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보문관광단지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대한민국 최초 관광단지인 보문관광단지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알리는 공간인 ‘관광역사공원’ 조성사업이 기공식을 시작으로 첫걸음을 뗐다. ‘관광역사공원’은 지난 1979년 조성돼 40년 넘게 국내 관광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보문관광단지의 지나온 역사와 시·공간을 담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추진된다. 경북문화관광공사는 지난 25일 보문관광단지 내 사랑공원에서 관광역사공원 조성사업 기공식을 개최했다. 기공식에는 이철우 도지사, 주낙영 시장, 김성조 경북문화관광공사 사장과 주민 등 140여 명이 찾아 관광역사공원 조성사업의 시작을 축하했다. 관광역사공원은 경주시 북군동 8-28번지 일원 5000㎡ 부지에 쉼과 휴식이 있는 체험·휴게형 공원이 조성된다. 총사업비 50억원을 들여 2023년 준공 예정이다. 관광역사공원은 현재 보문호수변의 사랑공원을 전체적으로 리모델링한다. 공원 내에는 보문관광단지의 개발 발자취를 담은 역사를 상징하는 기억의 공간과 조형물, 미래를 향한 도약의 공간, 과거와 현재의 공유를 통한 소통의 공간이 마련된다. 또 관광객과 시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포토존과 도심 속 쉼터가 되어줄 산책로 및 휴게 공간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김성조 경북문화관광공사 사장은 “보문관광단지는 1971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주 활성화에 언급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의해 조성됐다”면서 “이를 기억하기 위한 관광역사공원을 조성해 보문관광단지의 랜드마크로, 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산업의 메카로 재도약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주낙영 시장은 “관광 중심지인 보문관광단지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관광의 역사이자 상징이다”며 “관광역사공원이 방문객들에게 보문관광단지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는 쾌적한 휴식공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열린 기공식은 보문관광단지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영상물 상영, 기념버튼 퍼포먼스를 비롯해 공원 내 세워질 조형물 전시를 통해 관광역사공원의 모습을 미리 만났다. 또 이날 기공식에 참석한 경북해외자문위원협의회와 IS동서 등이 기부의사를 밝히며 보문관광단지 관광역사공원 조성에 동참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관광역사공원은 보문관광단지 개발을 기념하고 지나온 시간과 공간을 기억하며, 새로운 미래로의 도약을 상징하는 의미 있는 공원이 될 것”이라며 “역사·문화·자연·사람을 담은 공원으로서 보문관광단지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편 경주시는 보문관광단지 활성화를 위한 관광단지 리노베이션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보문 상징형 짚라인 조성사업’, ‘보문 호반산책로 야간조명 보강사업’, ‘보문관광단지 상징조형물 조성사업’ 등이다. 시는 이들 사업을 추진해 보문관광단지 내 다양하고 참신한 콘텐츠를 보강함으로써 국내 최고 관광지의 위상을 이어갈 방침이다.
겨울은 다가오고 소외계층은 어떡해야 하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주시가 원예산업발전계획을 수립, 지역 맞춤형 원예 품목 육성을 통한 경쟁력 강화에 나선다. <사진> ‘경주시 원예산업 발전계획 수립연구 용역’ 최종보고회가 지난 19일 경주시농산물산지유통센터에서 열렸다. 최종보고회에는 최형대 농림축산해양국장과 배진광 농협원예조합공동 대표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원예산업 발전계획은 중앙의 유통정책 개편 지침에 따라 지역별 원예산업 발전 목표와 정책의 기본방향을 수립을 위한 용역으로, 중장기 지역단위 종합 원예산업 정책계획이다. 이번 보고회는 향후 5년간(2023~2027년) 간 효율적인 원예농산물의 유통체계를 구축하고 산지 농산물의 규모화·조직화를 통해 가격경쟁력을 갖춰 시장경제에 대응하기 위해 수립했다. 최종보고회를 통해 전략품목의 생산, 유통 및 환경혁신 추진사항을 비롯해 지역특성에 적합한 전략품목(토마토, 멜론, 부추)과 원예조직육성, 유통현실화 방안을 도출했다. 최형대 농림축산해양국장은 “용역을 통해 도출된 전략품목과 발전방안 등을 토대로 농산물 유통체계를 개선하고 실질적인 농가소득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경주시가 지난 25일 국토교통부 주관 ‘2022 대한민국 도시혁신 산업박람회’에서 도시재생 우수 지자체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경주시는 도시재생사업과 주민 활성화 프로그램 운영 우수 추진 등 ‘도시 경제·일자리 창출’ 부문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도시재생 우수 지자체에 선정됐다. 또 ‘도시재생 협치포럼 총회’에서는 도시재생 및 사회적 가치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기초지자체장, 공공기관장을 공동대표 및 공동위원장으로 위촉하는 안을 승인했는데, 주낙영 시장이 도시재생 협치포럼 공동대표단 대구·경북 권역별 위원회 공동위원장과 정책위원회 분과 공동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이에 따라 주 시장은 권역 내 정보교류 및 협치 체계 구축을 통한 도시재생 현안을 발굴해 지역이 주도하는 도시재생 정책 실현을 위한 기반 마련에 주력하게 된다. 한편 경주시는 25일부터 28일까지 4일간 경기도 용인에서 개최되는 2022 대한민국 도시혁신 산업박람회 ‘2022 도시재생 협치포럼 총회 및 정책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번 박람회는 당초 ‘도시재생 산업박람회’였던 대회 명칭이 ‘도시혁신 산업박람회’로 바뀌며 사실상 이번 정부의 도시공간 재창조에 대한 정책 방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주낙영 시장은 “이번 수상은 그동안 지역 활성화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추진해 온 도시재생사업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며 “앞으로도 현장 상황에 맞는 정책연구를 통해 주민 삶의 질 향상과 도시경쟁력 강화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경주와 포항, 울산 등 3개 도시로 구성된 해오름동맹이 초광역 경제산업 공동체로 확장에 나선다. 3개 도시 행정협의체인 ‘동남권 해오름동맹 상생협의회’는 지난 25일 보문관광단지 내 황룡원에서 민선 8기 출범 이후 첫 정기회를 개최했다. 