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충효영일정공돈익지비(忠孝迎日鄭公敦翼之碑) 경주시 감포읍 전촌1리 마을 가운데 한옥 구조로 오랜 세월의 흔적이 확연한 충효각(忠孝閣) 한 채가 보인다. 조선시대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했던 정돈익(鄭敦翼) 선생을 기린 비각이다. 비문에는 ‘충효영일정공돈익지비(忠孝迎日鄭公敦翼之碑)’가 새겨져 있다. 이곳 충효각 현장을 살펴보니 정문은 파손된 채 굳게 잠겨 있었으며, 안으로 보이는 비각과 담장 등은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 속에서도 기품있는 비석은 오랜 시간 이 마을을 지키고 서서 정돈익 선생의 효(孝)와 충(忠)의 얼을 전하고 있다. 비문의 해석에 따르면 정돈익은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의 16세손으로 조선시대 말기의 인물이다. 집이 가난했으나 어렸을 때부터 남의 일을 잘 돕고 부모님에게 효성이 지극했다. 여름철 날씨가 더울 때면 부모님의 베개와 이부자리를 부채질 해 시원하게 해드렸고, 추운 겨울이면 자기 몸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드렸다. 엄동설한에 자기 몸에는 온전한 옷을 두르지 못해도 부모에게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갑자기 앓아 눕게 됐다. 정공은 걱정이 돼 거의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지경이었다. 밤이 되면 뜰 가운데서 머리를 조아려 아버님의 병이 낫기를 하늘에 빌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세는 갈수록 심해 혼수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정공은 생각다 못해 왼쪽 무명지를 깨물어 아버지의 입에 피를 흘려 넣었다. 한참 있으니 신기한 효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사불성이던 아버지가 차차 의식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하늘이 도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돈익은 정말 효자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회생한 아버지는 몇 달을 더 사시다가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정공은 몹시 슬퍼 울었다. 너무 울어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정공은 아버지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마치 부모가 살아 계실 때와 같이 3년 동안 모셨다. 무덤 옆에 살면서 손수 밥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상을 올렸고, 추운 겨울에도 홑 상복만을 입고 묘 앞에 엎드려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간혹 이를 본 사람들이 위로의 말이라도 하면 “나무가 조용히 서 있고 싶어도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 싶어도 그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흘러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세월이고, 돌아가시매 따라갈 수 없는 것은 부모이다”라고 했다. 정공은 부모님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너무나도 아쉬워했던 것이다. 정공은 3년을 하루같이 무덤가에서 지냈지만 조금도 외롭다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날마다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무덤 주위를 맴돌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을 해치는 일이 전혀 없어 세인들은 아마도 산신령이 정돈익의 효성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신기해했다. 이 소문이 조정에 전해지자 임금은 즉시 곡식과 비단을 상으로 내려 돈익의 효행을 표창하고, 비각을 세워 그 효행을 기리도록 했다. 이 때가 1881년이었다. 정돈익은 순조 임금 승하 후에 3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경종 임금의 승하 후에는 국장 시 사역에 자진 참여하는 충절을 보였다고 전한다.       열부 하학노처 월성이씨정려비 기림사로 들어가는 길목인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296-3번지에 후손들의 정성으로 잘 정비된 열녀각이 보인다. 열부 하학노처 월성이씨정려비(烈婦 河學魯妻 月城李氏旌閭碑)다. 이 정려각은 진주하씨 사직공 25세인 하학노의 부인인 월성이씨의 열녀비각이다. 후손들이 2018년 열녀각을 중건하면서 비각 앞에 세워놓은 안내문에는 이렇게 새겨져있다. ‘이씨 부인은 일찍부터 효성이 지극해 칭송받아왔으며, 남편이 중병으로 백약이 무효한지라 ‘단지주혈(斷指注血)하고 할육복지이(割肉服之而) 하여 회소(回甦)’ 시켰다. 즉,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게 하고 살갗을 베어 약으로 드시게 하여 회생하게 했다.     지극정성으로 회생한 남편은 무병장수(79세)했고, 남편이 돌아가시자 이씨 또한 그 뒤를 따랐다.(73세) 이 사실을 안 조정(철종 15년, 1864년)에서 정려를 내려 세인들의 귀감이 되게 했다.   이 열녀비는 양북면 호암리 202번지에서 2018년 11월 현 위치인 호암리 296-3에 중건했다.     본지 160호(1993년 3월 22일자) 보도에는 월성이씨 부인의 열행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돼있다.   이에 따르면 하학노의 처 이씨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엄격한 가정교육과 충효를 바탕으로 한 부덕(婦德)을 닦은 규수였다. 효성이 지극해 시부모님의 뜻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고, 일가친척을 화목하게 만들었다. 남편 하씨가 난치병에 걸려 신음하다 사경을 헤매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남편에게 수혈했다. 그러나 효험 없이 또다시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고 다시 예리한 칼로 자신의 허벅다리 깊은 살을 베어 내 다려서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여 남편에게 먹였다. 그러자 하늘이 이씨 부인의 열행에 감동했다. 생사불명이던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회생한 것이다. 이후 이씨부인은 되살아난 남편과 일생을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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