활동, 함께 해주는 고객들 있어 세상은 살만한 곳, 청년 그런 고객과 지인들, SNS친구들에게 느끼는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갚고자 하는 마음이 지역 사회를 향한 봉사활동으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객지생활 하다가 2005년 경주로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언가 보람된 일을 하고 싶던 중에 어떤 큰 행사에 경주헌병전우회가 교통봉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헌병 출신이라 가입해서 활동하면서 시작한 사회 봉사활동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지금은 자기 자신도 쉽게 설명하기 힘들 만큼 여러 곳으로 늘어났다. 대표적으로 황오동을 기반으로 청년회, 체육회,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등과 법무부고호관찰위원 활동 등이다. 특히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이후로는 코로나 관련된 방역활동과 접종관련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에 식료품 키트 나눔 봉사를 많이 하고 있다. 딱히 시간을 따질 순 없지만 평균으로 봤을 때 일주일에 하루정도는 봉사활동에 전격 투자하는 셈이다. “더 고마운 것은 업무와 봉사가 겹쳐 시간이 맞지 않을 때가 간혹 있는데 다수 고객들이 일보다 봉사활동을 먼저 하라며 흔쾌히 이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박성범 대표는 이럴 때마다 우리 사회가 생각보다 훨씬 살만하고 성숙해졌다는 확신이 생긴다며 미소 짓는다. 여기서 박성범 대표는 조금 더 진지한 얼굴로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소신을 밝힌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내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어려움이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느낄 때가 많습니다. 봉사를 통해 그런 것들을 알아가는 자체가 저에게도 큰 공부입니다” 최근 황오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에서 기초생활 수급 대상에 포함되어 있진 않으시지만 실제로는 그에 못지않은 독거노인분들에게 매달 밑반찬을 나눠드리는 봉사를 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고맙다며 눈물을 보이시는 분들을 보며 자신의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그래서 봉사날이 아니더라도 사업장 근처에 계시기에 한 번씩 인사드리러 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그런 박성범 사장에게 혹시 정치에 관심 있느냐고 물었더니 크게 웃는다. “정치 자체에는 관심도 많고 제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혼자서 가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선은 생업과 봉사활동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러면서 박성범 대표는 정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주변부터 챙기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황오동 사회활동의 중심인 황오동 청년회를 보면 다행히 1992년생부터 1969년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봉사자가 활동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30대가 40대에 비해 훨씬 적다며 젊은 참가자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청년의 나이는 숫자에 있지 않고 스스로 젊다고 믿는 마음에 있다고 믿는 박대표는 올해 47세인 자신의 경우를 보건데 39세를 청년이라고 보는 세간의 잣대 대신 49세를 청년으로 바꾸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진심은 통한다! 처음느낌 그대로...!’는 박성범 사장이 스스로에게 늘 당부하는 좌우명이자 다짐이다. 그런 마음으로 광고회사를 꾸리고 봉사활동에 임하고 SNS를 즐긴다. ‘비타민’을 위시한 가족들에 대한 마음은 더 할 나위 없다. ‘나부터! 작은 것부터! 지금부터!’라는 가훈을 9살 7살 된 아이들까지 똑똑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라며 아버지로서의 즐거움도 마음껏 표현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빠’를 세월이 흐를수록 이해하고 세상 누구보다 더 존경한다며 자신 역시 멋진 아빠가 될 것을 약속하는 박성범 사장은 이미 그 자신 자체로 멋진 아빠가 되어 있는 듯하다. “경주는 제가 났고 자랐고 죽을 곳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굳이 외지에 나가 힘들게 고생하지 않아도 마음껏 제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경주가 되도록 우리 세대 경주 사람들이 혼신을 다해 발전시켜야 하겠지요! 저부터 작은 것부터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봐도 늘 활력에 넘치는 영원한 청년 박성범 대표의 바람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또 다른 ‘나부터 작은 것부터 지금부터’ 실천할 사람들을 기다린다.
글로벌 세상을 열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다. 특히 해외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은 시장성을 파악하는 기본적인 조사부터 기업이 진출하는데 걸림돌은 없는지. 법인을 내는데 장단기적인 문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현지에서 손잡고 일할 만한 기업이 있는지? 해당 정부의 세제상 특혜나 지원은 없는지 등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렇다보니 많은 기업들이 알음알음으로 인맥을 총동원해 현지의 정보를 얻지만 세밀하지 못한 정보의 한계로 숱한 시행착오를 겪는다. 특히 중국이나 개발도상국으로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은 정확한 정보 없이 현지로 들어갔다가 불과 몇 년 만에 투자금을 날리거나 현지 적응을 위해 뼈를 깎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다. -다우존스앤드컴퍼니 거쳐 월스트리트저널 코리아 지사장까지 지낸 미국통, 세계와 중국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 이런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현지의 최고급 인맥을 동원해 가장 정확하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기업 활동을 돕는 또 다른 글로벌 컨설팅 기업들이 각국의 주요 도시에서 활발한 영업활동을 펼치고 있다. ‘BCC.Giobal(이하 BCC)’ 역시 중국과 인도를 비롯 동남아 각국에 막강한 인맥을 구축하고 마켓리서치 및 전문가자문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진 글로벌 컨설팅 대표 기업이다. 특히 BCC는 포춘 500대 기업을 위한 중국 진출 프로젝트를 주로 책임지고 있는 회사로 중국의 대표적 IT/AI통으로 알려져 있다. 이 BCC에서 한국의 기업들을 위해 치밀한 현지 진출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인공이 경주 출신의 김세훈 부사장이다. “BCC는 2008년 중국계 미국인, 대만계 미국인, 중국인 등 뛰어난 세 인물이 의기투합해 만든 회사로 중국의 베이징과 서울 등 세계 9개 도시에 로컬 사무국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중국의 10만 명을 비롯, 전 세계 약 20만 명의 자문위원이 BCC플렛폼을 통해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이 각국 기업들의 시장 진출 관련 컨설팅을 해주고 있습니다” 김세훈 부사장은 경주고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으로 유학 남일리노이 주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세계적인 글로벌 금융정보를 제공하는 다우존스앤드컴퍼니(Dow Jones & Company)를 거쳐 미국 유력 경제일간지인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의 코리아 지사장까지 지낸 미국통이다. 김세훈 부사장은 2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급히 귀국해 상을 치른 후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해 유창한 영어실력에 힘입어 국군정보사령부에서 통역병으로 근무하며 해외정보수집을 맡았고 이게 인연이 되어 외신통번역연구원에 근무하는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갖고 있다. 2014년 서울사무소를 오픈하면서 BCC에 합류한 김세훈 부사장은 기업들이 BCC와 같은 전문 컬설팅 기업을 활용해야 하는 이유를 쉽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상하이의 경우 저희 회사 직원이 250명이 근무하는데 이중 150명이 중국의 고위 관료이거나 언론인, 기업고위 간부 출신, 법과 세무에 능통한 각계 전문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문가 그룹들이 국내 기업들의 진출을 도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일인들 처리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들 자체가 이미 든든하고 쟁쟁한 현지의 네트워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런 그들이 혼신을 다해 컨설팅을 돕기 때문에 최고 수준의 정보를 얻을 수 있지요!” 김세훈 부사장은 간혹 기업들이 국내에서 활동하는 임직원들을 주재원으로 현지에 파견한 후 그들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수고라고 단정한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업무 능력이 뛰어나도 외국에 나가는 순간 현지에 적응하는 데만도 1년은 걸릴 겁니다. 그런 다음 해당 나라의 실정을 파악하고 고급 정보를 얻어내려면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이고요. 그렇다면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 것이며 얼마나 많은 경제적 부담이 생기겠습니까?” 특히 기업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적절한 ‘타이밍’인데 주재원을 키우는 사이 중요한 타이밍을 다 놓친다는 것이다. 또 기왕에 진출한 경우에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효과적으로 손실을 방지하는 것도 중요한데 이런 부분에서는 반드시 현지의 전문적인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저희에게 100시간만 주시면 100명의 전문가가 가장 확실하고 생생한 정보를 줄 것인데 이런 유용한 조직을 쓰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유용하지 않습니까?” 김세훈 부사장의 단호한 어조에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그가 BCC에 합류한 후 아시아 최고실적 피너클 어워드를 2회나 수상할 만큼 활약해온 저력이 몇 마디의 말에서 느껴진다. 김세훈 부사장은 BCC의 컨설팅 비용이 고가인 만큼 주로 우리나라 50대 이내의 대기업들이 고객사들이고 이들의 해외진출 컨설팅에 BCC가 95%이상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왔다고 자부한다. -중국이 가장 매력적인 시장! 중국의 성장, 중국의 젊은 지도자들 정확히 알고 존중할 줄 알아야! 김세훈 부사장은 BCC가 인도와 브릭스 국가들, 동남아를 비롯한 신흥국가들의 다양한 컨설팅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래도 중국시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최근 중국 2위 부동산 개발업체인 ‘헝다그룹’의 위기로 인해 중국시장이 요동치고 있어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지만 그렇다고 중국시장의 잠재력이 꺾인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중국은 기업하는 사람들의 마인드부터 다른 나라와 사뭇 다른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국은 오늘의 적이 내일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매우 실용적인 기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도 활동했고 중국도 자주 왕래하지만 중국이 훨씬 매력적인 곳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런 기업관 때문입니다” 김세훈 부사장은 그러나 중국이 마냥 쉬운 나라는 아니라는 면에서도 주의를 준다. “제 경험에 비추어 설명하자면 미국은 계약서를 쓰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스템이라면 중국은 계약서를 쓰면 그 때부터 실질적으로 일이 시작되는 시스템입니다. 