이날 주낙영 시장을 포함한 이강덕 포항시장, 김두겸 울산시장 등 3개 도시 시장들은 ‘초광역 경제산업 공동체’ 5개 핵심 전략 아젠다를 공동 발표했다. 이어 ‘해오름동맹 상생협의회 공동협약문’에 각각 서명했다. 5개 핵심 전략 아젠다는 △동남권 해오름 초광역 전철망 △국가 첨단 가속기 인프라 동맹 △환동해 해오름 해안 관광단지 △해오름 형제의 강 상생프로젝트 △해오름 미래산업단지 혁신 플랫폼 조성을 담았다. 특히 ‘동남권 해오름 초광역 전철망’ 아젠다는 태화강~신경주~포항 구간과 태화강~신경주~동대구 구간을 연결하는 전철망 노선 연장사업이다. 하나의 경제·생활권으로 연결뿐만 아니라 대구, 경북, 부산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해 인구 유출을 방지하고,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해오름동맹은 지난 2016년 6월 울산~포항 고속도로 개통을 계기로 생활권역으로 묶인 경주, 포항, 울산 3개 도시가 구성한 행정협의체다. 그간 ‘도계 지역 식수난 해결’ 등 지역 현안사항에 공동 협력하고, ‘수도권과 지방의 법인세율 차등적용’에 대해선 기재부와 여야 정당에 공동으로 대응하며 뜻을 모았다. 또 지속적인 협력을 위해 분야별 협력 사업을 발굴하고 있으며, 현재 4개 분야 30개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 중이다. 주낙영 시장은 “해오름 동맹이 이번 회동으로 새로운 전환점인 해오름 초광역 경제산업 공동체 협약이 이뤄져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5개 전략 아젠다를 바탕으로 해오름 동맹이 국가 초광역 경제산업 동맹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겠다”고 강조했다.
건천지역 인구 감소의 최대 원인이 진학 문제라며 중학교 자유학구제가 시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건천읍발전협의회는 지난 17일 건천읍행정복지센터에서 ‘건천지역 중학구 조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학부모는 건천지역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범법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학부모는 지역에 있는 학교 진학이 아닌 시내권 학교 진학을 위해 주거지 이전와 위장전입을 선택하고 있다”면서 “자유학구제를 통해 아이들의 학교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생이 유출은 지역 인구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된다.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서도 자유학구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입학생 대비 졸업생 급감하는 건천초, 천포초와 모량초는 오히려 증가 건천지역이 진학 문제로 학생 감소 주장은 지역 학생 현황과 인구 추이에서 확인된다. 건천초 입학생과 졸업생 현황을 살펴보면 학생 유출의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교육청에 따르면 2007년 건천초에 54명의 학생이 입학했지만 6년 후 졸업생은 30명으로 24명이 학교를 떠났다. 감소율은 무려 44%. 학생들이 학교를 떠난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건천초에서는 2008년 45명이던 입학생이 졸업 시기인 2014년 16명이 학교를 떠나 학생 35% 줄어들었다. 그리고 2015년 졸업생은 입학생 대비 53% 감소했으며 2016년에는 67%, 2017년 50%, 2018년 37%, 2019년 44%, 2020년 26%, 2021년 51%, 2022년 51% 등 매년 졸업생이 입학생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학생 수 감소는 건천지역 인구 감소로도 이어지고 있다. 건천읍 인구 현황을 살펴보면 2012년 1만1209에서 2014년 1만903명으로 줄어들었고 2019년에는 9768명으로 인구 1만 명 선이 무너졌다. 그리고 2021년 9295명에서 2022년 9170명으로 감소하며 2023년에는 인구가 8000명 수준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학부모와 발전협의회가 자유학구제 요구 근본적 이유는 지역 학교 신뢰성 문제다. 학생들이 진학해야 할 무산중과 무산고가 교육이 아닌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되고 있다는 것. 학부모는 “무산중이 청구재단으로 바뀌면서 학교 운영이 학생을 위한 것이 아닌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된 것 같다”면서 “지역 발전 여건을 조성해야 할 학교 관계자가 이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신뢰가 무너진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유학구제가 시행되더라도 무산중·고가 문 닫는 게 아니다. 자유학구제 시행하는 곳을 보면 오히려 학생 수가 증가했다. 학교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건천에서는 천포초와 모량초가 자유학구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들 학교는 자유학구제 시행으로 학생 수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천포초의 경우 지난 2016년 입학생이 2명에 불과했던 학생 수가 졸업시기인 2022년에는 무려 8명으로 증가했다. 모량초도 5명이던 입학생이 2022년에는 6명으로 1명 증가해 졸업생 수가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 건천초와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학구 자유학구제 시행은 2024년 건천지역 학생 유출을 막기 위한 자유학구제 추진은 2015년부터 진행돼 왔다. 경주교육지원청에 따르면 2015년도 학구제 조정 요구로 관련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무산됐다고 밝혔다.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자유학구제 대신 무산중학교를 특색있는 학교로 바꿔 학부모 요구를 충족하려 했다”면서 “하지만 결국 학부모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시내권 학생 유출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건천지역 중학구 조정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학생들은 2024년이 돼서야 자유학구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유학구제 시행을 위한 심의기구 개최와 심의, 최종 ‘고시’까지 연내 시행은 불가능하다는 것. 경주교육지원청 서재진 주무관은 “올해는 사실상 자유학구제 시행이 어려워 6학년은 기존 학구제를 따라야 한다”면서 “내년 학구조정이 이뤄지면 현재 5학년부터는 학교 선택이 자유로워질 것이다”고 말했다.
