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막연한 바람은 사람이 태어나서 책 만권은 보고 죽어야지 생각했다. 책 욕심은 많아 돈 버는 실용서 빼고는 여러 종류의 책들을 골고루 보아왔다. 그래서 딱 한 권을 고르라면 난감해진다. 지난달에도 모문학지에서 <작가의 삶과 문학>의 글을 부탁하면서 좋아하는 시도 포함돼있어, /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 맘 놓고 갈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의 함석헌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를 써주었지만 좋아하는 시가 많아 난감했었다. 또 기행전문가라고 경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화유적 한군데 추천해 달라면 역시 난감하지만, 절터로는 삶이란 무엇인가의 의미를 던져주는 깊고도 슬픈 무장사지,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가슴에 안겨주는 용장사지 3층 석탑, 왕릉으로는 낭만이 흐르는 흥덕왕릉, 석양과 어우러진 왕릉으로는 진평왕릉, 쓸쓸한 비애감이드는 민애왕릉 이런 식으로 말해준다.
영화도 중학교 때 단체로 의무적으로 보는 반공영화는 별 뇌리에 없고, 자연을 배경 삼아 말 달리는 서부영화 <황야의 무법자>, <징기스칸>, <벤허> 이런 종류의 영화를 좋아했다.
명색이 책 쓰는 기행작가라 어떤 책이 좋을까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줄 그어가면서 정독을 했어도 세월이 흐른 뒤에 단 한 구절이 뇌리에 박히면 그 책은 좋은 책이다. 흔히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로 압축하는데 책 많이 읽는다고 격이 있거나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됨의 바탕과 균형 잡힌 가치관이 없으면 오히려 문자욕(文字慾), 서권독(書卷毒)이 될 수 있다.
세상 살면서 가진 자 못 가진 자 누구라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보이지 않는 행복은 무엇인가. 헬렌 켈러는 『행복의 문』에서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 그러나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고 했고, 중학교 때 보았던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 하려면 여러 가지 취미를 가져라. 이것이 싫증 나면 다른 것을 하라”는 이 한 구절은 기억해 다양한 취미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행복을 생활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짜 복은 무엇인가. 조선시대 백과사전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의 이운지 편에서 답을 찾아 내 가슴을 짜릿하게 울렸다.
성인에게 네 사람이 한 가지 소원을 말한다. 첫 번째 사람은 3정승 6판서 즉 권력을 갖고 싶다 했다. 흔쾌히 그렇게 하라 한다. 두 번째 사람은 금은보화에 부자되기를 바라니 그도 하라 한다. 세 번째 사람은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다 하니 어렵다 하면서 꼭 하고 싶다면 하라 한다. 마지막 사람은 자기 이름 석 자는 쓸 수 있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임원(林園)에 살면서 교양을 쌓으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다 하니, 성인은 다른 소원은 다 들어주어도 그것은 청복(淸福)이라며 안 된다 한다.
책을 많이 읽다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문장을 문득문득 느낄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문화를 알리고 지키는 삶을 살아오면서 문득 이 책에서 말한 청복이 내가 살고 있는 삶이었구나!
결국 어디에 살던 자신만의 무릉도원을 꿈꾸며 잔잔한 여유와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청복이 아니겠는가? 바람 고요히 흐르고 푸르다 못해 시린 하늘과 흰 구름에 마음을 맡기면, 지나온 삶의 애환이 아련히 밀려와 누구나 시인이 되는 가을날, 우리 모두 청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