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계 문익점’ 대한민국 탁구 역사의 산 증인, 수차례 아시안게임·올림픽 금메달 신화!! 강문수 감독은 1985년부터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후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탁구 국가대표 총감독을 수행하기까지 가장 오랜 기간 국가대표 탁구팀을 이끌어왔고 대한탁구협회 전무, 부회장 등 핵심요직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탁구를 지켜온 버팀목이었다. 이 과정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32년 만에 일본을 넘어서며 유남규·김택수 선수조가 역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 유남규 선수는 남자 단식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이 무렵 강문수 감독은 당시 우리 선수들이 마크5라바를 주로 쓴 대 비해 국제적으로는 RITC라바가 대세라는 점을 알고 중국과 홍콩 등으로 직접 다니며 어렵게 라바를 구해와 ‘탁구계의 문익점’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런 노력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애제자 안재형 선수와 유남규 선수가 남자 복식조 동메달을 땄고 개인전에서는 우리끼리 결승을 치러 유남규 선수가 대망의 금메달을 김기택 선수가 은메달 따며 영원한 탁구 영웅들로 등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현재 대한탁구협회회장이자 IOC위원으로 활동하는 유승민 선수는 강문수 감독이 삼성생명 탁구단 감독으로 활동하던 30년 시간이 만들어낸 가장 빛나는 금자탑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단체전에서 동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단체전 은메달을 각각 따낸 유승민 선수는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IOC 선수위원으로 선발되며 한국 탁구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2019년 6월 이후 대한탁구협회회장에 선출되었다. 강문수 감독은 유승민 선수가 IOC위원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협회장이 될 수 있도록 산파역할을 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김완, 김기택, 안재형, 이철승, 박미영, 주세혁 등 탁구계에서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강문수 감독의 국가대표 혹은 삼성생명 소속 애제자들이고 지금은 그 계보를 대한항공 신유빈 선수 등이 다시 잇고 있다. -마부작침, 마지막 1도를 끌어 올려 최고로 만드는 것이 지도자의 길, 코칭 스텝에 대한 예우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그렇다면 과연 강문수 감독의 어떤 지도 방법이 이 많은 선수들과 함께 해왔을까? “기본적으로 선수의 재능과 노력 간의 사이를 90:10으로 봅니다. 90%는 재능입니다. 탁구를 좋아하고 심취하고 즐기고 잘 하는 선수들을 어릴 때 발굴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100%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도자가 그 10%를 채워줌으로써 비로소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강문수 감독은 선수들의 역량이 최대한 발현되는 것은 물과 같다고 비유한다. “물은 99도에 가도 끓지 않습니다. 그러나 100도가 되면 끓습니다. 그 최후의 마지막 1도를 더하는 것이 지도자의 몫이지요” 강문수 감독은 바로 그 1도를 높이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구하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선수들을 지도했다고 설명한다. “내가 지도하는 모든 선수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주문이 있습니다. 그게 원모어(one more), ‘한 번 더’ 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체력과 연습 없이는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극한의 훈련을 이겨내고 거기서 단 한 번이라도 더 뛰고 볼 박스를 쳐내는 것이 선수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지요!” 강문수 감독은 선수들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금과옥조인 마부작침(摩斧作針)을 떠올린다. 도끼를 갈아 날카로운 침을 만드는 심정으로 선수를 단련하고 깨우쳐 최고의 선수로 키운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 우리나라 탁구의 현실, 특히 엘리트 위주의 선수 운영 상 선수에 대한 육성책이 중국에 비해 현격히 차이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여건상 엘리트 선수 위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기에는 전반적인 여건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너무 열악합니다. 