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 주       남편 따라 하늘의 별이 된 부인 경주시 양남면 지곡마을에 세워져 있는 ‘정열부유인밀양박씨정려비각(旌烈婦孺人密陽朴氏旌閭碑閣)’은 후손들의 정성스러운 관리 아래 효행과 열행 사상을 널리 전하고 있다. 양남면 나산리 784번지에 위치한 이 비의 비문에는 열녀 밀양박씨의 시부모에 대한 효행과 남편을 향한 열행에 관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에 따르면 박씨의 본관이 밀양으로, 최원태의 부인이다. 열부 박씨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며 친척 간에 화목해 향리와 친지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남편이 병으로 일찍 돌아가자 부인은 자신의 슬픔을 숨기고 아들 잃은 시부모를 생각해 성심을 다해 섬기며 위로하며 곡성(哭聲)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박씨 부인은 3년상을 치른 후 가족들 몰래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같은 소문을 전해 들은 어사 박문수가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조정으로부터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그 후 열부에 대한 공적이 크고 높아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이 등재됐다. 또 박씨 부인이 목숨을 끊을 때 3세와 5세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부윤 송전이 이 사실을 듣고 식량과 간장 등을 보내어 돕게 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정려각은 밀양박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순조 2년(1802년)에 정려로 명을 받아 2년 후인 1804년 마을 어귀에 세웠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980년대 문중에서 지곡마을 입구에 이 정려각을 중건했다. 또 정려각 옆에는 박씨 부인의 열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안내판도 세워 밀양박씨의 열행을 귀감으로 삼고 있다.     손가락 베어 남편 살린 열부 이야기 강동면 다산리에 청안이공과 열부 순흥안씨 내외간의 무덤과 그 중앙에 세워진 비가 있다고 한다.   죽당처사청안이공 열부유인순흥안씨지비(竹堂處士淸安李公 烈婦孺人順興安氏之碑)다. 이 비에 관한 이야기는 본지 제166호(1993년 5월 3일자)에 보도된 바 있다. 다만, 비가 세워진 현장을 찾진 못했다. 본지 기록에 따르면 비각 없이 비신(碑身)만 세워져 있다. 열부 순흥안씨는 1898년 태어나 17세에 출가했다. 남편 청안 이공(淸安 李公)이 18세에 이르러 병이 들었고, 안씨 부인은 지성을 다해 간병했다. 하지만 효성이 모자라서인지 남편은 전신이 오므라들며 말을 못하고 심한 고열에 정신이 혼미해지며 병의 증상이 심상치 않았다. 이때 안씨 부인은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남편의 뒤를 따를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는 한밤중에 정신을 가다듬고 부엌칼로 왼손 무명지를 잘라 흘러내리는 피를 남편에게 먹였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새우니 신기하게도 환자의 호흡이 고르게 통하고, 얼굴색이 밝아지면서 안면에 혈색이 살아났다. 남편은 전신에 온기가 돌아오면서 차차 회복됐다. 안씨 부인은 자신의 피를 남편에게 먹인 사실을 숨기고 약물의 효험이라 했다. 하지만 사실을 오래 감출 수는 없게 되니, 오히려 손가락을 자를 때와는 달리 심히 당황해했다. 이 같은 부인의 지극정성은 곧 일가친척을 경탄하게 했다. 또 이 같은 열행을 알게 된 사람들은 부인의 효열행실을 선성묘유림향약본소(先聖廟儒林鄕約本所)에 알리어 공부자성적도오륜행실삼강록(孔夫子聖蹟圖五倫行實三綱錄) 등에 게재했다. 1916년에는 효열부포장완의문책(孝烈婦褒漳完議文册)에 열행을 기록하고, 효열부포창을 받게 됐다. 이 비는 1982년 맏사위와 장손이 주관해 세웠다.     인동장씨 형제의 충효 사상 기려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 소재한 것으로 알려진 인동 장씨 형제의 충효정려비. 비문에는 부승지인동장공·선전관인동장공 충효정려비(副承旨仁同張公·宣傳官仁同張公 忠孝旌閭)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본지 152호(1993년 1월 18일자)와 경북도의 ‘비지정건조물목록’에 나와 있는 2곳의 주소지 일원을 탐색했지만 이 비각을 찾지 못했다. 이에 본지가 당시 보도했던 기록으로 이들 형제의 충효 사상을 되새겨본다. 이 충효비는 장원기·장원국(張元紀·張元國) 형제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때 세워졌다. 이들 형제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해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지성을 다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3년 동안 죽만 먹고 소금과 장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하면서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일찍 일어나 아침 문안을 올리고, 무덤 주위를 쓸고, 봉분의 잡초를 뽑으며 주위에 아름다운 꽃을 심어 가꿨다. 하루 세끼 상을 올리며 곡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친 후에도 상복을 3년이나 더 입었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들 형제는 의병에 참가해 백척간두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금산·창녕 등지의 전투에서 수많은 왜적을 무찔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선조 임금은 이 같은 장씨 형제의 행적을 듣고 정려를 명했다.     두 차례 자리를 옮긴 ‘효자리비’ 이 비는 근대까지 경주중·고등학교 동편에 위치해 있던 것을 경주시가 두 차례 이건했다. 비각 없이 도로변에 자리한 비석은 자동차 통행이 늘어나면서 훼손 위험이 높아지자 황성공원 국궁장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최근에는 경주읍성으로 재차 이건했다. 이 비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글씨는 거의 닳아 알아볼 수 없었다. 앞면에 효자리(孝子里) 세글자는 선명히 남아 있어 효자비임을 알 수 있다. 과거 본지 기록에는 조선 태종 때 남득온(南得溫)이라는 사람이 어머니 묘에 3년 동안 시묘한 효행을 기려 정려하고 세웠다는 짧은 기록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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