그만큼 중국은 가변성이 큰 나라이기도 하지요” 김세훈 부사장은 중국 투자에 관심 있는 한국의 CEO들을 대상으로 중국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한국과 중국의 간극도 확인한다고 귀띔한다. “이를 테면 ‘한국은 체제는 자유주의지만 마인드는 사회주의적이고 중국은 체제는 사회주의지만 마인드는 시장경제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런 양자의 차이를 잘 이해하면 중국 진출이 조금 더 쉬울 수 있겠지요!” 미국과 한국이 중국과 현격히 다른 면을 강조한 김 부사장은 중국은 관계를 만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관계를 만들면 그때부터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며 중국인들의 대륙적 기질을 잘 이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40대 중반의 김세훈 부사장은 중국 정부나 기업의 요직에 30대 젊은 인재들이 많은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며 앞으로 이들 젊은 그룹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중국의 발전이 좌우될 것이고 그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중국에 진출하려는 기업들의 사활이 좌우될 것이라고도 단정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사회가 대학 이상의 교육수준을 가진 인재를 한창 양산하기 시작한 것 불과 10여년 안팎입니다. 우리가 닷컴(.com) 세대를 거쳐 앱(AP-application) 세대로 성장한 것에 비해 중국의 30대는 바로 앱 세대로 진입한 세대들이지요. 그만큼 그들은 고용은 물론 운영과 해고까지 우리보다 훨씬 자유롭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김세훈 부사장은 중국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고 실제로 중국의 어지간한 도시들은 인구에서도 수 백 만 에서 수 천 만을 자랑하는 대도시로 성장하는 등 눈부시게 성장하는 중인데 세계에서 중국을 무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는 것처럼 보여 가끔씩 염려스럽다며 우리 기업이나 국민들이 중국의 실질적인 변화를 분명히 인식하고 존중하는 마인드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기업들을 상대로 하루를 열흘처럼 바쁘게 사는 김세훈 부사장은 바쁜 만큼 자기관리가 중요하다며 나름의 관리를 소개하기도 한다. 영업에 혼신을 다하고 있지만 술 마시면서 하는 영업은 절대 반대하며 무엇보다 리베이트로 뒷거래 하는 영업은 철저히 경계하고 있다. 중국어의 중요성을 인식해 꾸준히 중국어 공부를 하는 중이고 체력 관리를 위해 유도를 오래 해2단을 딴지 오래되었고 최근에는 격투기 매니아들의 필수종목으로 알려진 주짓수를 연마, 블루벨트를 따기도 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부지런 하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아 매일을 성실하게 산다는 김세훈 부사장은 일을 하다보면 어려운 일과 자주 맞닥뜨리는데 그럴 때마다 경주의 선배·지인들이 큰 도움이 된다며 경주출신이라는 자부심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며 웃음 짓는다. 경주에서 태어나 미국을 거쳐 중국과 세계를 향해 우리 기업의 진출을 적극 돕고 있는 김세훈 부사장은 천 년 전 실크로드의 출발지 경주 사람들의 국제성을 오늘에 다시 구현하는 당당한 글로벌 주인공이다.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웠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많은 분야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 요식업과 유흥업, 실내에서 진행되는 모임과 운동 관련 업종 등 사회적 거리두기의 직접적 영향권에 든 업종이 큰 피해를 입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한껏 부유해 보이는 호텔도 이 어려움을 그대로 맞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동이 제한되었으니 비즈니스 고객과 여행 고객이 동시에 대거 줄었습니다. 호텔의 기본 판매 품목인 객실 판매가 크게 줄었고 결혼식을 비롯한 각종 모임, 식사 고객까지 눈에 띄게 줄었지요!” -국내 유수의 호텔 거치며 우리나라 호텔발전의 중심 관통, 색다른 마케팅으로 어려움 헤쳐 나와 노보텔 앰배서드 수원(NOVOTEL AMBASSADOR SUWON-이하 노보텔 수원)을 이끄는 경주 출신 최혁진 총지배인은 업계에 투신한 이후 요즘처럼 힘든 시기가 없었다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런 한편 백신 접종률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만큼 코로나19를 감기처럼 생활의 일부로 여기는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시대를 대비해 보다 철저한 위생상태 유지하기 위해 향후 객실 내 공기청정기 설치, 옷을 말끔히 하는 스타일러 설치 등 시설투자에 박차를 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최혁진 총지배인이 노보텔 수원점 총지배인으로 선임된 것은 지난 2019년 12월이다. ‘노보텔(NOVOTEL)’은 세계적으로 품격과 권위를 자랑하는 호텔 브랜드인 프랑스 아코로의 대표 브랜드 중 하나다. 노보텔 수원은 경기도 도청소재지인 수원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수원역과 이어진 좋은 입지의 호텔로 지상 9층에 287개의 객실, 수원 최대 규모의 연회장인 ‘샴페인 홀’을 비롯, 30명부터 120명까지 모일 수 있는 다양한 연회실, 1층 로비에 마련된 ‘더 스퀘어’ 레스토랑과 로비 바, 사우나와 체력 단련장, 헤어샵 등을 갖춘 수원 최고의 호텔이다. 2014년에 오픈한 비교적 새 호텔인 만큼 현대적인 시설이 장점이고 종사원들이 한결 같이 순수하고 친절하며 특히 호텔의 중요한 경쟁력인 ‘음식’이 정평 날 만큼 맛있다는 평가다. 이 모두가 최혁진 총지배인의 세심한 관리 아래 일사불란하게 정립되고 있다. “호텔에서 총지배인의 위치는 프로야구 구단으로 치면 단장과 감독을 겸한 정도의 위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텔이 상징적인 대표이기도 이기도 하고 호텔을 실질적으로 경영하는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 볼 수 있는 호텔 총지배인, 더구나 국제적인 유명 체인 호텔의 총지배인이란 자리는 호텔업계에서는 최고의 위치와 명예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최혁진 총지배인의 호텔업계에서의 위상과 성장과정은 남다르다 할 수 있다. 최혁진 총지배인은 한국외국어 대학교에서 아랍어과를 졸업한 후 당시로서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호텔리어에 대한 포부를 품고 호주 시드니로 유학, 블루마운틴국제호텔경영대학에서 호텔경영을 전공하고 귀국, 본격적으로 호텔리어의 꿈을 키워왔다. 판촉과 마케팅에 남다른 관심과 실력을 가졌던 최혁진 총지배인은 JW메리어트 판촉팀장, 플라자 호텔 마케팅 부장, 그랜드 앰배서더 부총지배인 겸 판촉이사, 강남의 쉐라톤 팔레스 마케팅 본부장을 거치며 20세기 후반과 21세기를 걸친 호텔사업 발전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왔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이 1997년~1998년에 걸친 IMF 당시라고. “국가 부도 사태를 맞아 전업종이 힘들었지만 서울의 특급 호텔들은 어느 때보다 호황이었지요. 당시 IMF 관련자들과 한국기업을 진단하고 사들이려는 해외 투자자들이 대거 들어와 있었는데 호텔 종사자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일이 국민의 입장에서는 가슴 아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대한민국이 조기에 IMF상황을 극복하면서 국제적으로 국가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고 이 시기를 통해 우리나라 호텔전반이 업그레이드되는 도약점이 되기도 해 호텔 종사자로서 부담스럽던 당시의 상황이 급속히 편해졌다고 회고한다. 그에 비해 이번 코로나19 상황은 과거 숱한 어려움이나 전염병 때보다 장기화 되어 IMF때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호텔을 지키는 입장이 된 셈이다. 더구나 최혁진 총지배인 입장에서는 한창 코로나19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상태에서 호텔을 책임지게 되어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다각도로 호텔을 정상화 하려는 방법들을 시도하며 업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지자체와 업무협약을 맺어 호텔 수요를 창출하거나 다양한 기업들, 학계와 연계해 판촉을 추진하기도 했다. 특히 코로나로 급격히 웨딩 이벤트가 줄어들자 발 빠르게 소규모의 웨딩이벤트 상품을 내놓기도 하고 재혼부부를 위한 웨딩 상품을 출시하기도 해 호응을 얻었다. 주변 35개 상가들과 연계해 노보텔 수원 투숙객들에 한해 5~20%의 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화 한 것도 이채롭다. 설과 추석을 맞아 호텔 주방장이 직접 조리한 전을 비롯한 명절음식을 판매해 특별한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아이디어들은 오랜 기간 마케팅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했고 틈날 때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얻은 힌트에서 착안되었다. 그에게 앞으로의 호텔 전망을 물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지는 만큼 호텔 산업도 발전 가능성이 크지요” 특히 많은 영역에서 인공지능(AI)로봇이 사용되겠지만 호텔에서는 사람이 해주는 서비스가 가장 안정적인 만큼 호텔만은 AI가 함부로 대체하기 힘든 분야라는 것이 최혁진 총지배인의 지론이다. 그런 만큼 이 분야에 대한 젊은이들의 도전이 앞으로도 유망할 것이라 내다본다. 호텔리어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친절하고 따듯한 품성과 외국어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호텔은 잠만 자는 곳 아님, 자세히 물어보고 호텔 시설들 마음껏 활용하는 것이 좋은 호텔 사용법 그런 한편 고객들이 어떻게 하면 호텔을 좀 더 다양하게 즐길 수 있을지도 알려준다. “아직도 국내 고객들이나 해외로 나가는 관광객들이 호텔을 단순히 잠 자는 곳 정도로 이용하고 끝내는 편입니다. 숙박 기능은 호텔의 가장 기본적 기능일 뿐, 호텔에는 무료로 즐기거나 특별한 할인을 받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숙할 때 프런트 데스크에서 무료 또는 할인 받아 사용할 수 있는 시설들을 물어보는 것이 호텔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라고 설명한다. 대체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 호텔의 경우 사우나, 헬스클럽 등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관광지 리조트 호텔의 경우 수영장과 골프 연습장, 특별한 산책로, 호텔 내 놀이시설이나 호텔과 연계된 외부 시설도 이용할 수 있다. 특히 여름이나 겨울 휴가철 이른바 ‘호캉스(호텔에서 즐기는 바캉스)’를 즐기는 고객들도 늘고 있는데 이런 방법들이 호텔을 충분히 이용하는 방법이라 소개한다. 반면 고객들이 호텔을 이용할 때 지켜야 할 매너에 대해서도 이 기회에 밝혀두고 싶어 한다. “요즘은 우리나라 호텔 고객들도 수준이 높아져서 이전처럼 호텔에서 고성을 지른다거나 갑질을 일삼는 고객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무리한 요구로 종사자들을 괴롭히거나 자신의 부주의로 일어난 증빙할 수 없는 사건을 무턱대고 호텔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간혹 일어납니다” 진상고객 중에는 자신의 신분을 지나치게 드러내며 윽박지르거나 유력한 인사들과의 관계를 거론하며 부당한 요구를 하는 고객들이 아직도 있는데 이런 일들은 모두 부질없이 종사원들과 자신을 욕보이는 일이고 자칫 호텔업계에 나도는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도 있다고 귀띔한다. 특히 호텔마다 금연정책이 있어 호텔 특정 층이나 호텔 전체가 금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를 몰라 분쟁에 휩싸이는 경우도 있으니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편 최혁진 총지배인은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내 국지의 체인 호텔들이 다방면에서 한국화 되고 있어 자부심을 느낀다고 자부한다. 한실을 표방한 객실 및 로비 인테리어, 레스토랑이나 룸서비스의 한식 비중 증가, 객실 TV의 한국소개 등을 보면 우리나라 호텔이 변화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고. 경주시내에서 태어나 자랐고 초중고교 친구들이 경주와 수도권에 고르게 살고 있어 언제나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좋다는 최혁진 총지배인, 하루 속히 코로나19를 이겨내 경주나 수원이나 고객들의 웃음이 호텔마다 가득 차기를 희망한다.
