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6일 정오 무렵,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10여명 인사들이 모여 작은 추모식을 열었다. 독일출신 음악가로 대한제국이 초청으로 1901년 우리나라에 와 대한제국황실양악대를 이끌며 본격적으로 서양음악을 전하고 이 땅에서 숨진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1852~1916) 선생의 105주기 추모하기 위해서다.
모인 사람들은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의 뒤를 이어 황실양악대대장으로 활약했던 백우용 선생의 손자인 백성빈 씨, 뉴코리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 송재용 단장<인물사진>을 비롯한 오케스트라 관련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태두라 할 수 있는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에 대해 우리나라 국민이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하다는 데 공감하며 우리나라 서양음악사에 일대 반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은 독일 프로이센 지역에서 태어나 해군군악대 수석 오보에 연주자로 복무했다. 그는 27살이던 1879년 3월 일본 도쿄에 해군군악대 교사로 초빙되어 활약했으며 1880년 일본의 하야시 히로모리가 선율을 붙인 기미가요를 현대적으로 편곡했고 이 노래는 1893년 정식 일본 국가로 제정된다. 그러나 이는 기미가요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존심이 반영된 것일 뿐 그해 경성일보 보도에는 선생이 작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이후 일본에서 음악취조괘 교수, 궁내성 아악과 교사, 일본 육군 군악대와 해군군악대 등에 복무한 다음 1899년 3월 만 20년 만에 독일로 돌아간다. 지금도 기미가요는 일본정식 국가로 불리고 있다.
선생이 우리나라에 초빙된 것은 광무5년인 1901년 2월 19일. 대한제국으로부터 군악대 창설과 그 지도를 부탁받은 것이다. 선생은 독일 라이프치히의 악기회사 ‘치머만’에서 관악기 52점을 사와 우리나라 양악대의 악기를 마련했고 3월 29일 고종황제를 만나 양악대 창설을 공식적으로 전교 받는다. 선생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친위대와 나팔수, 고수(鼓手) 등을 대상으로 50명의 대원을 선발하고 한성관립덕어학교 출신 독일어 통영관 백우용(白禹鏞)을 먼저 가르친 후 백우용이 다시 대원들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교육을 시작 3개월 만에 이들 중 실력이 뛰어난 대원 32명을 골라 연주대로 편성한 후 창설 6개월 만인 9월 7일 경운궁에서 각부 대신들과 각국 공·영사 및 외국인들 앞에서 최초로 연주회를 열어 성공적으로 양악대를 선뵈었다.
선생은 이후 고종황제의 명에 의해 광무6년(1902년) 7월 1일 조정의 문관들이 의견을 모은 노랫말에 곡을 붙여 ‘대한제국애국가’를 작곡, 우리나라와 관계된 십여 개 국가에 인쇄·배부하고 8월 15일자 관보에 개재해 우리나라 최초의 흠정국가(欽定國歌)로 탄생시킨다. 같은 해 8월 이후에는 시위기병대 소속의 군악 제2대를 조직했다. 이런 공로로 12월 20일 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한편 시위군악대 연주를 위해 세운 탑골공원 팔모정이 완성되자 광무9년(1905) 3월 16일 각국 주재 공영사와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독일군악대와 교환연주를 열어 한국 군악대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이후 탑골공원 연주는 광무10년(1906년) 두 차례, 융희2년(1908년)에 열렸고 일제 강점으로 중단되었다가 1913년 8월 다시 이어져 1929년까지 열렸다. 이렇듯 탑골공원 팔모정은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를 안은 건축이다.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은 이왕직 양악대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하다 1916년 1월 31일부로 해고되었고 그해 8월 6일 인후암으로 65세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종현천주교당(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열렸고 큰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금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지에 묻혔다. 그의 작품으로는 대한제국애국가, 교주만행진지곡, 결혼피로연 행진곡 엘리자베스, 도쿄의 추억 등이 있고 기생이나 농부의 노래를 듣고 영감, 우리나라 민요에서 영감을 얻어 쓴 여러 곡들이 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우용 선생, 통역사로 출발, 2대 대장 맡아 전재산 투자 양악대와 탑골공원 공연 지켜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의 뒤를 이은 조선인 양악대장 백우용 선생(1883~1930)에 대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백용우 선생은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이 타계한 이후 사재를 털어 양악대를 이끈 독지가로 알려져 있다. 위에 쓴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의 기록에서 보듯 백우용 선생은 1903년 1월, 독일어 통역관으로 양악대에 들어갔으나 자신이 먼저 악기를 배워 이를 전하는 역할을 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당시 초대양악대장은 지금의 대위 계급인 김학수란 무관이 맡았는데 그는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가 병사한 후 1907년 3월 백우용 선생이 제2대 양악대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 양악대는 한일병탄 후 군대인 시위기병대가 해산되면서 황실음악대로 소속이 바뀌었다가 뒤에 이왕직 양악대로 이름이 바뀐다. 그러나 1919년 9월 이왕직 양악대마저 해산되면서 백우용 선생이 사재를 털어 1919년 11월 26일 경성악대를 창설하고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양악대를 운영했다. 마지막 연주 기록이 있는 1929년은 백우용 선생이 타계하기 한 해 전이었음을 보며 선생이 얼마나 양약대에 기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백우용 선생의 손자인 백성빈 씨(82)는 “할아버지가 원래 탑골 공원 옆 낙원동에서 40칸에 이르는 큰집에 사셨는데 양악대를 운영하면서 점점 작은 집으로 옮겨가셨다”고 증언한다.
