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연령은 과거에 비해 놀랍도록 젊어진 반면 정년은 오히려 앞당겨진 세태 속에서 은퇴 후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노년의 삶이 단순하고 따분할 수도 있고 다채롭고 즐거울 수도 있다. 늦게 배운 펜화로 인생 후반전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전점득 한국펜드로잉협회 회장의 특별한 인생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경주보건소 소장 출신의 전점득 회장은 은퇴 후의 삶을 놀라운 예술적 재능으로 화려하게 꾸며가는 보기 드문 미술인이다.
-70년 대 이전 경주 모습, 경주의 오랜 교회, 독도, 임진각 철마 등 이슈성 있는 작품들 즐겨 그려 8월 17일부터 27일까지 포항의 경상북도교육청문화원 1층에서 제9회 한국펜드로잉작가협회전이 열린다. 여기에 경주의 전점득 회장의 작품 2점도 함께 전시된다.
놀라운 펜화 솜씨로 경주의 오래전 모습이나 경주의 유서 깊은 여러 교회들, 독도 그림 등을 그려 올리며 경주지역 SNS 활동가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해온 전점득 회장. 그가 최근 들어 이룬 미술적 성취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만큼 대단하다. 환경미술대전 우수상, 신라미술대전 특선, 포항불빛대전 입선 등은 2020년 수상 내역이다. 독도문예대전 미술부분 특선, 포항불빛대전 특선은 2021년 올해 거둔 성과다.
전문작가에 대해 이런 수상경력을 쓰는 것은 상투적이라 할 수 있지만 전점득 회장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이런 수상경력만 보면 최소한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거나 10여년은 좋게 공을 들인 후의 성취라고 보기 십상이다. 혹은 어릴 때 미술을 탐구하다가 이런 저런 형편으로 미술을 중도에 포기하고 생업에 충실했다가 은퇴 후 뒤늦게 자신의 길을 되찾은 것으로 지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전점득 회장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다.
“펜화를 시작한 것은 2017년 공직에서 은퇴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어렸을 때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고 특별히 미술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해 본 적 없습니다. 상을 타게 된 것은 펜화 시작하고 3년째부터인 셈이지요”
물론 미술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직생활하면서 13년간 틈틈이 취미활동으로 즐긴 서각(書刻) 실력으로 고운서예대전과 영일만서예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했을 만큼 경지에 올라있었고 서각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서예 공부를 한지도 몇 년 되었다. 그러나 펜화와는 아무래도 분야가 다르다. 감추어진 미술적 재능을 전점득 회장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다가 은퇴 후에 비로소 그것을 찾은 것이라 설명할 수밖에 없다.
다만 전점득 회장은 자신의 빠른 성취에는 스승인 허진석 화백의 지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강조한다. 은퇴 후 일주일에 2차례 허진석 화백의 지도를 받기 위해 꾸준히 포항의 화실을 쫓아다닌 것이 지금처럼 펜화를 그리게 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펜화에 자신이 붙은 후 전점득 회장이 그린 작품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30여 점에 이른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계림과 월지(안압지), 경주 봉황대, 서출지 등의 오래 전 모습을 사진에서 살려내 작품으로 그린 것이다. 눈을 얹은 채 묵묵히 드리워진 계림의 오래된 괴목, 수면과 맞닿을 듯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월지의 임해전, 연밭이 무성하기 전의 서출지,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 있고 능 위로 산책로가 나 있던 봉황대 등 70년 대, 경주가 개발되기 이전의 유적들이 품었던 모습을 다시 살려낸 그림은 SNS상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물론 과거에만 집착하지 않고 경주의 지금 모습도 즐겨 그린다. 양동마을과 경주 읍성, 오래된 경주의 어느 고택 등도 그의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또 하나 전점득 회장의 눈길을 끝 작품은 경주의 유서 깊은 교회들을 그린 작품들이다. 경주 문무대왕면의 봉길교회와 산내면의 의곡교회를 그려 해당 교회에 증정한 것이 그 예.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경주제일교회 장로이기도 한 전점득 회장은 앞으로 경주의 오래 된 교회는 물론 전국의 유명한 교회를 그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다. 전회장의 이런 마음은 그가 그린 ‘활짝 웃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즐겁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경주 제일교회가 시작한 3.15경주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기획을 맡은 기억도 교회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꿈의 동기다.