달빛을 소재로 경주를 노래한 강원석 시인의 시가 가수 조성모 씨와 작곡가 ‘알고 보니 혼수상태’를 만나 경주를 대표할 노래로 탄생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9월 22일 전격 공개된 이번 노래는 경주시가 제작비를 지원해 만든 만큼 아티스트&경주지자체 콜라보 음원으로 음악을 통한 지자체 홍보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에 대한 가능성도 엿볼 수 있어 관심이 모아진다. -강원석 시인, 지난해 11월 이후 경주 노래 만드는 데 혼신 다 해. 조성모 씨 알고보니 혼수상태와 전격 섭외 이번 노래의 중심에는 강원석 시인이 있다. 강원석 시인이 이번 노래의 노랫말을 만든 것은 지난해 11월 7일, 구미, 영천 등을 돌며 바쁜 강연일정을 소화하던 중 경주에서 머물며 경주의 밤거리를 거닐다 영감을 얻어 시를 지은 것이다. 강원석 시인의 경주 사랑은 중학교와 고교시절 두 차례나 수학여행으로 경주로 오게 되면서 각별해졌다. 이후 고향인 함안과 자신이 자란 마산만큼 경주에 심취해 틈만 나면 경주로 여행 온 경주 매니아다. 특히 강원석 시인은 달빛 아래 드리워진 경주와 잘 정돈되고 연출된 밤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달빛 경주’라는 시를 지었고 이전에 강원석 시인과 작업한 바 있는 남성 듀오 작곡가 ‘알고 보니 혼수상태’와 의기투합해 노래를 만들었다. 강원석 시인은 이전에도 유명 가수들과 함께 노래를 만들어왔는데 대표적으로 변진섭 ‘별이 된 너’, 태진아 ‘고향-농부의 노래’ 윤복희 ‘세상은 기억하리라’ 추가열의 ‘빗속의 추억’ 등이 있으며 지난 7월에는 ‘알고보니 혼수상태’와 함께 김현아의 ‘피카소의 꿈’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듯 자신의 시로 대중성 있는 노래를 만들어 온 강원석 시인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개그맨 지상렬 씨 추천으로 대표적인 감성 발라드 가수 조성모씨를 소개 받았고 조성모 씨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달빛경주 작업에 급물살을 탔다. 강원석 시인은 이번 노래 발표 후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매우 고무적이다. 두 작곡가와 조성모 씨의 참여로 아름다운 노래가 만들어졌고 경주시에서 이 노래를 만드는데 적극 협조해 주어 작사가로서 큰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강원석 시인은 “조성모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조성모씨로부터 ‘슬럼프를 이기기 위해 자주 경주를 찾아 마음을 가다듬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보다 더 경주를 사랑하는 가수라는 생각이 들어 여하한 경우라도 조성모씨와 노래 만드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며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작곡가 ‘알고보니 혼수상태’ 경주 방문해 감성 익혀 노래 작곡 !! 조성모와 다수 작업해 작곡가 ‘알고 보니 혼수상태’는 김경범, 김지환 두 작곡가가 2016년부터 함께 활동하며 이룬 작곡팀이다. ‘알고보니 혼수상태’는 김경범 씨의 가명을 팀명으로 사용한 것. 김경범 씨는 가수로도 활동해 왔으며 OST부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해온 작곡가로 500여곡 이상의 OST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고 김지환 씨는 19살 때 트로트 가수 박현빈의 ‘샤방샤방’을 작곡했을 만큼 트로트계 유망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이들 두 작곡가는 그간 송대관. 홍진영, 한혜진 등의 곡을 썼고 최근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의 열광과 함께 송가인의 ‘가인이어라’, 영탁의 ‘찐이야’와 등 참여가수들의 곡을 써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알고보니 혼수상태는 이번 노래에 참여한 조성모 씨의 노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역시 조성모 씨가 부른 KBS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의 OST도 작곡했다. 노래를 작곡한 알고보니 혼수상태는 지난 4월 8일 경주를 전격 방문, 강원석 시인과 함께 경주의 여러 명승지와 황리단길 밤거리를 만끽하며 어떻게 곡을 쓸 것인지에 대한 감성을 키운 바 있다. -경주에서 돌아온 발라드의 황태자 조성모, 슬럼프 기간 중 경주 다니면서 충전 고백, 이번 노래·뮤비에 진심 담아 가수 조성모 씨는 발라드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설명이 필요 없는 대표적인 발라드 가수다. 1988년 ‘투 해븐(To Heaven)’으로 데뷔한 조성모 씨는 ‘다짐’, ‘아시나요’, ‘가시나무’ 등 밀리언셀러 히트곡을 발표한 20세기 마지막 밀리언셀러 가수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 진실(MBC 2000), 파리의 연인(SBS 2004), 눈의 여왕(KBS 2007), 바람의 화원(SBS 2008), 전우치(KBS 2012), 결혼의 여신(SBS 2013), 밥상 차리는 남자(MBC 2017) 등의 OST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그간의 수상경력이나 CF출연 경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무엇보다 조성모 씨의 트레이드 마크인 감성적이고 매력적인 음색은 여성 발라드 애호가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며 황태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해 왔다. 조성모씨는 최근 3년 여 공백을 가지다 이번 ‘달빛 경주’로 전격 활동을 재개해 더욱 관심을 모으는 중이다. 특히 조성모 씨는 공백 기간 동안 경주를 자주 방문해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만큼 평소 경주에 대한 애정을 지녀온 것으로 알려져 이번 노래 제작에 진정성이 크게 부각된 것으로 평가된다. 조성모 씨는 이번 노래 제작에 참여하면서 영상 촬영을 위해 본인이 직접 스토리를 짜고 제작에 깊이 관여하는 등 적극성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번 노래 발표를 통해 경주와 더 깊은 인연을 맺고 싶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성모 씨 펜, 경주 시민, 출향인사들 “달빛경주로 경주 다시 보는 계기되기를!” 한마음! 이번 노래가 공개 된 후 유튜브와 음원에서 반응도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노래가 발표된 후 5일이 지난달 28일 오전 현재 경주시 유튜브 시청자수는 4500명을 넘어 섰고 조성모 씨 유튜브 상에선 9100여명, 조성모씨 뮤직 비디오에선 3200회 이상, 강원석 시인과 관심 가진 유튜브들에 1000회 이상 조회되는 등 모두 1만7000회 이상 꾸준히 조회되고 있다. 카카오 뮤직 음원발매에서는 6위에 올라 이 음원다운 부분에서도 약진하고 있다. 이에 따른 시청자들의 반응도 연일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성모 씨의 펜들로 오랜기간 조성모 씨의 노래를 기다려온 펜들의 응원이 이어지고 있다. zzang9 씨는 “발라드 전하와 경주 최고의 콜라보입니다~ 이번 가을에 꼭 경주로 가겠습니다”고 댓글을 달아 노래와 노래속에 담긴 경주의 풍경에 공감했고 Yujin Jeong 씨는 “시작하는 연인의 설렘, 달빛 가득한 아름다운 경주 ~ 달빛 가득한 경주에 얼른 가고 싶어집니다”며 노래의 분위기에 흠씬 취했음을 표현했다. 아침하늘 씨는 “경주의 예쁜 곳들 추억들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다음 연휴 땐 경주에 방문해야겠어요”라며 노래를 반겼다. 강원석 시인에 대한 예찬도 곳곳에 눈의 띈다. 장석규 씨는 “노랫말이 너무 좋아 찾아봤더니 (강원석) 시인께서 쓰신 가사네요”라며 응원했고 Soo Jin Mo 씨는 강원석 시인님의 시는 작곡이 필요없는 것 같다 그 자체가 아름다운 음악이다”며 노랫말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경주사람들과 경주출향인들의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다. 고서희 씨는 “성모오빠 목소리는 왜 이리 감미로울까요. 경주에 살지만 오빠가 불러쥐 너무 좋네요”라며 펜심을 드러냈다. 출향인 최혁진씨는 “최근 상대적으로 여수나 강원도 일대가 너무 뜨는 바람에 경주가 과거의 위상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뮤비로 과거의 위상을 찾았으면 한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대학원생 박진호씨는 “경주 홍보 노래라는 느낌은 안 들고 ‘경주 가봤더니 좋았다’는 식의 부담없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며 노래가 참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왕원표씨는 “여수밤바다의 정겨운 여행의 추억을 부르듯이 경주의 은은한 추억를 노래하는 것 같다”며 고향 노래를 환영했다. 한편 경주시는 (재)경주문화재단 경주예술의 전당은 이번 달빛경주 발표 기념으로 5일까지 이번 노래에 대해 따라 부르기 도전(커버 첼린지)을 기획하고 노래 잘하는 사람들의 도전을 기대하고 있다. 경주예술의 전당 홈페이지에 접속하며 이 첼린지가 베너 광고로 떠 있으며 해당 첼린지에는 총 100만원의 상금이 걸려 있다.
-‘탁구계 문익점’ 대한민국 탁구 역사의 산 증인, 수차례 아시안게임·올림픽 금메달 신화!! 강문수 감독은 1985년부터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후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탁구 국가대표 총감독을 수행하기까지 가장 오랜 기간 국가대표 탁구팀을 이끌어왔고 대한탁구협회 전무, 부회장 등 핵심요직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탁구를 지켜온 버팀목이었다. 이 과정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32년 만에 일본을 넘어서며 유남규·김택수 선수조가 역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 유남규 선수는 남자 단식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이 무렵 강문수 감독은 당시 우리 선수들이 마크5라바를 주로 쓴 대 비해 국제적으로는 RITC라바가 대세라는 점을 알고 중국과 홍콩 등으로 직접 다니며 어렵게 라바를 구해와 ‘탁구계의 문익점’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런 노력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애제자 안재형 선수와 유남규 선수가 남자 복식조 동메달을 땄고 개인전에서는 우리끼리 결승을 치러 유남규 선수가 대망의 금메달을 김기택 선수가 은메달 따며 영원한 탁구 영웅들로 등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현재 대한탁구협회회장이자 IOC위원으로 활동하는 유승민 선수는 강문수 감독이 삼성생명 탁구단 감독으로 활동하던 30년 시간이 만들어낸 가장 빛나는 금자탑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단체전에서 동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단체전 은메달을 각각 따낸 유승민 선수는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IOC 선수위원으로 선발되며 한국 탁구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2019년 6월 이후 대한탁구협회회장에 선출되었다. 강문수 감독은 유승민 선수가 IOC위원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협회장이 될 수 있도록 산파역할을 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김완, 김기택, 안재형, 이철승, 박미영, 주세혁 등 탁구계에서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강문수 감독의 국가대표 혹은 삼성생명 소속 애제자들이고 지금은 그 계보를 대한항공 신유빈 선수 등이 다시 잇고 있다. -마부작침, 마지막 1도를 끌어 올려 최고로 만드는 것이 지도자의 길, 코칭 스텝에 대한 예우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그렇다면 과연 강문수 감독의 어떤 지도 방법이 이 많은 선수들과 함께 해왔을까? “기본적으로 선수의 재능과 노력 간의 사이를 90:10으로 봅니다. 90%는 재능입니다. 탁구를 좋아하고 심취하고 즐기고 잘 하는 선수들을 어릴 때 발굴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100%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도자가 그 10%를 채워줌으로써 비로소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강문수 감독은 선수들의 역량이 최대한 발현되는 것은 물과 같다고 비유한다. “물은 99도에 가도 끓지 않습니다. 그러나 100도가 되면 끓습니다. 그 최후의 마지막 1도를 더하는 것이 지도자의 몫이지요” 강문수 감독은 바로 그 1도를 높이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구하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선수들을 지도했다고 설명한다. “내가 지도하는 모든 선수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주문이 있습니다. 