특히 중국은 스폰서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특정 외국 선수를 이기거나 선수 개개인에 설정한 목표를 이루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충분히 해줍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최고의 에이스 선수만 대접받고 아시안 게임과 세계선수권, 올림픽 정도의 국제대회 성적만으로 보상 받는 정도지요” 여기에 코칭스텝에 대한 인식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열학하다는 점도 지적하며 이에 대해 장기적인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중국은 선수와 코치가 1:1 훈련으로 집중도가 높아졌고 일본도 개인코치 위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감독 아래 코치 한 명이 2~3명의 선수를 돌보는 형편이지요. 우리나라 탁구는 선수에 비해 지도자를 너무 소홀히 여기다보니 과거 스타 선수들은 자신의 스타성에 만족해 어려운 지도자 생활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독일이나 일본, 야구나 축구처럼 우리도 스타 감독을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호인 120만 명, 우리나라 최대의 생활스포츠인 탁구이지만 유명 선수는 알아도 그들을 키운 강문수 감독 같은 세계 탁구계의 마에스트로를 모르는 일은 아이러니다. 명감독 밑에 명선수가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는 탁구라고 예외가 아닐 것인데 아직도 탁구계에서 감독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강문수 감독은 중국과 일본, 체력 좋은 유럽 등 정글 같은 세계 탁구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려면 지도자에 대한 대접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29세에 삼성생명 감독으로 부임 34년 동안 전무후무한 무려 51%의 우승률을 기록했고 국가대표 감독으로 만19년, 이후 총감독과 탁구협회 부회장을 맡으며 대한민국 탁구사를 온몸으로 지탱해 온 강문수 감독. 선수들에게 승리를 독려하고 메달 획득을 주문한 만큼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노메달로 돌아왔을 때는 총감독으로서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다 공황장애에 시달리기도 했다. 냉정한 승부의 세계, 강문수 감독 같은 명장에게는 그 만큼 뼈아픈 일이었다. -‘명장의 방패, 불굴의 검! 백전노장의 투혼’, 경주라면 발 벗고 나서는 애향심도 으뜸 !! “이제는 정말 힘들어요. 체력이 예전만 같지 않아는 것을 실감하지요. 대한항공이 감독으로서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니까 더 애착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침 지난 주 강문수 감독의 인터뷰가 나간 후 강문수 감독의 경주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엄기백 전 KBS PD로부터 강문수 감독을 염려하는 전화가 왔다. “강문수 감독은 최고의 승부사잖아요. 탁구 경기장은 그들에게는 전쟁터 같은 곳이고요. 그 전쟁터에 자신을 몰아넣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것인지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엄기백 감독은 친구로서 강문수 감독에게 고만 은퇴하라고 조언했노라 말했다. 기자가 보기에는 70세에 대한항공 감독을 맡아 세계 유수의 팀과 맞붙는 강문수 감독이나 70세에 배우라는 또 다른 도전을 감행하는 엄기백 감독이 제각각 ‘명장’이라는 방패를 들고 ‘불굴’이라는 검을 쥔 채 창칼 번뜩이는 날 선 전쟁터를 누비는 ‘백전노장’에 다름 아닌데 말이다. 한편 강문수 감독은 워낙 바빠 참여하기 힘들었을 뿐, 경주와 관련한 일에는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는 체육인으로도 유명하다. 한창 인터넷 카페가 활성화 될 2006년 2월에는 경주고 경주여고 연합카페 탁구교실을 삼성생명 탁부단에서 열어 이철승 코치를 비롯 유승민, 주세혁 선수 등 당대 탁구영웅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고 최양식 시장이 경주시장 재임시 근화여고에서 열린 생활체육탁구동호인 체육대회에서 지도도 해주었다. 경주의 김석기 의원과는 중학교 때 탁구를 같이 한 사이로 선거유세 때 유남규, 현정화 선수 등 탁구 영웅들과 함께 유세를 돕기도 했다. 만화가 이현세 화백, 경주중고 서울동창회장을 지낸 이지태 ㈜한보ENC 사장, 현 경주향우회 수석부회장인 ㈜에이스 공조 박성환 사장 등 후배들과 막역해 서로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강문수 감독은 경주중학교에서 탁구부로 활동하며 탁구와 인연을 맺었고 경주고등학교 2학년 초에 탁구부가 해체되면서 대구중앙고로 전학해 전국고교친선탁구대회에서 우승하며 탁구유망주로 성장, 고3때 실업팀인 전매청에 입단했고 이어 경기대학교로 진학, 교직을 이수하며 지도자로 활약할 준비를 시작했다. 공군입대 후 정식 국가대표가 되어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활약했다. 제대 후에는 경기대학교에 복학해 교사자격증을 딴 후 1979년 제일합섬에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83년과 1984년 연이어 제일합섬 남자탁구단을 우승으로 이끈 후 1985년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활약했다. 2020년 본지와 자서전을 내기로 협의했으나 코로나19상황으로 인해 일정이 연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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