그런 한편 의식적으로 사회성 있는 이슈를 다루며 시대적인 소명에 함께 동참하려는 노력도 기울인다. 우리나라 땅 독도를 그려 올림픽과 관련된 일본의 망동을 경계하기도 했고 녹쓴 채 멈추어 있는 임진각 철마를 그려 최근의 남북한 정서를 의미심장하게 전하기도 했다. 제주 올레길 5코스에 연출된 정글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한반도의 풍경을 옮긴 것은 40년 가깝게 공직자로 살아온 전점득 회장이 대한민국에 바친 작품일지도 모른다.
-보건직 공무원으로 경주와 인연, 월성동장, 중부동장, 보건소장 역임 후 경주 그림 그리는 진정한 경주사람 참외와 자두로 유명한 경북 성주 출신인 전점득 회장은 1977년 보건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군 전역 후인 1979년 경주시 보건소에 근무하면서 경주사람이 됐다. 보건직 공무원인 만큼 대부분의 공직생활을 보건소에서 근무하며 우리나라 보건역사를 함께 했다. 근무 중 기억나는 일로 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 당시 보건소 식품위생계에 근무하며 밤 12시까지 경주 일원의 요식업소를 감찰하며 위생점검과 영업시간 단속 등 올바른 요식문화안착에 공들인 경험, 2000년 대 이후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 등 다양한 전염성 질병에 맞서 일선에서 보건전쟁을 치르던 경험 등을 손꼽는다. 그런 그가 최근의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긴다.
“우리나라 방역 시스템은 최근에 갑자기 마련된 것이 아니고 국제적인 전염성 질환들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체계적으로 보강되어 왔습니다. 현정부가 다른 나라에 비해 초동방역에 성공적이었던 것은 기존의 시스템이 안착된 결과입니다. 그걸 두고 잘 했네 못 했네 시비걸기 보다는 서로 힘을 모아 당면한 문제들을 현명하게 처리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보건직이 전문이었지만 전점득 회장은 일반 행정업무에도 발군의 기량을 과시한 바 있다. 2005년 8월부터 현곡면장을 지냈고 이어 보건위생과장으로 보건소에 복귀했다가 월성동장, 중부동장을 연이어 맡았다. 월성동 동장 재직시 발굴작업으로 어지러웠던 쪽샘 일대에 메밀밭은 조성해 관광자원으로 삼았고 메밀묵 팔아 남긴 자금으로 월성동 내 어려운 이웃들을 도운 일, 청보리 심기로 방송을 타며 화제를 모은 일, 중부동장 시절 상가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김윤근 선생, 조철제 선생 등을 모시고 인문학 강좌와 커피 강좌 등 다양한 실무 강좌를 연 일 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다.
“그 당시 제가 늘 강조하던 것이 경주는 관광지인데 주민들이 관광객들에게 좀 더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가들에게 관광객들을 위해 화장실을 개방해 달라는 캠페인도 벌였고 자기 상점 앞에 세운 차를 치워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와 동선을 확보하자는 제안도 열심히 했지요”
그런 한편으로 경주의 각 관청들을 시민이나 주민들에게 최대한 내주어야 한다는 제안도 열심히 했다. 동사무소나 면사무소, 시의 각 기관들은 궁극적으로 시민과 주민의 것이니 주민들이 원하면 언제건 개방하고 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점득 회장은 보건직 공무원을 하면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던 것들을 일반 행정직을 수행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접목할 수 있었다고도 회고한다. 이후 서기관으로 진급한 전점득 회장은 2015년 2월 다시 자신의 고향격인 경주보건소로 소장으로 복귀해 2017년 39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했다.
이렇게 경주에서 모든 젊음을 바친 전점득 회장이지만 경주의 오래된 관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유감을 표명한다. 공직에 있을 때나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자신을 이방인 취급하는 모습을 접하면서 서운했고 40년 넘게 경주에서 살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지금도 온전한 경주사람 취급을 못 받고 있어 아쉽다.
“경주시의 캐치프레이즈가 ‘아름다운 경주’잖아요. 우리나라 전 국민이 경주를 살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라 느끼게 하려면 경주시민들이 좀 더 넓은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서일까? 어쩌면 전점득 회장이 시대를 막론하고 경주의 여러 곳을 열심히 그리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 경주를 사랑하는 진정한 경주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화폭에 스친 무수한 펜의 궤적들이 훨씬 선명한 느낌으로 가슴에 새겨질수록 경주를 그린 그의 그림이 더 좋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