그게 원모어(one more), ‘한 번 더’ 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체력과 연습 없이는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극한의 훈련을 이겨내고 거기서 단 한 번이라도 더 뛰고 볼 박스를 쳐내는 것이 선수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지요!” 강문수 감독은 선수들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금과옥조인 마부작침(摩斧作針)을 떠올린다. 도끼를 갈아 날카로운 침을 만드는 심정으로 선수를 단련하고 깨우쳐 최고의 선수로 키운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 우리나라 탁구의 현실, 특히 엘리트 위주의 선수 운영 상 선수에 대한 육성책이 중국에 비해 현격히 차이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여건상 엘리트 선수 위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기에는 전반적인 여건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너무 열악합니다. 특히 중국은 스폰서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특정 외국 선수를 이기거나 선수 개개인에 설정한 목표를 이루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충분히 해줍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최고의 에이스 선수만 대접받고 아시안 게임과 세계선수권, 올림픽 정도의 국제대회 성적만으로 보상 받는 정도지요” 여기에 코칭스텝에 대한 인식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열학하다는 점도 지적하며 이에 대해 장기적인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중국은 선수와 코치가 1:1 훈련으로 집중도가 높아졌고 일본도 개인코치 위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감독 아래 코치 한 명이 2~3명의 선수를 돌보는 형편이지요. 우리나라 탁구는 선수에 비해 지도자를 너무 소홀히 여기다보니 과거 스타 선수들은 자신의 스타성에 만족해 어려운 지도자 생활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독일이나 일본, 야구나 축구처럼 우리도 스타 감독을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호인 120만 명, 우리나라 최대의 생활스포츠인 탁구이지만 유명 선수는 알아도 그들을 키운 강문수 감독 같은 세계 탁구계의 마에스트로를 모르는 일은 아이러니다. 명감독 밑에 명선수가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는 탁구라고 예외가 아닐 것인데 아직도 탁구계에서 감독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강문수 감독은 중국과 일본, 체력 좋은 유럽 등 정글 같은 세계 탁구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려면 지도자에 대한 대접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29세에 삼성생명 감독으로 부임 34년 동안 전무후무한 무려 51%의 우승률을 기록했고 국가대표 감독으로 만19년, 이후 총감독과 탁구협회 부회장을 맡으며 대한민국 탁구사를 온몸으로 지탱해 온 강문수 감독. 선수들에게 승리를 독려하고 메달 획득을 주문한 만큼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노메달로 돌아왔을 때는 총감독으로서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다 공황장애에 시달리기도 했다. 냉정한 승부의 세계, 강문수 감독 같은 명장에게는 그 만큼 뼈아픈 일이었다. -‘명장의 방패, 불굴의 검! 백전노장의 투혼’, 경주라면 발 벗고 나서는 애향심도 으뜸 !! “이제는 정말 힘들어요. 체력이 예전만 같지 않아는 것을 실감하지요. 대한항공이 감독으로서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니까 더 애착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침 지난 주 강문수 감독의 인터뷰가 나간 후 강문수 감독의 경주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엄기백 전 KBS PD로부터 강문수 감독을 염려하는 전화가 왔다. “강문수 감독은 최고의 승부사잖아요. 탁구 경기장은 그들에게는 전쟁터 같은 곳이고요. 그 전쟁터에 자신을 몰아넣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것인지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엄기백 감독은 친구로서 강문수 감독에게 고만 은퇴하라고 조언했노라 말했다. 기자가 보기에는 70세에 대한항공 감독을 맡아 세계 유수의 팀과 맞붙는 강문수 감독이나 70세에 배우라는 또 다른 도전을 감행하는 엄기백 감독이 제각각 ‘명장’이라는 방패를 들고 ‘불굴’이라는 검을 쥔 채 창칼 번뜩이는 날 선 전쟁터를 누비는 ‘백전노장’에 다름 아닌데 말이다. 한편 강문수 감독은 워낙 바빠 참여하기 힘들었을 뿐, 경주와 관련한 일에는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는 체육인으로도 유명하다. 한창 인터넷 카페가 활성화 될 2006년 2월에는 경주고 경주여고 연합카페 탁구교실을 삼성생명 탁부단에서 열어 이철승 코치를 비롯 유승민, 주세혁 선수 등 당대 탁구영웅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고 최양식 시장이 경주시장 재임시 근화여고에서 열린 생활체육탁구동호인 체육대회에서 지도도 해주었다. 경주의 김석기 의원과는 중학교 때 탁구를 같이 한 사이로 선거유세 때 유남규, 현정화 선수 등 탁구 영웅들과 함께 유세를 돕기도 했다. 만화가 이현세 화백, 경주중고 서울동창회장을 지낸 이지태 ㈜한보ENC 사장, 현 경주향우회 수석부회장인 ㈜에이스 공조 박성환 사장 등 후배들과 막역해 서로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강문수 감독은 경주중학교에서 탁구부로 활동하며 탁구와 인연을 맺었고 경주고등학교 2학년 초에 탁구부가 해체되면서 대구중앙고로 전학해 전국고교친선탁구대회에서 우승하며 탁구유망주로 성장, 고3때 실업팀인 전매청에 입단했고 이어 경기대학교로 진학, 교직을 이수하며 지도자로 활약할 준비를 시작했다. 공군입대 후 정식 국가대표가 되어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활약했다. 제대 후에는 경기대학교에 복학해 교사자격증을 딴 후 1979년 제일합섬에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83년과 1984년 연이어 제일합섬 남자탁구단을 우승으로 이끈 후 1985년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활약했다. 2020년 본지와 자서전을 내기로 협의했으나 코로나19상황으로 인해 일정이 연기되고 있다.
도쿄에서 치러진 제32회 올림픽이 끝나고 한 달여 지났고 패럴림픽도 마쳤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한 해 미뤄 치룬 데다 무관중 경기로 인해 역대 어느 때보다 싱겁게 치러쳤지만 올림픽은 많은 스포츠 영웅을 남겼고 그들의 영웅담으로 인해 한 동안 방송과 신문이 들 떠 있었다. 특히 메달을 딴 선수들이 집중 조명됐고 올림픽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만큼 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마음껏 기량을 펼쳤거나 장래가 기대되는 선수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이 집중됐다. 그러나 선수들을 지도하고 감독해 최고조의 기량을 발휘하게 하는 코칭 스텝들에 대한 관심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축구나 야구 등 최고 인기 종목의 감독을 제외하면 경기장 밖을 지배하는 코칭 스텝들은 역시 그림자에 머물렀다. 그런 와중에도 대한민국 탁구의 살아 있는 신화, 경주 출신 강문수 감독은 올림픽이 끝난 후 새롭게 주목 받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이번 도쿄 올림픽 탁구에서는 단연 신유빈 선수(대한항공)가 주목됐다. 올해 17세의 신유빈 선수는 이번 올림픽 탁구 부문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기록됐고 마침 룩셈부르크 출신의 57세 최고령 백전노장 니 시아리안 선수와 맞붙어 4대3 승리를 거두며 세계 탁구인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받았다. 비록 메달을 따는 데는 실패했지만 신유빈 선수는 개인전과 여자 단체전 등에서 활약하며 미래 유망주로서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신유빈 선수는 귀국 후 대한항공 조원태 대표이사에게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테니 비행기를 선물해 달다”는 당찬 요구를 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신유빈 선수는 올림픽 후 각종 예능에 출연하며 부산한 시간을 보내느라 일각에서 혹여라도 페이스를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들었다. 그러나 지난 8월 치러진 2021 세계탁구선수권대회 파이널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7전 전승, 심지어 7경기에서 단 3세트만 내주는 놀라운 경기력을 과시하며 앞으로 우리나라 여자탁구의 확실한 대들보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신유빈 선수는 대한항공에서, 아버지 신수현 선수는 삼성생명에서··· 2대 걸친 스승, 영입의 바탕 마련 그런 신유빈 선수를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강문수 감독. 신유빈 선수는 강문수 감독이 삼성생명 총감독에서 은퇴한 뒤 2019년 6월부터 다시 대한한공 여자탁구단 감독을 맡은 후 손수 스카우트하고 이전의 선배 선수들처럼 정성을 들여 기운 유망주다. 강문수 감독과 신유빈 선수의 인연은 신선수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다. 신유빈 선수의 아버지 신수현 수원탁구협회 전무가 바로 강문수 감독의 삼성생명 감독시절 제자였기 때문. 신수현 전무는 탁구장을 운영하며 어린 신유빈을 직접 지도했는데 발군의 기량을 보이는 딸의 진로에 대해 강문수 감독과 수시로 상담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마침 유소년 및 청소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이 단양에서 합숙 훈련을 했는데 이때 강문수 감독이 직접 볼 박스 훈련을 시키며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움직임, 감각, 스텝, 박자와 리듬 등이 국가대표 선수 못지않았어요. 중학교 마치고 고등학교 갈 무렵에는 이미 고교생 실력을 초월해 고등학교 진학하면 연습상대조차 없을 것이라 판단했지요. 마침 유빈이 자신도 일찌감치 실업팀으로 가고 싶은 포부를 밝혔어요” 결국 대한항공 탁구단 이유성 단장과 신유빈 선수의 에이전트가 알아서 조건을 맞추도록 주선하고 강문수 감독은 신유빈 선수의 지도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강문수 감독과 오랜 기간 호형호제하며 돈독한 우의를 나누어오며 은퇴한 강문수 감독에게 간곡히 감독직을 맡아 달라 부탁했던 이유성 단장은 강문수 감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신유빈 선수를 대한항공으로 이끌었다. 강문수 감독과 신수현 전무, 강문수 감독과 이유성 단장의 끈끈한 신뢰가 없었다면 애초에 대한항공을 눈여겨보지 않았을지 모를 영입이었다. 강문수 감독 개인에게는 아버지와 딸 2대를 지도하는 대한민국 탁구거장다운 초유의 기록까지 보유하는 순간이었다. 2020년 2월 정식으로 입단한 신수현 선수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2번에 걸친 도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2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최연소 국가대표로 합류, 이번 올림픽을 치렀다. 우습게도 단박에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는 바람에 신유빈 선수는 국내 대회는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하고 바로 올림픽에 직행하는 특별한 기록도 가지게 되었다. “신유빈 선수는 쉐이크 핸드형 선수로 백핸드 감각과 박자, 리듬, 투지 등이 탁월하지요. 포핸드 활용도(득점원)을 높이고 서비스를 조금만 더 강화하면 국제경쟁력이 크게 강화될 겁니다” 강문수 감독은 신유빈 선수에게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말로 혼신을 다할 것을 주문한다. -유승민 선수처럼 어렸을 때부터 인연··· 좋은 대비, ‘금메달 딸 테니 비행기 달라’는 투지에 내심 대견 이쯤에서 기자는 슬며시 유승민 선수와 신유빈 선수를 비교해 달라고 부탁했다. 현재 IOC위원이자 대한민국탁구협회회장인 유승민 회장 역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강문수 감독과 인연을 시작해 중학교 3학년 때 삼성생명에 입단 국가대표단까지 두루 고락을 함께 한, 강문수 감독이 가장 아끼는 제자다. “유승민 선수는 포핸드 전형으로 볼 파워, 순발력, 경기운영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났지요. 