한편 우리 역사에서 자칫 사라질 뻔했던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이나 백우용 선생을 역사의 뒤안길에서 끈질기게 찾아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최창언 선생이다. -최창언 선생, 건축가로서 프란츠 에케르트 존재를 역사의 전면으로 바로 세워 그런데 최창언 선생은 의외로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중동과 국내 건설현장에서 30여 년을 건축계를 누벼온 전문 건축인이다. 1997년 봄 운현궁 앞 회사 창문 너머로 본 고종·명성황후 국혼례의 장엄하고 격조 높은 의례에 매료되며 대한제국에 관한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근대사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던 시절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다 2000년 대 초에 이태진 교수가 쓴 ‘고종시대 재조명’이란 책을 보고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다분히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의한 인식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연구해 보면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선인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최창언 선생은 다년간의 연구 끝에 2007년에 ‘대한제국의 양악도입과 그 발자취’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를 다시 2010년 음악저널에 나눠 연재해 대중들에게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과 대한제국 양악대를 알렸다. 또 2020년 ‘대한제국의 양악 도입과 그 발자취(가고 없는 제국에 대하여 1)’를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 이 기사에서기술된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과 백우용 선생에 대한 소개 역시 최창언 선생의 기록에서 발췌했음을 밝힌다. -송재용 단장, 탑골공원 공연 복원 3회 공연, 코로나 19로 공연 못해 안타까워 최창언 선생의 기록에 못지않은 성과가 프란츠 에케르트 선생과 백우용 선생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지켰던 양악대 연주의 복원이다. 이 고군분투는 경주출신으로 뉴코리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산파이자 지금까지 이끌어온 송재용 단장에 의해 완성되었다. 송재용 단장은 경주출신 클라리넷을 주자로 독일 베를린 국립음악대학에서 수학한 음악인이다.
“제가 단국대학교 음대 교수로 재직하던 1990년 당시 문화공보부에 ‘대한제국국가복원위원회’라는 조직이 외국공관에 보낼 대한제국애국가를 재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단국대학교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동원해 이 노래를 연주했지요”
이후 송재용 단장은 이 노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가 무려 28년 뒤인 2018년 9월, 마침내 뉴코리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끌고 탑골공원에서 대망의 복원음악회를 열었다. 2019년 10월,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 탑골공원대음악회, 경주신문 창사 30주년기념 경주예술의 전당음악회 등에 양악대를 동원해 모두 3번의 연주회를 진행했다. 이들 공연에서 연주단원들은 대한제국양약대가 입은 복장까지 복원해 입은 채 연주를 진행해 복원의 의미를 되살렸다. 아쉽게도 2020년 이후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연주를 멈추고 있다.
“프란츠 아케르트 선생이나 백우용 선생에 대한 연구는 음악인들이나 역사가들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데 정작 그 연구는 건축을 전공하신 최창언 선생께서 하셨어요. 이것은 아직도 우리나라 음악문화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특히 송재용 단장은 아직도 우리나라 음악계가 현악기를 더 존중하고 있어 관악기로 이루어진 대한제국양약대에 관한 연구나 연주회 복원이 냉대 받고 있다고 토로한다.
“프란츠 에케르트 이전에는 천주교회중심의 하모니카나 풍금수준의 서양음악이었던 것이 대한제국양악대 창설 이후 전문 음악이 탄생했습니다. 양약대 해산 이후 각 방면에서 활동한 대원들이 해방을 전후해 우리나라 현대음악에 끼친 공로는 음악 전 분야에 걸쳐 막중했을 것입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수많은 외국인이 잠들어 있다. 고종황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할 때 도움을 주었던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도 있고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1858-1902),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는데 공헌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1859-1916)도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초중고 교과서에 실리며 그 아름다운 이름을 오래 알리고 있다. 우리나라 음악사에 누구보다 큰 기여를 한 프란츠 에케르트를 그들 못지않게 기억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문화의식이 한층 높아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