경주시시설관리공단이 신규 사업 위·수탁으로 신규직원을 공개 채용한다.모집인원은 일반직 5급(경력) △기계(기계설비) 1명, 일반직 6급(신규) △사무(기록물 1명 포함) 5명 △기술(전기) 1명 △기술(에너지) 1명 △기술(산업안전) 1명이다. 업무직(무기계약직)에는 △시설보조 3명 △주차·매표 1명 등 총 13명이다. 공..
경주범죄피해자지원센터(이하 경주범피)는 지난 21일, 22일 양일간 대구·경북지역 범죄피해자들을 초청해 다섯 번째 서라벌 힐링캠프를 개최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주제로 열린 이번 서라벌 힐링캠프에는 대구·경북지역 9개 범피 종사자, 피해자 100명이 참여했다. 서라벌 힐링캠프는 경주에서 신라문화유적 ..
‘2022 젊은 경북 행복인구 플러스 경주, 공감 토크’가 오는 26일 경주 월정교 야외 특설무대서 열린다. 경북도가 주최하고 인구보건복지협회 대구·경북지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지역이 가진 매력요소를 발굴하기 위해 기획됐다. 토크쇼 형식으로 열리는 토크쇼는 경주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시민들을 패널로 초대해 ..
경주시가 캄보디아 노동직업훈련부(이하 노동부)와 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현지 시간 지난 17일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노동부 청사에서 열린 협약식에는 주낙영 시장, 이락우 경주시의회 경제도시위원장, 헹쑤어(Heng Sour) 노동부 차관 등이 참석했다.이날 협약에 따라 캄보디아 노동부는..
길 길은 떠나는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 졌는지 서 있는 나무를 뒤로한 채, 내 딛는 걸음이지만 아직까지 확신은 없습니다. 간혹 길가의 꽃들이 미혹의 몸짓을 보내면 잠시 길 위를 벗어나 봅니다. 차라리 길 위의 시간들이 덧없이 느껴질 때 영원한 일탈을 꿈꾸어 보기도 합니다. 말없는 나무는 늘 멀어져 가고 길은 앞으로만 펼쳐지는데 이 끝없이 낯설기만 한 길은 언제쯤 끝나려나요 들꽃의 미혹에 미쳐버리고 싶은 겨울 길 가에서
경주시가 외국인을 교육한 후 일손이 부족한 농촌현장에 투입하는 외국인 계절근로자 사업 추진이 순항 중에 있다는 소식이다. 주낙영 시장과 경주시의원 등 일행은 지난 17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서헹쑤어(Heng Sour) 노동부 차관과 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협약은 캄보디아 노동부가 우수 인력을 지원하고, 경주시는 이들의 거주 및 근무여건 조성 등을 지원하고, 농업기술을 전수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앞서 경주시는 지난달 28일 필리핀 GMA시와도 ‘외국인계절근로자’ 도입을 위한 MOU를 체결한 바 있다.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은 극심한 농촌일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다. 하지만 국내로 들어온 외국인들 중 일부가 무단이탈, 불법체류 등으로 이탈자가 발생하면서 논란이 되는 등 제도의 국내 정착이 쉽지 않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주시는 한국에 거주하는 결혼이주여성 가족과 국제구호단체 ‘(사)나눔재단 월드채널’이 운영하는 캄보디아 초등학교 학부모 등을 연수 대상자를 한정했다. 이들에게 사전 농업연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계절근로자로 연계하는 방식이다. 경주시가 이 같은 시도를 통해 외국인 근로자의 이탈을 방지하고 부족한 농촌일손 문제를 해결한다는 계획이다. 외국인을 활용한 농촌 인력부족 문제 해결의 성공사례를 만들어 보겠다며 경주시만의 특화된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 경주의 농촌은 고령화로 일손부족에 허덕이고 있고, 인건비도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농민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경주시가 추진하는 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이 가뭄 속 단비 역할을 하길 바란다.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은 글로벌 공급망을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까지 겹쳐 ‘고물가·고금리·고환율’ 3고 현상으로 전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9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08.93으로 작년 같은 달보다 5.6% 상승했다. 지난 6월과 7월엔 각각 6.0%, 6.3% 올라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1월(6.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전국의 농촌과 공장에서도 치솟는 물가상승으로 유례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는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물가고로 존폐마저 우려되는 곳이 있다. 무료급식소다. 무료급식소는 매일매일 홀로 사는 노인, 노숙인 등 취약계층에게 따듯한 한 끼를 제공하는 곳이다. 최근 들어 물가가 오르면서 무료급식소를 찾는 이용객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경주에서는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 이웃집, 성림무료급식소 등 3개소가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웃집과 성림무료급식소는 일평균 200여명이 이용하고 있고,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은 최근 일평균 이용자가 600여명에 이르면서 이용자 연령을 제한해 400여명 정도로 줄인 상황이다.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이용객과 후원 감소 탓에 무료급식소들은 급등한 식자재 가격을 감당하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무료급식소로 지원되는 보조금은 현재 한끼당 3000원이다. 그마저 대체급식을 하는 경우 포장비 등을 제외하면 한끼 식사를 제공하는데 지원받는 예산은 2200원에 불과하다는 것이 급식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무료급식소 운영기관에서 사비를 내가며 유지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올해 경북도가 무료급식소로 지원한 예산은 4억7000만원이지만 가파르게 오르는 식자재 가격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어 추가 지원이 절실하다. 무료급식소는 우리 사회 소외된 취약계층들에게는 최후의 복지서비스나 마찬가지다. 고령의 어르신, 위기로 벼랑 끝에 내몰린 소외계층들에게 따뜻한 한끼로 이웃의 정을 나누는 곳이다. 지금의 경기침체가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인 상황을 감안하면 더 이상 선의의 후원에만 맡겨둘 수도 없다. 정부, 경북도, 경주시가 나서 취약계층의 기본 식사를 지속적으로 챙겨줄 수 있는 방안을 서둘러 찾아내야 할 것이다.