거기다 집중욕과 승부욕이 누구보다 강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강문수 감독은 특히 유승민 선수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경쟁 선수를 압도하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려면 단순히 메달을 따겠다는 각오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금메달을 따겠다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메달 따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최소한 동메달이라도 딴다는 것이 강문수 감독의 지론! 유승민 선수가 세 번의 올림픽 출전에서 금, 은, 동을 고루 땄던 것도 바로 이런 강렬한 투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런 강문수 감독에게 ‘파리에서 금메달 딸 테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한 신유빈 선수의 당찬 결기는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의 대견함이었다. 게다가 신유빈 선수는 훈련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고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관리한다며 은근히 만족감을 드러낸다. 신유빈 선수를 초대형 국가대표로 만들며 대한항공 여자탁구의 면모를 일신한 강문수 감독이지만 이런 파란은 실상 강문수 감독이 대한항공 감독을 맡으면서 이미 시작됐다. 강문수 감독이 대한항공 감독직을 맡은 것이 2019년 6월부터인데 이후 불과 2개월 만에 이은혜 선수를 국가대표 선수로 등극시켰고 3개월 만에 단체전 우승을 일궜다. 취임 이후 코로나19로 단체전 출전을 자제하면서도 그간 치른 5개 경기에서 3번이나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항공에서 이룬 실적은 빙산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 강문수 감독은 우리나라 탁구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명감독으로 그를 뺀다면 대한민국 탁구사가 통째 사라질 만큼 수많은 신화를 남긴 명감독이다. 대한민국 탁구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반드시 강문수라는 이름 석 자가 그 뒤를 받치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있다. 산업에서 농사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는 뜻이다. 생명과 관련된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이니 당연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농사는 힘들고 돈 안 되는 산업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농업을 혁신적인 산업, 미래 산업으로 말들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농민 스스로 농업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하고 그 출발을 ‘농업디자인’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오랜 기간 이 분야에서 연구하고 성장해온 경주출신의 디자인 기업이 있다. 시우디자인센터의 노시우 대표이사다. 노 대표는 디자인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희망하는 전국 유수의 지자체를 대상으로 디자인학교를 운영하는가 하면 농민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로 만든 디자인을 실제 인쇄물이나 포장지로 만들어 제공하는 인쇄센터를 운영하는 등 농업분야에서 특화된 다각적인 디자인사업을 이끌고 있다. -생활 자체가 디자인, 대학 강의하며 농업디자인 특화, 전국 농업 생산업자와 지자체가 고객 노 대표가 처음 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고교시절부터다. 아직 디자인이라는 말이 광범위하지 않던 시절 특별한 이유도 모른 채 디자인이라는 말 자체에 끌려 전공을 디자인으로 선택했다고 회고하는 노 대표는 올해로 30년째 디자인 사업을 해온 전문 디자이너다. 다방면의 디자인 산업에서 유독 농업 디자인을 특화한 것에는 나름의 계기가 있었다. 협성대학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해태제과의 각종 제품 포장지를 디자인하던 모 디자인 회사에 취업해 식품 디자인을 시작한 것이 업계에 발을 들인 인연. 디자인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던 노 대표는 이때부터 학사 출신으로는 흔치 않게 대학 강단에 서며 디자인 실무를 강의한다. 특히 한국폴리텍 대학에서 7년 동안 겸임교수로 강의를 맡은 것은 뒤에 자신이 만들 디자인 학교의 초석이 되기도 한다. 명색 겸임교수라는 직함을 가지다 보니 이론 공부를 소홀히 할 수도 없어 이 과정에서 세종대학교에서 디자인학과 석사학위를 받은 것도 의미 있다. 이후 세명대와 자신이 나온 협성대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마침 시대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농업 선진화에 주목하고 농업 디자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때였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을 해오던 저로서는 사내 누구보다 농민의 심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효과적인 디자인을 만들 수 있었지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농업 디자인과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디자인을 맡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사업적인 가능성을 확신한 노시우 대표는 1999년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우디자인센터’를 창업했다. 진심이 깃든 감각적인 디자인 실력에 강연을 통해 얻은 신뢰와 명성은 노시우 대표를 농업 디자인 특화로 쉽게 전진하게 유도했다. 특히 노시우 대표는 전국의 여성농민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그 계기는 이 무렵 한국생활개선회에서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독려하면서 농업분야에도 여성들의 진출을 적극 권장하던 때라 전국을 돌며 농업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노시우 대표가 열렬한 환영을 받기 시작한 것. “사실은 이미지 관리에도 철저했습니다. 제가 술 담배를 하지 않다보니 자기 관리에 쉬운 편이었고 사람들 앞에 서다 보니 복장이나 외모에도 각별히 신경 쓰게 되었습니다.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 자신에게도 엄격히 적용됐던 것이고 저로서는 디자인의 생활화가 이루어진 셈이지요” 이 과정에서 농업기술교류센터에 소속된 전국의 여성 연구원이나 관련자들과 친숙해졌고 자연스럽게 농업디자인의 특화가 가속화 됐다. 시우디자인 센터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시우디자인센터가 디자인한 전국 각 지역의 농업 생산물들의 작업물들이 수 없이 올라와 있다. 농업 디자인으로 특화했지만 전국 지자체 대부분이 아직도 농업에 깊은 비중을 두고 있다 보니 역시 자연스럽게 지방자치단체들의 디자인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농민들의 든든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 있다 보니 지자체 공무원들도 까다롭게 간섭하기 보다는 시우디자인을 믿고 맡기는 선순환이 일어나 힘들지 않게 지방자치단체의 일을 맡게 되었다는 것. 역시 시우디자인센터 홈페이지에는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행한 다양한 디자인 제작물들이 대량으로 올라와 있다. -‘이론부터 실기까지, 내가 생산한 농산물은 내가 디자인한다’ 농업디자인학교 만족도 최고. 경주 이사금 쌀과 해파랑 디자인도! 노시우 대표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농민들이 스스로 관심을 가지고 자신들이 생산하는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고 적극적인 디자인을 통해 판매를 촉진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역시 농민의 아들로 자라 누구보다 진정성 있게 농촌과 농민을 바라 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노시우 대표는 자신의 대학 강의와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농업디자인학교’ 강연코스를 개발했다. ‘이론부터 실기까지, 내가 생산한 농산물은 내가 디자인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농업디자인 학교는 노시우 대표만의 오랜 노하우가 만든 결정체다. 6일 동안 매일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까지 진행되는 농업디자인학교는 한 회당 10여 명의 농민들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전체적인 과정은 ‘개강 및 디자인 이해-브랜딩 및 과제발표-네이밍 도출 이미지 구성 및 명함 디자인-브랜드 포장 디자인- 상표출원-품평회’ 식으로 짜여 있다. 강의에 참여하는 농민들은 자신이 생산하는 농산품의 특징과 장점을 파악한 후 노 대표와 함께 이를 어떻게 특화시키고 어떤 식으로 디자인해 명품으로 재탄생 시킬지를 6일 안에 공부하고 실제로 디자인까지 마치게 된다. 아무런 실체 없이 빈손으로 들어와 빈손으로 나가는 교육프로그램과 달리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고 작업물까지 만들다보니 참여하는 농민들의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노 대표는 자신의 경험과 다양한 실무 이론을 바탕으로 농민들에게 개별상황에 맞는 컨셉을 제시하고 농민들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끌어내어 농산물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 농업디자인학교를 개설한 이후 전국지자체들과 농민단체 등 지금까지 50여회의 학교를 열었다. 덕분에 노시우 대표에게는 적어도 500여명의 농민 제자들이 전국에 분포하는 셈이고 그들이 또 다른 디자인 고객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 중에서도 남해군의 경우 농민들의 결과물을 중심으로 소형책자를 만들 만큼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농민에 대한 이해가 높고 실무에 참여하다 보니 농촌진흥청 디자인 자문위원, 경북농업기술원 농식품기술자문위원 등 공적 역할을 맡는다거나 수차례에 걸친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 수상을 비롯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추천 디자이너 등 화려한 이력이 따라온 것은 덤이다. 이들 역시 노시우 대표에게는 디자인 한 우물을 파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온 부산물일 뿐이다. 농민들과 일하다 보니 경주 일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된 것이 노시우 대표에게는 또 다른 보람이다. 경주 브랜드 쌀로 자리잡은 ‘이사금’과 경주 수산물 공동 브랜드로 익숙해진 ‘해파랑’이 대표적이고 이 밖에도 다양한 경주 농산품의 디자인에 관여해 경주 농산물의 이미지 고양에 참여했다. 식품 디자인에서 출발해 농업 디자인의 선두주자로 활약하는 노시우 대표이다 보니 자신만의 확고한 디자인 철학도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정직한 디자인이다. “지금 시중에 나도는 디자인을 보면 생산품과 디자인의 이미지가 전혀 다르거나 사실보다 과장되게 디자인한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이것은 항구적으로 농업 생산품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농업 자체를 망가뜨리는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디자인이란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디자인으로 농업의 미래를 진일보 시키고 싶다’는 노 대표는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다방면 농업인들과의 네트워크와 디자인학교를 통한 연대, 시우디자인센터의 역량을 모아 농민을 위한 디자인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의 장구한 이념이 어쩌면 디자인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상상을 하니 노시우 대표의 작업에 또 다른 비전과 가치가 보인다. 전국의 농민을 대상으로 학교와 디자인 상담 등을 진행하다보니 정작 가산디지털단지 자신의 디자인 사무실에는 머물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할 만큼 전국구가 된 노시우 대표. 그러나 그는 이런 바쁜 와중에도 무산중고등학교 서울동창회 사무국장을 15년 가깝게 맡아오고 있고 경주향우회에도 지역총무를 맡아 다년간 봉사해 왔다. “경주요? 사실은 명절 때면 한 열흘 전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고향은 떠올리는 그 자체로 너무 좋지요” 따지고 보면 경주는 우리나라 고대 문화, 그 눈부신 디자인이 응집된 도시다. 노시우 대표가 경주만 떠올리면 설레는 이유 역시 경주 사람이라는 유전자 속에 녹아있는 고유의 본성이 깨어나기 때문은 아닐까? 농업 디자인 분야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며 새롭게 번창하는 농업을 꿈꾸는 노시우 대표의 표정에 자신감이 넘친다.
