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은 리스트의 소개로 조르주 상드(G.Sand/1804-1876)를 만난다(1836). 상드는 신(新)여성이었다. 공공장소에서 남성복(바지)을 즐겨 입고, 시가를 물고 다녔다. 유명 소설가로 사교계에서는 마당발로 통했다. 또한 1남 1녀를 둔 이혼녀이면서 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이런 여성이 보수적인 성향의 쇼팽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겠는가? 쇼팽보다는 쾌걸 리스트에게 맞는 궁합일 것이다. 쇼팽도 처음에는 이런 상드가 마음에 없었다. 하지만, 6살 연상의 능수능란한 모성애는 실연에 빠진 폐결핵 환자를 비교적 쉽게 굴복시켰다. (사실은 상드도 실연을 겪고 난 직후에 쇼팽을 소개받았다.)
쇼팽의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상드는 마침 아들 모리스의 휴양이 필요하여 쇼팽에게 마요르카(축구선수 이강인이 소속된 스페인 라리가의 팀 이름이기도 하다)에 함께 가자고 제안(1838)한다. 쇼팽이 이를 수락하는 것은 상드와의 사이가 매우 깊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소심한 쇼팽에게는 큰 고민거리였다. 파리에서 하던 일(고액레슨 등)들을 모두 중단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결국 쇼팽은 상드 그리고 그녀의 아들, 딸과 함께 마요르카에서 휴양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2년을 보낸다. 유명한 빗방울 전주곡(15번)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이후 상드는 자신의 고향인 노앙과 파리를 오가면서 쇼팽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한다.
10년 가까이 교제를 이어간 쇼팽과 상드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원인은 딸 솔랑주 때문이었다. 상드는 자신과 너무나 닮은 솔랑주를 끔찍이 싫어했다. 반면, 솔랑주와 의붓아버지인 쇼팽은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결정적인 건, 쇼팽이 상드가 솔랑주 부부에게 불허한 마차를 빌려준 사건이다. 쇼팽이 상드와 솔랑주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지만, 상드는 쇼팽이 솔랑주의 편을 든 거라 생각하고 쇼팽에게 이별을 고한다. 상드는 냉정했다.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다신 쇼팽을 찾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상드와의 이별은 쇼팽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쇼팽은 여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피아노 레슨을 받던 제자이자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유한 상속녀인 제인 스털링(J.Stirling/1804-1859)이 상드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스털링은 상드와 동갑이었지만, 둘은 판이했다. 조그맣고 다소 통통한 체형인 상드와는 달리 스털링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다. 그리고 상드는 호탕한 성격이었지만, 스털링은 내향적인 여성이었다. 쇼팽은 스털링을 연인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스털링도 이를 알았지만, 쇼팽이 죽을 때까지 극진히 보살폈고, 모든 장례비용을 댔으며, 쇼팽사후 1년 동안 검은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스털링의 제안으로 영국투어(1848)를 간 쇼팽은 병이 더욱 악화되어 돌아왔고, 이듬해 39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대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몸은 페르 라세즈(파리 도심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심장은 따로 적출하여 바르샤바 성(聖)십자가 성당에 안치했다. 21살에 폴란드를 떠나 단 한 번도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쇼팽은 죽어서야 비로소 심장 한 조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