공감을 원하지도 동의를 구하지도 않는다. 각자가 개성이 있고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란 게 있기에 사람마다 생각과 가치의 기준이 다르기에 그래서 “이런 사람도 있어요” 하고 피력해 본다. 얼마 전 기사를 접하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세계 국가별 행복 지수에서 한때 1위를 차지했던 부탄이 95위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십수년전에 국가별 행복 지수를 발표했는데 부탄이 1위라고 하여 ‘부탄이 어떤나라일까?’하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기억이 생생하다. 인구 80만명 정도의 소국,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최하위! 여러 가지 지표에서 열악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행복지수는 단연 세계 1위였다. 국왕에 대한 믿음과 충성이 대단해 나름 정치가 안정된 나라! 순수하고 유순한 국민들로 구성된 나라! 범죄가 거의 없고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국민이 대다수인 나라! 이러한 것들이 행복지수 1위로 만들었을 것이다. 부탄으로 인해 행복에 대해 새로이 인식을 하고 느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대다수가 가난했고 힘든 노동을 수반하는 농업에 종사했지만, 그것으로 얻은 수확물로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만족했던 이들에게 개방의 물결 속에 바깥세상을 알게 되고 돈을 알게 되면서 빈부가 생기고, 자본에 의해 삶의 질이 다르게 되는 등 비교 거리가 생기게 되면서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돈의 편리함과 위력을 알게 되면서 사회는 더욱 분열화되기 시작했고,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욕심이 수반되고 그 욕심으로 인해 범죄가 증가하면서 사회는 각박해지고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지게 된 것이다. 돈을 몰랐을 때는 행복했었는데··· 행복에 대한 이유와 조건이 많아졌고 나는 ‘왜?’라는 의문도 생기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말 그대로 격변의 세월이다. 우여곡절의 세월을 딛고 경제적으로 세계 정상의 국가로 발돋움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영화·음악 등)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알아준다. 특히 동남아에 가면 뿌듯함을 느낄 정도로 대한민국을 알아준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주시민으로 살아가면서 행복을 크게 체감하지 못했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데도 만족할 수가 없다. 비교가 되고 욕심을 지울 수가 없다. 대통령이 누구여서 시장이 누구여서 국회의원이 누구여서···. 불만의 내용도 전보다 다양해졌다. 정치는 어느덧 우리 생활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이웃끼리도 다투게 하고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다툼이 일어나게 한다. 지지하지 않는 것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역 간 분열과 다툼이 숙제였는데 이제는 세대 간, 남·여간 분열 등도 보태졌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이 갈라지게 되고 그것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형국에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는 국민들의 분열을 더욱더 조장하게 만들었다. 돈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버린 듯한 대한민국 사회! 돈에 대한 욕심으로 천륜·인륜까지도 저 버리게 만드는 뉴스가 판치는 사회! 소득은 전 보다 훨씬 더 많아 졌는데 삶은 더 팍팍해진 사회! 그러다 보니 결혼을 미루게 되고 육아 비용부담 때문에 출산도 미루게 되는 등 대한민국사회의 기초마저도 흔들리게 됐다. 출산율 세계 꼴지로 국가의 존립마저도 걱정하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경주사회도 여러 가지 이유로 대립이 극대화되는 등 얼마나 분열이 되었는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바뀔 것이다. 격변의 세월을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저력을 가진 현명한 국민이어서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는 마음가짐, 만족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넘치고 그것을 바탕으로 화합하는 사회풍토가 형성되어야 한다. 몇십년전 못 배운 사람이 태반이고 많은 식구들로 인해 끼니를 걱정하는 배고픔이 많은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그때는 가족 간 이웃 간 정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의 그때 그 시절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동남아 아주 낙후된 나라! 그곳으로 가려 한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듯이 시계를 몇십년 거꾸로 돌린 생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추억을 되새기고 마음 수행을 하며 배울 것이다. 정치는 불안하고 부정부패가 난무하지만 아직은 돈을 몰라 행복지수가 높고, 차 경적 소리 한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양보와 배려심이 많은 나라여서 분명 배울 것은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욕심을 버리는 생활을 실천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과 사소한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배워 내 삶의 터 경주로 돌아와 더 윤택하고 보람된 삶을 살아보려 한다. 그리고 배움과 수행이 충분하다면 내 이웃들에게도 말해 줄 것이다. “행복은요··· 이렇더라고요”하면서···.