신체연령은 과거에 비해 놀랍도록 젊어진 반면 정년은 오히려 앞당겨진 세태 속에서 은퇴 후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노년의 삶이 단순하고 따분할 수도 있고 다채롭고 즐거울 수도 있다. 늦게 배운 펜화로 인생 후반전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전점득 한국펜드로잉협회 회장의 특별한 인생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경주보건소 소장 출신의 전점득 회장은 은퇴 후의 삶을 놀라운 예술적 재능으로 화려하게 꾸며가는 보기 드문 미술인이다. -70년 대 이전 경주 모습, 경주의 오랜 교회, 독도, 임진각 철마 등 이슈성 있는 작품들 즐겨 그려 8월 17일부터 27일까지 포항의 경상북도교육청문화원 1층에서 제9회 한국펜드로잉작가협회전이 열린다. 여기에 경주의 전점득 회장의 작품 2점도 함께 전시된다. 놀라운 펜화 솜씨로 경주의 오래전 모습이나 경주의 유서 깊은 여러 교회들, 독도 그림 등을 그려 올리며 경주지역 SNS 활동가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해온 전점득 회장. 그가 최근 들어 이룬 미술적 성취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만큼 대단하다. 환경미술대전 우수상, 신라미술대전 특선, 포항불빛대전 입선 등은 2020년 수상 내역이다. 독도문예대전 미술부분 특선, 포항불빛대전 특선은 2021년 올해 거둔 성과다. 전문작가에 대해 이런 수상경력을 쓰는 것은 상투적이라 할 수 있지만 전점득 회장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이런 수상경력만 보면 최소한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거나 10여년은 좋게 공을 들인 후의 성취라고 보기 십상이다. 혹은 어릴 때 미술을 탐구하다가 이런 저런 형편으로 미술을 중도에 포기하고 생업에 충실했다가 은퇴 후 뒤늦게 자신의 길을 되찾은 것으로 지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전점득 회장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다. “펜화를 시작한 것은 2017년 공직에서 은퇴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어렸을 때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고 특별히 미술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해 본 적 없습니다. 상을 타게 된 것은 펜화 시작하고 3년째부터인 셈이지요” 물론 미술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직생활하면서 13년간 틈틈이 취미활동으로 즐긴 서각(書刻) 실력으로 고운서예대전과 영일만서예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했을 만큼 경지에 올라있었고 서각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서예 공부를 한지도 몇 년 되었다. 그러나 펜화와는 아무래도 분야가 다르다. 감추어진 미술적 재능을 전점득 회장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다가 은퇴 후에 비로소 그것을 찾은 것이라 설명할 수밖에 없다. 다만 전점득 회장은 자신의 빠른 성취에는 스승인 허진석 화백의 지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강조한다. 은퇴 후 일주일에 2차례 허진석 화백의 지도를 받기 위해 꾸준히 포항의 화실을 쫓아다닌 것이 지금처럼 펜화를 그리게 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펜화에 자신이 붙은 후 전점득 회장이 그린 작품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30여 점에 이른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계림과 월지(안압지), 경주 봉황대, 서출지 등의 오래 전 모습을 사진에서 살려내 작품으로 그린 것이다. 눈을 얹은 채 묵묵히 드리워진 계림의 오래된 괴목, 수면과 맞닿을 듯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월지의 임해전, 연밭이 무성하기 전의 서출지,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 있고 능 위로 산책로가 나 있던 봉황대 등 70년 대, 경주가 개발되기 이전의 유적들이 품었던 모습을 다시 살려낸 그림은 SNS상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물론 과거에만 집착하지 않고 경주의 지금 모습도 즐겨 그린다. 양동마을과 경주 읍성, 오래된 경주의 어느 고택 등도 그의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또 하나 전점득 회장의 눈길을 끝 작품은 경주의 유서 깊은 교회들을 그린 작품들이다. 경주 문무대왕면의 봉길교회와 산내면의 의곡교회를 그려 해당 교회에 증정한 것이 그 예.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경주제일교회 장로이기도 한 전점득 회장은 앞으로 경주의 오래 된 교회는 물론 전국의 유명한 교회를 그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다. 전회장의 이런 마음은 그가 그린 ‘활짝 웃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즐겁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경주 제일교회가 시작한 3.15경주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기획을 맡은 기억도 교회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꿈의 동기다. 그런 한편 의식적으로 사회성 있는 이슈를 다루며 시대적인 소명에 함께 동참하려는 노력도 기울인다. 우리나라 땅 독도를 그려 올림픽과 관련된 일본의 망동을 경계하기도 했고 녹쓴 채 멈추어 있는 임진각 철마를 그려 최근의 남북한 정서를 의미심장하게 전하기도 했다. 제주 올레길 5코스에 연출된 정글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한반도의 풍경을 옮긴 것은 40년 가깝게 공직자로 살아온 전점득 회장이 대한민국에 바친 작품일지도 모른다. -보건직 공무원으로 경주와 인연, 월성동장, 중부동장, 보건소장 역임 후 경주 그림 그리는 진정한 경주사람 참외와 자두로 유명한 경북 성주 출신인 전점득 회장은 1977년 보건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군 전역 후인 1979년 경주시 보건소에 근무하면서 경주사람이 됐다. 보건직 공무원인 만큼 대부분의 공직생활을 보건소에서 근무하며 우리나라 보건역사를 함께 했다. 근무 중 기억나는 일로 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 당시 보건소 식품위생계에 근무하며 밤 12시까지 경주 일원의 요식업소를 감찰하며 위생점검과 영업시간 단속 등 올바른 요식문화안착에 공들인 경험, 2000년 대 이후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 등 다양한 전염성 질병에 맞서 일선에서 보건전쟁을 치르던 경험 등을 손꼽는다. 그런 그가 최근의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긴다. “우리나라 방역 시스템은 최근에 갑자기 마련된 것이 아니고 국제적인 전염성 질환들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체계적으로 보강되어 왔습니다. 현정부가 다른 나라에 비해 초동방역에 성공적이었던 것은 기존의 시스템이 안착된 결과입니다. 그걸 두고 잘 했네 못 했네 시비걸기 보다는 서로 힘을 모아 당면한 문제들을 현명하게 처리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보건직이 전문이었지만 전점득 회장은 일반 행정업무에도 발군의 기량을 과시한 바 있다. 2005년 8월부터 현곡면장을 지냈고 이어 보건위생과장으로 보건소에 복귀했다가 월성동장, 중부동장을 연이어 맡았다. 월성동 동장 재직시 발굴작업으로 어지러웠던 쪽샘 일대에 메밀밭은 조성해 관광자원으로 삼았고 메밀묵 팔아 남긴 자금으로 월성동 내 어려운 이웃들을 도운 일, 청보리 심기로 방송을 타며 화제를 모은 일, 중부동장 시절 상가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김윤근 선생, 조철제 선생 등을 모시고 인문학 강좌와 커피 강좌 등 다양한 실무 강좌를 연 일 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다. “그 당시 제가 늘 강조하던 것이 경주는 관광지인데 주민들이 관광객들에게 좀 더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가들에게 관광객들을 위해 화장실을 개방해 달라는 캠페인도 벌였고 자기 상점 앞에 세운 차를 치워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와 동선을 확보하자는 제안도 열심히 했지요” 그런 한편으로 경주의 각 관청들을 시민이나 주민들에게 최대한 내주어야 한다는 제안도 열심히 했다. 동사무소나 면사무소, 시의 각 기관들은 궁극적으로 시민과 주민의 것이니 주민들이 원하면 언제건 개방하고 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점득 회장은 보건직 공무원을 하면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던 것들을 일반 행정직을 수행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접목할 수 있었다고도 회고한다. 이후 서기관으로 진급한 전점득 회장은 2015년 2월 다시 자신의 고향격인 경주보건소로 소장으로 복귀해 2017년 39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했다. 이렇게 경주에서 모든 젊음을 바친 전점득 회장이지만 경주의 오래된 관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유감을 표명한다. 공직에 있을 때나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자신을 이방인 취급하는 모습을 접하면서 서운했고 40년 넘게 경주에서 살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지금도 온전한 경주사람 취급을 못 받고 있어 아쉽다. “경주시의 캐치프레이즈가 ‘아름다운 경주’잖아요. 우리나라 전 국민이 경주를 살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라 느끼게 하려면 경주시민들이 좀 더 넓은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서일까? 어쩌면 전점득 회장이 시대를 막론하고 경주의 여러 곳을 열심히 그리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 경주를 사랑하는 진정한 경주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화폭에 스친 무수한 펜의 궤적들이 훨씬 선명한 느낌으로 가슴에 새겨질수록 경주를 그린 그의 그림이 더 좋아 보인다.
지난 8월 6일 정오 무렵,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10여명 인사들이 모여 작은 추모식을 열었다. 독일출신 음악가로 대한제국이 초청으로 1901년 우리나라에 와 대한제국황실양악대를 이끌며 본격적으로 서양음악을 전하고 이 땅에서 숨진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1852~1916) 선생의 105주기 추모하기 위해서다. 모인 사람들은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의 뒤를 이어 황실양악대대장으로 활약했던 백우용 선생의 손자인 백성빈 씨, 뉴코리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 송재용 단장을 비롯한 오케스트라 관련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태두라 할 수 있는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에 대해 우리나라 국민이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하다는 데 공감하며 우리나라 서양음악사에 일대 반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은 독일 프로이센 지역에서 태어나 해군군악대 수석 오보에 연주자로 복무했다. 그는 27살이던 1879년 3월 일본 도쿄에 해군군악대 교사로 초빙되어 활약했으며 1880년 일본의 하야시 히로모리가 선율을 붙인 기미가요를 현대적으로 편곡했고 이 노래는 1893년 정식 일본 국가로 제정된다. 그러나 이는 기미가요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존심이 반영된 것일 뿐 그해 경성일보 보도에는 선생이 작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이후 일본에서 음악취조괘 교수, 궁내성 아악과 교사, 일본 육군 군악대와 해군군악대 등에 복무한 다음 1899년 3월 만 20년 만에 독일로 돌아간다. 지금도 기미가요는 일본정식 국가로 불리고 있다. 선생이 우리나라에 초빙된 것은 광무5년인 1901년 2월 19일. 대한제국으로부터 군악대 창설과 그 지도를 부탁받은 것이다. 선생은 독일 라이프치히의 악기회사 ‘치머만’에서 관악기 52점을 사와 우리나라 양악대의 악기를 마련했고 3월 29일 고종황제를 만나 양악대 창설을 공식적으로 전교 받는다. 선생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친위대와 나팔수, 고수(鼓手) 등을 대상으로 50명의 대원을 선발하고 한성관립덕어학교 출신 독일어 통영관 백우용(白禹鏞)을 먼저 가르친 후 백우용이 다시 대원들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교육을 시작 3개월 만에 이들 중 실력이 뛰어난 대원 32명을 골라 연주대로 편성한 후 창설 6개월 만인 9월 7일 경운궁에서 각부 대신들과 각국 공·영사 및 외국인들 앞에서 최초로 연주회를 열어 성공적으로 양악대를 선뵈었다. 선생은 이후 고종황제의 명에 의해 광무6년(1902년) 7월 1일 조정의 문관들이 의견을 모은 노랫말에 곡을 붙여 ‘대한제국애국가’를 작곡, 우리나라와 관계된 십여 개 국가에 인쇄·배부하고 8월 15일자 관보에 개재해 우리나라 최초의 흠정국가(欽定國歌)로 탄생시킨다. 같은 해 8월 이후에는 시위기병대 소속의 군악 제2대를 조직했다. 이런 공로로 12월 20일 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한편 시위군악대 연주를 위해 세운 탑골공원 팔모정이 완성되자 광무9년(1905) 3월 16일 각국 주재 공영사와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독일군악대와 교환연주를 열어 한국 군악대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이후 탑골공원 연주는 광무10년(1906년) 두 차례, 융희2년(1908년)에 열렸고 일제 강점으로 중단되었다가 1913년 8월 다시 이어져 1929년까지 열렸다. 이렇듯 탑골공원 팔모정은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를 안은 건축이다.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은 이왕직 양악대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하다 1916년 1월 31일부로 해고되었고 그해 8월 6일 인후암으로 65세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종현천주교당(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열렸고 큰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금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지에 묻혔다. 그의 작품으로는 대한제국애국가, 교주만행진지곡, 결혼피로연 행진곡 엘리자베스, 도쿄의 추억 등이 있고 기생이나 농부의 노래를 듣고 영감, 우리나라 민요에서 영감을 얻어 쓴 여러 곡들이 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우용 선생, 통역사로 출발, 2대 대장 맡아 전재산 투자 양악대와 탑골공원 공연 지켜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의 뒤를 이은 조선인 양악대장 백우용 선생(1883~1930)에 대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백용우 선생은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이 타계한 이후 사재를 털어 양악대를 이끈 독지가로 알려져 있다. 위에 쓴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의 기록에서 보듯 백우용 선생은 1903년 1월, 독일어 통역관으로 양악대에 들어갔으나 자신이 먼저 악기를 배워 이를 전하는 역할을 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당시 초대양악대장은 지금의 대위 계급인 김학수란 무관이 맡았는데 그는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가 병사한 후 1907년 3월 백우용 선생이 제2대 양악대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 양악대는 한일병탄 후 군대인 시위기병대가 해산되면서 황실음악대로 소속이 바뀌었다가 뒤에 이왕직 양악대로 이름이 바뀐다. 