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남쪽 자락에 소담한 도봉서당(桃峯書堂)이 위치한다. 바로 평해(平海)황씨 황정(黃玎,1426~1497) 선생을 모신 도봉서당은 1545년에 추보재(追報齋)를 묘소 아래에 지었으나, 전란(戰亂)과 세월의 풍파에 훼손되어 1915년 후손들이 추보재 자리에 서원형식으로 중건하였다. 숭앙문(嵩仰門)·도봉서당·추보재·연어재(鳶魚齋)·상허당(尙虛堂) 등으로 구성되며, 류석우와 여강이씨 등 근대 문사들의 기문과 상량문이 걸려있다.
황정의 자는 성옥(聲玉), 호는 불권헌(不倦軒)으로, 『맹자』의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學不厭而敎不倦)’에서 뜻을 취하였다.
선대 황천부(黃天富)가 외삼촌 오도안렴사(五道按廉使) 오방우(吳邦佑,1313~1393)를 따라 순시하다가 경주에 머물면서 세거하였고, 조부는 황희석(黃希錫), 부친은 황상길(黃裳吉)로 경주부 남쪽 중리(中里)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인 월성손씨 슬하에 황용중(黃用中)·황처중(黃處中)·황택중(黃宅中)을 두었다.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1433~1484)와 동일 공간에 머물며 학문을 논하였고, 최진립(1568~1636)의 부친 최신보(崔臣輔)는 황정의 손녀와 혼인하는 등 지역 유림 간 혼반(婚班)으로 가까운 교류가 이뤄졌다.
황정 선생은 늦은 나이인 성종 5년(1474)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며 입신의 뜻을 이뤘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성종 17년(1486) 1월에 윤필상 등을 시관으로 삼아 경사(經史)를 외우게 하였고 으뜸을 한 황정에게 말 1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영사(領事) 윤호(尹壕,1424~1496)가 혜빈서(惠民署) 교수 황정을 경술(經術)에 매우 정통하고 또 효행이 있으니 쓸 만한 사람이라며 추천하자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에 제수되었다. 2월에는 선교랑(宣敎郞) 수(守)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3월에는 소인 임사홍(任士洪)ㆍ박효원(朴孝元)ㆍ김언신(金彦辛)은 죄가 무거우니, 직첩(職牒)을 도로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주서(周書)』 경명편(冏命篇)을 인용해 암송(暗誦)하며 정성을 다해 풍간(諷諫)하여 마침내 명을 돌이켜 강석경을 체임시켰으니, 그의 강직함을 알만하다. 이후 1493년 7월 8일, 곧은 성품으로 낮은 관직에 오래도록 침체되어 생활하기에 녹봉이 부족하였고, 왕자군교수(王子君敎授)가 되었지만 정중히 사직을 청하고 귀향하였다.
1493년 4월 1일의 실록기록을 보면, “요즘 국학(國學)이 쇠퇴해져서 유생들이 오로지 독서(讀書)에 전념하지 않으니, 매우 걱정스러워 이를 진작시키려 생각하고 있다. 듣기에 그대가 청수(淸修)ㆍ염퇴(廉退)하고, 학문이 정숙(精熟)하여 사표(師表)로서 꼭 합당하므로 이번에 성균관 전적(典籍)을 제수하였으니, 빨리 올라와서 직사(職事)에 나아가도록 하라”명하였고, 논평하기를, “황정은 경주에 살면서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는데, 과거에 합격하고서도 노모 봉양을 위해 벼슬하지 않고 본 고을의 교관(敎官)이 된 지 10여 년이 되었다. 그리고 모친이 돌아가시자 비로소 출사(出仕)하여 정언(正言)과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역임하였다. … 사람됨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며 넉넉하고 화평하여 명성과 이익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향리(鄕里)에 살면서 일찍부터 관부(官府)에 들어가지 않고, 생도(生徒)를 교회(敎誨)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10년 만에 졸하였다”전한다. 이렇듯 황정은 늦은 나이에 노모를 위해 과거에 합격해 진사에 올랐으나, 효행의 봉양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머문 진정한 학자의 행실을 보였다. 모친 사후에 여러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역시 그리 오래지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매진하였으니, 그의 행적을 연구하기에 사적(事績)이 부족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감사(監司)로서 역마타고 경주에 이르러 추정석전(秋丁釋奠)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왔다가 공이 머무는 불권헌에 이르러 황정 교관과 술잔을 나누며 시를(次不倦軒韻贈黃敎官玎) 주었는데 光, 塘, 傍, 祥, 觴 운에 맞췄다. 이후 이 시는 경주 유림의 다수가 차운하며 거듭 회자되었는데, 훗날 황정의 후손인 황백양(黃伯陽)이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에게 자신의 선조 정언공(正言公) 황정 점필재증별시를 보여주며 화답시 2수를 요구한 적도 있었다.
조선시대 경주를 무대로 활동한 선비들이 많았지만, 모두가 문집을 간행하거나 사적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직간접적으로 주변의 인물과 글을 연구하다보면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드러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이 역시 경주의 조선스토리를 연구하는 즐거움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