한류가 전방위로 유럽을 휩쓸고 있다. 어느 몇 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동일한 현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장르도 다양하다. 영화, 음악, 음식을 필두로 한국에 관한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관심영역에 지속적으로 진입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 이래로 ‘something Korea’ 즉 ‘한국에 관한 어떤 것’이 이렇게도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유가 무얼까?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시각에서 적어 보자. 먼저 대한민국의 국력이 엄청나게 신장 되었다. 그 국력이란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필두로 다양하다. 소위 BRAND KOREA가 이제는 어디를 가더라도 먹히는 형국이 도래했다 생각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두 번째로 그동안 꾸준히 지속되어온 정부의 ‘문화산업수출’에 대한 효과가 과실로 나타나고 있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문화는 절대로 역류하지 않는다. 즉 문화는 국력과 동일하게 인식되고 자국 밖에서도 그 국력만큼 인정받는 것이 상례다. 여전히 ‘SOMETHING AMERICA’는 누구든지 인정하고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가 아직 세계의 주류 국가에 편입이 되기 전에, 정부가 앞장서서 ‘한국문화 알리기’ 전략을 수립하고 지속적으로 이끌어 온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문화산업 수출에 대한 지표적 성과는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K-FILM, K-MUSIC, K-FOOD, 이 세 가지가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문화 알리기의 대표적 효자들이다. 그리고 이들 3대 문화가 서로 주고받는 시너지 효과도 엄청나다. 예를 들면, K-FILM에 나오는 K-FOOD를 당연히 관람자들은 주목할 수밖에 없고, K-MISIC 에 등장하는 장소나 의상들을 젊은이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방문하고 싶은 나라 우선순위로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높은 인지도로 상승을 하는 것은 당연히 그 원인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영국에 사는 필자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난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좋아하고 ‘social chat-사회적 담소’를 좋아하는 나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레스토랑 사업으로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한국에 대해 매일 영국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입장이다. 예전에는 내가 한국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영국 사람들이 먼저 내게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묻는 경우가 많다.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한국을 찾아가 봐야지 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가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영국 사람들의 연결고리이다. 이러한 영국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야기하는 것이 내 고향 경주다. 특히 최근에는 경주에 대한 기사들이 외국의 신문과 잡지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휴대폰에 캡처하고 경주 홍보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서울, 부산, 제주도 3곳을 가장 많이 방문하는데 경주가 상위로 자리매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경주를 다녀온 영국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경주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잘 알려 준다. 휴대폰을 열고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보여준다. 첨성대, 불국사, 동궁과월지, 반월성, 대릉원 등이 많다. 특히 전통가옥에서 숙박한 경험을 대단히 특이한 추억으로 자랑한다. 아쉬운 것은 그 어디를 봐도 ‘무엇을 먹었다’라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수백 장의 사진들을 보면서 ‘음식 사진 한 장 없다’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 여행의 재미는 정말 다양하다. 장소에 대한 매력,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그 지역에서 먹은 맛있는 음식 등 여러 요인들이 당사자의 머리에 각인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하는데 일조한다. 경주를 다녀온 사람들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안 할 때, 음식에 관련된 학문을 전공하고 외식업에 종사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본지에서도 꾸준히 가능한 고향땅 이야기를 음식과 관련하여 적어 왔다. ‘보여준 장소’만큼이나 ‘먹었던 음식’ 이야기도 내 고향 경주를 다녀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남쪽 자락에 소담한 도봉서당(桃峯書堂)이 위치한다. 바로 평해(平海)황씨 황정(黃玎,1426~1497) 선생을 모신 도봉서당은 1545년에 추보재(追報齋)를 묘소 아래에 지었으나, 전란(戰亂)과 세월의 풍파에 훼손되어 1915년 후손들이 추보재 자리에 서원형식으로 중건하였다. 숭앙문(嵩仰門)·도봉서당·추보재·연어재(鳶魚齋)·상허당(尙虛堂) 등으로 구성되며, 류석우와 여강이씨 등 근대 문사들의 기문과 상량문이 걸려있다. 황정의 자는 성옥(聲玉), 호는 불권헌(不倦軒)으로, 『맹자』의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學不厭而敎不倦)’에서 뜻을 취하였다. 선대 황천부(黃天富)가 외삼촌 오도안렴사(五道按廉使) 오방우(吳邦佑,1313~1393)를 따라 순시하다가 경주에 머물면서 세거하였고, 조부는 황희석(黃希錫), 부친은 황상길(黃裳吉)로 경주부 남쪽 중리(中里)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인 월성손씨 슬하에 황용중(黃用中)·황처중(黃處中)·황택중(黃宅中)을 두었다.