그러나 1919년 9월 이왕직 양악대마저 해산되면서 백우용 선생이 사재를 털어 1919년 11월 26일 경성악대를 창설하고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양악대를 운영했다. 마지막 연주 기록이 있는 1929년은 백우용 선생이 타계하기 한 해 전이었음을 보며 선생이 얼마나 양약대에 기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백우용 선생의 손자인 백성빈 씨(82)는 “할아버지가 원래 탑골 공원 옆 낙원동에서 40칸에 이르는 큰집에 사셨는데 양악대를 운영하면서 점점 작은 집으로 옮겨가셨다”고 증언한다. 한편 우리 역사에서 자칫 사라질 뻔했던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이나 백우용 선생을 역사의 뒤안길에서 끈질기게 찾아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최창언 선생이다. -최창언 선생, 건축가로서 프란츠 에케르트 존재를 역사의 전면으로 바로 세워 그런데 최창언 선생은 의외로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중동과 국내 건설현장에서 30여 년을 건축계를 누벼온 전문 건축인이다. 1997년 봄 운현궁 앞 회사 창문 너머로 본 고종·명성황후 국혼례의 장엄하고 격조 높은 의례에 매료되며 대한제국에 관한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근대사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던 시절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다 2000년 대 초에 이태진 교수가 쓴 ‘고종시대 재조명’이란 책을 보고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다분히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의한 인식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연구해 보면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선인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최창언 선생은 다년간의 연구 끝에 2007년에 ‘대한제국의 양악도입과 그 발자취’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를 다시 2010년 음악저널에 나눠 연재해 대중들에게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과 대한제국 양악대를 알렸다. 또 2020년 ‘대한제국의 양악 도입과 그 발자취(가고 없는 제국에 대하여 1)’를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 이 기사에서기술된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과 백우용 선생에 대한 소개 역시 최창언 선생의 기록에서 발췌했음을 밝힌다. -송재용 단장, 탑골공원 공연 복원 3회 공연, 코로나 19로 공연 못해 안타까워 최창언 선생의 기록에 못지않은 성과가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과 백우용 선생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지켰던 양악대 연주의 복원이다. 이 고군분투는 경주출신으로 뉴코리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산파이자 지금까지 이끌어온 송재용 단장에 의해 완성되었다. 송재용 단장은 경주출신 클라리넷을 주자로 독일 베를린 국립음악대학에서 수학한 음악인이다. “제가 단국대학교 음대 교수로 재직하던 1990년 당시 문화공보부에 ‘대한제국국가복원위원회’라는 조직이 외국공관에 보낼 대한제국애국가를 재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단국대학교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동원해 이 노래를 연주했지요” 이후 송재용 단장은 이 노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가 무려 28년 뒤인 2018년 9월, 마침내 뉴코리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끌고 탑골공원에서 대망의 복원음악회를 열었다. 2019년 10월,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 탑골공원대음악회, 경주신문 창사 30주년기념 경주예술의 전당음악회 등에 양악대를 동원해 모두 3번의 연주회를 진행했다. 이들 공연에서 연주단원들은 대한제국양약대가 입은 복장까지 복원해 입은 채 연주를 진행해 복원의 의미를 되살렸다. 아쉽게도 2020년 이후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연주를 멈추고 있다. “프란츠 아케르트 선생이나 백우용 선생에 대한 연구는 음악인들이나 역사가들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데 정작 그 연구는 건축을 전공하신 최창언 선생께서 하셨어요. 이것은 아직도 우리나라 음악문화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특히 송재용 단장은 아직도 우리나라 음악계가 현악기를 더 존중하고 있어 관악기로 이루어진 대한제국양약대에 관한 연구나 연주회 복원이 냉대 받고 있다고 토로한다. “프란츠 에케르트 이전에는 천주교회중심의 하모니카나 풍금수준의 서양음악이었던 것이 대한제국양악대 창설 이후 전문 음악이 탄생했습니다. 양약대 해산 이후 각 방면에서 활동한 대원들이 해방을 전후해 우리나라 현대음악에 끼친 공로는 음악 전 분야에 걸쳐 막중했을 것입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수많은 외국인이 잠들어 있다. 고종황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할 때 도움을 주었던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도 있고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1858-1902),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는데 공헌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1859-1916)도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초중고 교과서에 실리며 그 아름다운 이름을 오래 알리고 있다. 우리나라 음악사에 누구보다 큰 기여를 한 프란츠 에케르트를 그들 못지않게 기억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문화의식이 한층 높아져 있을 것이다.
-‘공포의 외인구단’, ‘장군의 아들’에 영향···! 뉴미디어 시대,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그리다 ! 우연일까? 마침 본지에서 이번 호까지 2회째 ‘나의 책 나의 영화’란이 나가는 중에 ‘영화’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주출신 영화 제작자 ㈜코이픽쳐스(KO2PICTURE) 조상환 대표가 이번호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문자 그대로 영화(映畫), 움직이는 영상의 제작자로서 영화와 광고, 뮤직비디오와 PR FILM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하면서 그 와중에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자 하는 별나고 바쁜 영화인이다. “경주고 시절 만화가 이현세 선배님의 영화 ‘외인구단’을 보며 야구와 영화, 만화까지 좋아했습니다. 거기에다 ‘대왕극장’에서 본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을 보고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종로건달 김두한의 포장되지 않은 한국식 액션. 나라를 위한 의미 있는 결투 그 안에 담긴 사랑, 감동, 눈물···, 피 끓는 청춘이었던 제게 말 그대로 충격이었습니다. 영화문법도 영화이론도 몰랐지만 그냥 이것을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조 대표의 별명은 ‘조필름’이었을 만큼 그는 너무나 당연하게 영화인을 꿈꾼다. 그러나 1993년 고교졸업 후 선택한 학과는 엉뚱하게도 영화 관련 학과가 아닌 당시 인기 있던 호텔경영학과였다. 꿈보다 현실을 택한 채 영화를 만드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전락할 뻔한 몇 년이 흘러버렸다. 그러나 영화를 향한 열정이 쉽게 식을 수 없었다. “27세로 좀 늦게 군에 다녀온 후 1999년 경희대학교 연극영화과 영화연출전공으로 입학해 영화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해야지만 영화인이 될 수 있는 줄 알았거든요!” 조 대표는 그때부터 학업을 병행하며 6년 동안 충무로에서 영화 촬영 스탭, 뮤직비디오·광고CF 촬영감독 등으로 영화의 기본기를 다졌다. 영화산업의 발전가능성과 자신감이 붙은 조대표는 2007년 광고영화제작사인 ‘단군픽쳐스’를 설립하고 같은 해 이를 법인화 한 후 지금의 ㈜코이픽쳐스로 사업을 확장하고 탄탄하게 경영해왔다고 자부한다. 회사를 경영하던 중 영화에 대한 체계적인 학문 정립의 필요성을 느껴 2011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공연영상학과 영화전공에 입학하여 석사를 졸업했고 뒤에 다시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정책 및 기획’을 전공 영화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지금은 ‘뉴미디어시대에 미디어 플랫폼’ 관련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상환 대표가 추구하는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영화의 본질은 삶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단순하고 명확한 형식일 때 강렬하고 진실한 표현일 때 감동스럽지요. 그 삶을 바탕으로 재미있고 진실한 이야기를 쉽고 편안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특히 영화는 공동창작과 종합예술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보다 ‘함께’와 ‘같이’의 가치가 두드러지는 작업인 만큼 그런 의미에서 ㈜코이픽쳐스는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각 파트의 크루(CREW)들이 최고의 장점들을 공유하는 영화제작사라고 소개한다. 영화에 대한 각별한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대학교에서 영화연출, 촬영, 정책 및 기획 전반을 전공한 조상환 대표는 자신의 공부에 걸맞은 다양한 실적을 남기기도 했다. ▷광고CF영상으로는 기아자동차 로체CF ▷방송 드라마로는 케이블 채널 CGV의 프리즈 ▷뮤직비디오로 쥬얼리, 길건, 혜령, 팝핀현준 등 ▷영화로는 스캔들, 그녀를 믿지 마세요, 댄서의 순정, 듀얼리스트 형사, 달콤한 인생, 걸스카우트, 브라보마이라이프, 헨젤과 그레텔, 각설탕, 음란서생 외 다수의 작품에 제작 스텝 및 촬영감독으로 활동했다. 최근에는 매년 4~5편의 웹 드라마를 제작해 광고주들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광역의회 최초의 웹드라마 ‘사랑하면, 조례?!(도상우, 김주영 주연)12부작’을 온라인 세상에 공개하면서 ‘뉴미디어 시대,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그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한편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적 필요에 의해 3개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조 대표의 일상을 올리고 있는 ‘조필름TV’, ㈜코이픽쳐스가 제작하는 웹 드라마, 웹 영화, 웹 다큐, 웹 예능의 콘텐츠를 업 로드하는 ‘코이픽쳐스웹콘텐츠TV’, ㈜코이픽쳐스가 제작하는 PR FILM, 드론 항공촬영 콘텐츠를 업 로드하는 ‘코이픽쳐스TV’ 등으로 경주 사람들의 구독과 좋아요, 댓글 등을 부탁한다. -영화가 좋아 영화 공부를 했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 영화 제작업을 하고 있지만 부귀영화를 위해 영화를 제작 하지 않아 이렇듯 수많은 작품에 참여하거나 제작해 오면서도 조 대표 나름의 영화제작에 대한 마지노선이 있다. “저는 영화가 좋아 영화 공부를 했고, 영화를 제작하고 싶어 영화제작사업을 하고 있지만 부귀영화를 위해 영화를 제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함부로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조상환 대표지만 앞으로 걸어야 할 지향점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K-문화’의 큰 길에 합류해 스스로 개척해가는 것이다. “문화 전파는 정치적, 경제적 전파보다 더 무서운 파급 효과가 있습니다. 코로나로 주춤거리긴 했지만 방탄소년단, 싸이, 많은 아이돌이 이루어낸 K-팝을 필두로 K-드라마, K-필름을 본 외국인들이 한국을 직접 방문하여 K-한류를 접하고 배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K-문화의 세계화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을 비롯 다양하게 한국을 소개하는 K-콘텐츠 영상이 뉴미디어 시대 플랫폼에 더욱 절실하게 필요할 것입니다” 조 대표는 앞으로 ㈜코이픽쳐스의 역량을 통해 이 같은 K-콘텐츠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포부를 드러낸다. 뉴미디어 시대에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 구글(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네이버, 카카오, 틱톡 등 대면이 아닌 비대면 온라인 플랫폼 세상에 탑재 업로드 할 콘텐츠를 준비하며 영화학과 영화현장에서 배운 미쟝센의 깊이를 자신이 만들 K-콘텐츠에 쏟아 넣겠다는 의지다. 그런 한편 조 대표는 자신이 지금까지 공부해온 영화 관련 공부를 우리나라 영화산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넓게는 동·서양 영화의 장단점을 비교해 우리나라 영화발전의 참고자료를 만들고 싶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영화제작, 영화정책세미나, 영상기획연구, 기록영화연구, 작가, 연출, 비평, 영화사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인 정리를 하나씩 해나가고 싶다는 꿈을 밝힌다. 말은 쉽지만 이 엄청난 꿈을 이루려면 몸이 백 개라도 모자랄 것 같다. 경주 출신이라고 ‘신라인’, 영화에 몸담고 있다고 ‘영화인’으로 불리길 좋아한다는 조상환 대표는 자신을 성장시킨 자양분이었던 경주에 대한 보은의 마음이 특히 애틋하다. 모교인 경주고 70주년 때 ‘경주고등학교 홍보영상’을 제작해 무상 기증했고 최근에는 ‘경주중고등학교서울동창회TV’의 실무제작을 맡아 재능기부하고 있다. ‘NG도 OK처럼’이란 표어를 내걸고 서울 동문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를 실시간 온라인 스트리밍 방송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은 조 대표의 실무역량이 든든히 뒷받침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덕분에 고교재학 시절에는 한 번도 들어 가본 적이 없던 교장실에서 커피를 마셔보기도 했고 기라성 같은 동창회 선배님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등 신박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8년이나 늦은 경희대 연극영화과 졸업에 때늦은 서울생활 적응으로 출향인 사회를 돌아볼 틈도 없이 영화만 보고 달려온 조 대표에게 최근의 이런 봉사는 경주를 돌아보는 좋은 경험이 되고 있다. 배워 가며 참여하는 골프 모임 ‘옥돌회’나 군대에서 특기로 쓸 정도로 즐긴 축구로 축구 동아리 ‘FC화랑’에 참여하기도 한다. 영화제작을 한다는 사실을 안 선배들의 부탁으로 동창회 관련 동영상을 재능기부하면서 활동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전공을 ‘경주’라는 이름 속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각별한 의미가 있고 함께 추억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 만족한다. 경주시 외동읍 죽동리 출신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부모님을 가장 존경한다는 조상환 대표. 주말이면 경주시내·외에 위치한 사찰(寺刹)과 산(山)을 찾아다니며 청년시절을 보내며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와 경험이 지금까지 영화를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다고 말하는 조상환 대표. 앞으로 그가 만들 K-콘텐츠에 어떤 한국과 경주가 들어있을지 자못 기대된다.