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1433~1484)와 동일 공간에 머물며 학문을 논하였고, 최진립(1568~1636)의 부친 최신보(崔臣輔)는 황정의 손녀와 혼인하는 등 지역 유림 간 혼반(婚班)으로 가까운 교류가 이뤄졌다. 황정 선생은 늦은 나이인 성종 5년(1474)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며 입신의 뜻을 이뤘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성종 17년(1486) 1월에 윤필상 등을 시관으로 삼아 경사(經史)를 외우게 하였고 으뜸을 한 황정에게 말 1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영사(領事) 윤호(尹壕,1424~1496)가 혜빈서(惠民署) 교수 황정을 경술(經術)에 매우 정통하고 또 효행이 있으니 쓸 만한 사람이라며 추천하자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에 제수되었다. 2월에는 선교랑(宣敎郞) 수(守)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3월에는 소인 임사홍(任士洪)ㆍ박효원(朴孝元)ㆍ김언신(金彦辛)은 죄가 무거우니, 직첩(職牒)을 도로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주서(周書)』 경명편(冏命篇)을 인용해 암송(暗誦)하며 정성을 다해 풍간(諷諫)하여 마침내 명을 돌이켜 강석경을 체임시켰으니, 그의 강직함을 알만하다. 이후 1493년 7월 8일, 곧은 성품으로 낮은 관직에 오래도록 침체되어 생활하기에 녹봉이 부족하였고, 왕자군교수(王子君敎授)가 되었지만 정중히 사직을 청하고 귀향하였다. 1493년 4월 1일의 실록기록을 보면, “요즘 국학(國學)이 쇠퇴해져서 유생들이 오로지 독서(讀書)에 전념하지 않으니, 매우 걱정스러워 이를 진작시키려 생각하고 있다. 듣기에 그대가 청수(淸修)ㆍ염퇴(廉退)하고, 학문이 정숙(精熟)하여 사표(師表)로서 꼭 합당하므로 이번에 성균관 전적(典籍)을 제수하였으니, 빨리 올라와서 직사(職事)에 나아가도록 하라”명하였고, 논평하기를, “황정은 경주에 살면서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는데, 과거에 합격하고서도 노모 봉양을 위해 벼슬하지 않고 본 고을의 교관(敎官)이 된 지 10여 년이 되었다. 그리고 모친이 돌아가시자 비로소 출사(出仕)하여 정언(正言)과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역임하였다. … 사람됨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며 넉넉하고 화평하여 명성과 이익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향리(鄕里)에 살면서 일찍부터 관부(官府)에 들어가지 않고, 생도(生徒)를 교회(敎誨)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10년 만에 졸하였다”전한다. 이렇듯 황정은 늦은 나이에 노모를 위해 과거에 합격해 진사에 올랐으나, 효행의 봉양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머문 진정한 학자의 행실을 보였다. 모친 사후에 여러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역시 그리 오래지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매진하였으니, 그의 행적을 연구하기에 사적(事績)이 부족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감사(監司)로서 역마타고 경주에 이르러 추정석전(秋丁釋奠)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왔다가 공이 머무는 불권헌에 이르러 황정 교관과 술잔을 나누며 시를(次不倦軒韻贈黃敎官玎) 주었는데 光, 塘, 傍, 祥, 觴 운에 맞췄다. 이후 이 시는 경주 유림의 다수가 차운하며 거듭 회자되었는데, 훗날 황정의 후손인 황백양(黃伯陽)이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에게 자신의 선조 정언공(正言公) 황정 점필재증별시를 보여주며 화답시 2수를 요구한 적도 있었다. 조선시대 경주를 무대로 활동한 선비들이 많았지만, 모두가 문집을 간행하거나 사적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직간접적으로 주변의 인물과 글을 연구하다보면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드러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이 역시 경주의 조선스토리를 연구하는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2008년 한 영화가 개봉되었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바보>. 차태현 주연의 영화는 관객의 호평으로 꽤나 좋은 흥행 성적을 보였다. 나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 만화를 먼저 보았다. 아마도 서점에서 내 돈으로 산 첫 번째 만화책이었을 것이다. 만화가 인문 도서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은 건 단 한 문장 때문이었다. “그 많던 동네 바보는 다 어디 갔을까?”(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의미는 같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우리 동네에도, 골목에도 조금은 우리와 다른 오빠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잊혀졌다. 요즘 서울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들의 뉴스가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어디에 있다가 나오는 것일까? 엄마가 되어, 아줌마가 되어 아이들에게 편견 없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평소에 했다. 그러나 책이나 영화에서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뉴스에 등장했을 때,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른들의 반응은 또 어떨까?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능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것에 경계심을 품는다. 엄마가 되어 장애아들에 대한 편견을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인위적인 만남보다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생각했지만,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없었다. 장애인 통계를 살피면 30만 명이 넘는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교육에 관한 관심으로 찾아가게 된 곳에서 장애인 교육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을 알게 되었고 그분들을 통해 사회 적응 훈련 중인 친구들이나 장애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모임을 통해 하나둘 접하게 되면서 어른인 나보다 아이들은 편견 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리와 시간이 다른 친구(아이들의 그들을 표현한 단어)”들을 인정하고 배려했다.