“제가 2002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로 저희 고려대에 경주출신 고시 합격자들이 많아졌습니다. 나중에 후배한테서 들은 이야기인데, ‘종필형이 합격했는데, 우리도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후배들 사이에 있있다’고 하더군요” 어지간하면 무언가 그럴싸한 치장을 할 법 한데 김종필 변호사는 전혀 그런 게 없다. 고등학교 때 술 마시고 담배 피운 이른바 ‘농띠’였다는 이야기와 3수해서 대학에 갔고 친한 친구의 억지 강요(?)로 처음 치른 1999년 사법시험 1차 시험에서 평균 50점도 못 맞아 자신에게 엄청나게 실망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2차 시험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2002년 월드컵에서 차마 생방송 중계는 못 봐도 호프집에서 하이라이트는 꼭 봤다며 그 덕분에 2차 시험을 치고도 합격에 자신이 없어 다시 1차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고도 회고한다. 김종필 변호사는 이렇게 소탈한 사람이다. 그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은 큰 체격과 무덤덤한 표정을 보며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를 떠올리면서도 그 속에 감추어진 푸근한 인간미와 은근한 열정, 꾸준한 봉사심에 매료된다. -부지런한 변호사, 인간미 넘치는 변호사, 삶을 즐기는 변호사 김 변호사는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법무법인 청운의 대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수료 후 2005년 변호사로 출발했다.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부모님의 바람이기도 했지만 어떤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기본적으로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자유롭고 그때만 해도 선망의 대상 같았지요” 역시 거창한 소명의식이나 사명감 등에 대한 말은 하지 않는다.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공동의 삶이 존재할 뿐이고 변호사 업무는 그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직장일 뿐인 듯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꾸밈없음이 변호사 업무에서는 훨씬 큰 장점으로 드러난다. 특히 김 변호사에게는 다른 변호사들에게 느낄 수 없는 여유가 느껴진다. 열린 마음으로 사건을 대하다보면 사안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는데, 사안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승소를 목표로 하는 변호사에게는 더 없이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변호경험은 오히려 수임료라는 측면에서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노숙자들 사이에도 위계질서란 것이 있더라고요.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다수의 노숙자들이 한 노숙자를 죽인 폭행치사사건이었습니다” 피해자의 어머니 등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유족들을 위해 수임료도 없이 장기간 사건을 맡아 승소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것. 이일로 김종필 변호사가 한 일간지에 소개된 적도 있는데, 노숙인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싱가포르에 있는 컴퓨터 부품 수출회사를 대리해서 신용장 개설은행인 국민은행을 상대로 한 신용장대금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사건도 손꼽는다. 거대 기업으로 여겨지던 국민은행과 그 소송대리인에 맞서, 여러 건의 관련 소송을 함께 진행하면서 대법원까지 무려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한 끝에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 사건이라 머릿속에 뚜렷이 남았다. 특히 김 변호사는 고려대 법무대학원 지적재산권법학과를 수료해 이 방면 소송에 깊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으며 같은 경주출신 패트라 특허법률사무소 대표 황병도 변리사와 오랜 기간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황병도 변리사님은 인품도 훌륭하시지만, 지적재산 분야 이론과 실무에 탁월하셔서 제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또 채무가 많으면서 재산을 빼돌린 채 빚을 갚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떼인 돈을 찾아주는 ‘사해행위소송’에 실력을 발휘한다. 대전에 있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에 7년간 고문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학교가 당사자가 된 여러 건의 소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재경 경주출향인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재경경주향우회 총무로도 다년간 활동해 주요 행사장에서 봉사에 임하는 그를 보는 것이 익숙하다. 2008년부터 경주고 39회 서울동기회 회장으로, 경주중고등학교서울동창회(이하 동창회)에서 간사로 각 활동해왔으며 현 제29대 동창회에서는 동호회 국장을 맡아 활약하고 있다. 산을 좋아해 2014년부터 역시 동창산악회 총무를 맡아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경주발전포럼의 사무국장으로, 2020년에는 동창회 골프 동호회인 옥돌회의 총무로도 활약했다. 골프모임 서라벌회, 축구 모임인 ‘FC화랑’ 등 동호회 회원이기도 하고, 지역 모임인 (서울)남동부모임의 사무국장으로 소임을 다하고 있다. 또한 김 변호사는 틈틈이 사회 봉사활동도 해오고 있는데, 구성원 다수가 경주사람들인 서울대성라이온스클럽 회장을, 그 상급단체인 국제라이온스협회354-A지구 지대위원장을 각 역임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눔의 정신을 실천해왔다. 특히 최근에는 구수한 입담으로 유튜브 ‘경주중고등학교서울동창회TV’에서 3년 선배인 손원락 MC와 함께 진행을 맡고 있다. 여기서 김 변호사는 특유의 여유 있는 경주말과 어눌한 농담으로 시청자들을 고향으로 이끈다. 이제 세 번째 방송이 나갔을 뿐인데 진행자들의 진행 솜씨가 화제로 떠올랐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제가 방송과 영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 TBS교통방송 PD로 근무하고 있던 경주고 한 해 후배인 정경훈 후배로부터 가수 김흥국 씨가 진행하는 코너에서 5분쯤 법률상담을 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비록 라디오 방송이지만 방송출연이 처음이던 김 변호사는 정경훈 PD에게 방송일 전에 미리 김흥국 씨를 만나 소주라도 한잔하면서 낯선 긴장감이라도 누그러뜨린 다음 방송에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김흥국 씨의 바쁜 일정관계로 사전 만남 없이 생짜로 방송에 나가게 되었다고. “5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고 방송이 끝났는데 시쳇말로 ‘폭망’ 그 자체였습니다. 딱 한 번 방송이 나가고 법률상담 코너 자체가 폐지돼 버렸습니다” 김 변호사는 지금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은 모두 익숙하고 든든한 동창회 임원 선후배들이 함께 진행을 맞고 있는데다 보는 사람들도 대부분 친근한 동문들이고 경주 사람들이라서 아주 편하게 방송할 수 있다고. 실수해도 용납되고 서툴러도 무한대의 격려를 해주니 인기 방송인 부럽지 않다며 만족감을 표시한다. -향우회, 동창회 등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부정적 인식 버려야. 밑천이자 사회의 일부! 김 변호사는 그런 한편 역시 경주고 동창회건 향우회건 연령대가 낮을수록 행사에 후배들의 참여가 저조하다며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한다. “동창회나 향우회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나 부정적 인식으로 참석하지 않는 분들이 가끔 동창회나 향우회 특정 인사들의 연락처를 묻거나 해당 인사들과의 자리를 부탁하면 그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합니다. 동창회와 향우회도 사회의 일부고 우리 삶의 밑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자신 동창회나 향우회에 참여하면서 사건을 의뢰하는 동문과 향우들이 꽤 늘어났다는 김 변호사. 그런 보답을 기대하고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만남 그 자체에서 느끼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안도감과 행복감 이외에도 덤으로 업무상 도움까지 생기니 보람이 더 크다. 또 한편 김 변호사는 후배들이 의외로 모임에 대해 잘못 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며 오해를 바로 잡을 필요도 역설한다. “많은 후배들이 모임에 나오면 선배들 때문에 불편하다거나 궂은일을 도맡아 고생만 하고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다고 여깁니다. 젊은 회원이라면 단 한 사람이라도 귀한 요즘 그럴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향우회나 동창회 차원에서도 가능한 많은 구성원들이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행사 진행이나 구성을 과감히 바꿀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청도가 고향인 김종필 변호사는 2007년 아버님께서 작고하신 이래 홀로 남아 오래된 과수원을 가꾸어 오시다가 최근에는 과수들을 정리하고 새로이 샤인머스켓 포도농사를 시작하신 어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 고향에 가곤 하지만 생각만큼 자주 가지질 않는다며 숙연해한다. 가능한 자주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하는 것이 또 하나의 꿈이라며 이런 꿈을 꿀 수 있도록 내조해준 아내 손미영에게 이 지면을 빌어 인사하고 싶다고도 했다. 청도가 유년의 추억을 품은 요람기라면 김종필 변호사에게 경주는 ‘인생에 눈을 뜨기 시작한 곳’이다. “경주고로 진학하면서 넓은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이 경주사람입니다. 지금도 경주를 벗어난 인생은 생각하기 어렵지요. 이 인터뷰에 등장한 경주고 동문만 해도 몇 명입니까?” ‘열정, 자유 그리고 낭만’을 삶의 모토로 정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말을 되뇌며 삶에 대한 애정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긍정적이고 즐겁게 살아가고자 한다는 김종필 변호사, 그의 우직하면서도 선해 보이는 웃음 속에 삶의 지혜가 역시 은근히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