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모습에도, 그건 난동이 아니라 기다려주는 시간이라고 아이들은 인지했다. 잠시 고함을 지르는 아이를 한 번 살펴볼 뿐, 다른 행동이나 불편하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시끄럽지 않았어? 불편하지 않았어?” 하고 묻자 세 아이는 그냥 “그 친구는 자기가 하고픈 것이 따로 있나 봐” “그 친구는 더 하고 싶은데, 못 하게 하니까 싫은 거야. 너도 지난번에 아이클레이 더 하고 싶다고 엄마한테 소리 질렀다가 혼났잖아” “아니야. 그 언니는 밥 먹는 것보다 노는 게 더 좋아서 그런 거야” “그래도 언니가 너무 소리를 크게 지르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참기 힘들었을 텐데, 참아줘서 고마워라”라는 내 말에, 아이는 쿨하게 답했다. “속상한 기분을 진정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거야. 사람은 다 다르잖아. 그 친구는 우리랑 시간이 좀 다른 거야” 편견 없이 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장애인 활동 지도사 교육을 받은 나는 오히려 반성했다. 책이나 교육으로 배우는 것보다, 시간이 우리랑 좀 다른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더 많이 배웠다. 결국 함께 하는 사회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함께 공존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삼십 년 전, 우리가 사는 집 골목 안쪽에 몸이 조금 불편한 이모가 살았었다. 조카들이 우리집에 놀러와서 동네 꼬마들과 아주 신나게 놀고 있을 때였다. 마침 그 이모가 아이들 곁을 지나가는데 골목 아이들과 함께 조카가 다리를 저는 이모의 모습을 따라하는 것을 보고 혼을 낸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카의 잘못보다 나의 잘못이 더 컸음을 인정한다. 그 이모는 아마도 아이들이 뒤따르며 자신을 흉내 내는 것을 알았으리라. 거기에 당황해서 혼을 내는 나의 모습도. 지금 우리 사회는 삼십 년 전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쇼팽은 리스트의 소개로 조르주 상드(G.Sand/1804-1876)를 만난다(1836). 상드는 신(新)여성이었다. 공공장소에서 남성복(바지)을 즐겨 입고, 시가를 물고 다녔다. 유명 소설가로 사교계에서는 마당발로 통했다. 또한 1남 1녀를 둔 이혼녀이면서 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이런 여성이 보수적인 성향의 쇼팽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겠는가? 쇼팽보다는 쾌걸 리스트에게 맞는 궁합일 것이다. 쇼팽도 처음에는 이런 상드가 마음에 없었다. 하지만, 6살 연상의 능수능란한 모성애는 실연에 빠진 폐결핵 환자를 비교적 쉽게 굴복시켰다. (사실은 상드도 실연을 겪고 난 직후에 쇼팽을 소개받았다.) 쇼팽의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상드는 마침 아들 모리스의 휴양이 필요하여 쇼팽에게 마요르카(축구선수 이강인이 소속된 스페인 라리가의 팀 이름이기도 하다)에 함께 가자고 제안(1838)한다. 쇼팽이 이를 수락하는 것은 상드와의 사이가 매우 깊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소심한 쇼팽에게는 큰 고민거리였다. 파리에서 하던 일(고액레슨 등)들을 모두 중단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결국 쇼팽은 상드 그리고 그녀의 아들, 딸과 함께 마요르카에서 휴양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2년을 보낸다. 유명한 빗방울 전주곡(15번)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이후 상드는 자신의 고향인 노앙과 파리를 오가면서 쇼팽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한다. 10년 가까이 교제를 이어간 쇼팽과 상드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원인은 딸 솔랑주 때문이었다. 상드는 자신과 너무나 닮은 솔랑주를 끔찍이 싫어했다. 반면, 솔랑주와 의붓아버지인 쇼팽은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결정적인 건, 쇼팽이 상드가 솔랑주 부부에게 불허한 마차를 빌려준 사건이다. 쇼팽이 상드와 솔랑주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지만, 상드는 쇼팽이 솔랑주의 편을 든 거라 생각하고 쇼팽에게 이별을 고한다. 상드는 냉정했다.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다신 쇼팽을 찾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상드와의 이별은 쇼팽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쇼팽은 여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피아노 레슨을 받던 제자이자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유한 상속녀인 제인 스털링(J.Stirling/1804-1859)이 상드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스털링은 상드와 동갑이었지만, 둘은 판이했다. 조그맣고 다소 통통한 체형인 상드와는 달리 스털링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다. 그리고 상드는 호탕한 성격이었지만, 스털링은 내향적인 여성이었다. 쇼팽은 스털링을 연인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스털링도 이를 알았지만, 쇼팽이 죽을 때까지 극진히 보살폈고, 모든 장례비용을 댔으며, 쇼팽사후 1년 동안 검은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스털링의 제안으로 영국투어(1848)를 간 쇼팽은 병이 더욱 악화되어 돌아왔고, 이듬해 39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대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몸은 페르 라세즈(파리 도심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심장은 따로 적출하여 바르샤바 성(聖)십자가 성당에 안치했다. 21살에 폴란드를 떠나 단 한 번도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쇼팽은 죽어서야 비로소 심장 한 조각으로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막연한 바람은 사람이 태어나서 책 만권은 보고 죽어야지 생각했다. 책 욕심은 많아 돈 버는 실용서 빼고는 여러 종류의 책들을 골고루 보아왔다. 그래서 딱 한 권을 고르라면 난감해진다. 지난달에도 모문학지에서 <작가의 삶과 문학>의 글을 부탁하면서 좋아하는 시도 포함돼있어, /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 맘 놓고 갈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의 함석헌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를 써주었지만 좋아하는 시가 많아 난감했었다. 또 기행전문가라고 경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화유적 한군데 추천해 달라면 역시 난감하지만, 절터로는 삶이란 무엇인가의 의미를 던져주는 깊고도 슬픈 무장사지,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가슴에 안겨주는 용장사지 3층 석탑, 왕릉으로는 낭만이 흐르는 흥덕왕릉, 석양과 어우러진 왕릉으로는 진평왕릉, 쓸쓸한 비애감이드는 민애왕릉 이런 식으로 말해준다. 영화도 중학교 때 단체로 의무적으로 보는 반공영화는 별 뇌리에 없고, 자연을 배경 삼아 말 달리는 서부영화 <황야의 무법자>, <징기스칸>, <벤허> 이런 종류의 영화를 좋아했다. 명색이 책 쓰는 기행작가라 어떤 책이 좋을까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줄 그어가면서 정독을 했어도 세월이 흐른 뒤에 단 한 구절이 뇌리에 박히면 그 책은 좋은 책이다. 흔히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로 압축하는데 책 많이 읽는다고 격이 있거나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됨의 바탕과 균형 잡힌 가치관이 없으면 오히려 문자욕(文字慾), 서권독(書卷毒)이 될 수 있다. 세상 살면서 가진 자 못 가진 자 누구라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보이지 않는 행복은 무엇인가. 헬렌 켈러는 『행복의 문』에서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 그러나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고 했고, 중학교 때 보았던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 하려면 여러 가지 취미를 가져라. 이것이 싫증 나면 다른 것을 하라”는 이 한 구절은 기억해 다양한 취미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행복을 생활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짜 복은 무엇인가. 조선시대 백과사전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의 이운지 편에서 답을 찾아 내 가슴을 짜릿하게 울렸다. 성인에게 네 사람이 한 가지 소원을 말한다. 첫 번째 사람은 3정승 6판서 즉 권력을 갖고 싶다 했다. 흔쾌히 그렇게 하라 한다. 두 번째 사람은 금은보화에 부자되기를 바라니 그도 하라 한다. 세 번째 사람은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다 하니 어렵다 하면서 꼭 하고 싶다면 하라 한다. 마지막 사람은 자기 이름 석 자는 쓸 수 있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임원(林園)에 살면서 교양을 쌓으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다 하니, 성인은 다른 소원은 다 들어주어도 그것은 청복(淸福)이라며 안 된다 한다. 책을 많이 읽다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문장을 문득문득 느낄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문화를 알리고 지키는 삶을 살아오면서 문득 이 책에서 말한 청복이 내가 살고 있는 삶이었구나! 결국 어디에 살던 자신만의 무릉도원을 꿈꾸며 잔잔한 여유와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청복이 아니겠는가? 바람 고요히 흐르고 푸르다 못해 시린 하늘과 흰 구름에 마음을 맡기면, 지나온 삶의 애환이 아련히 밀려와 누구나 시인이 되는 가을날, 우리 모두 청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지 않겠는가?
지통천황이 702년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사망하였다. 그녀의 공을 말할 때 향가의 대중화에 대한 업적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향가는 지통천황에게 종교에 해당되었다. 향가는 앞서 하늘로 떠난 아들을 보호하여 주었고,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었다. 지통천황은 전국에서 향가를 잘 짓는 사람들을 찾아 불러들여 그녀의 곁에 두고 다량의 작품을 만들도록 하였다. 향가의 힘을 일본 각계에서 믿도록 했고, 적극 수용되도록 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향가가 그녀의 후원에 힘입어 봄날 화단의 꽃처럼 일본 땅에 화사하게 만개하였다. 향가는 황실을 주변으로 구성원들의 개인적 소원을 이루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수도 건설과 같은 국가적 토목사업의 성공을 위하여서도 향가가 가진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향가를 아름답게 만개시킨 지통천황을 ‘만엽향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가 불러 일으킨 향가의 꽃바람이 일본을 뒤덮었다. 현재 일본에 전해지는 4516장이나 되는 대규모 향가집의 모태가 되었다. 그녀가 사망하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그녀의 영혼을 환송하기 위해 수많은 눈물가를 만들어 바쳤다. 그중 몇 작품을 선별해 감상해 보도록 하자. <66번가> “천무천황의 큰 반려이셨던 높으신 스승께서 물가로 가신다. / 저승배들이 베틀의 북처럼 들락날락하더라도 / 배에 타지 않고 바닷가에 누워 편히 주무실 것이다. / 굳센 분이셨다” *지통천황은 운명의 힘에 의해 정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다. 남편 천무천황과 함께 일본 고대사 최대의 난이라고 하는 임신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여러 명의 비 중 유일하게 남편 천무천황을 따라가 승리에 힘을 보탰다. 천무천황의 공이 50%라면 그녀의 공이 50%라는 말까지 있다. 그래서 본 작품에서는 지통천황을 천무천황의 큰 반려라고 하는가 하면, 매우 굳세었던 분이라 하고 있다. <73번가> “우리의 세상물정 모르시는 분께서 아들에게 가려고 새벽에 나가신다. / 물가에 바람이 부는데도. / 왜국의 유순한 백성들이 울고 있다. / 아버지와 어머니가 묘에 계시니 나는 아무리 추워도 손에 입김을 불지 않으리. / 지통천황이시여, 서두르지 마시라” * 지통천황이 외아들 초벽황자에게 가려고 바람이 부는데도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새벽에 길을 나서지 않아야 하는데도 세상물정을 모르기에 길을 나섰다. 되돌아 올 수 없는 저승길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서둘러 갔다고 탄식하고 있다. <75번가> “등원경 건물 사이 산에서 불어오는 새벽 바람이 차다. / 여행길 사람들이 옷이야 응당 빌려주겠지만 /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이시여, / 남이 옷 빌려 준다고 오래 여행하시지 말고 곧 돌아오셔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