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한 영화가 개봉되었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바보>. 차태현 주연의 영화는 관객의 호평으로 꽤나 좋은 흥행 성적을 보였다. 나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 만화를 먼저 보았다. 아마도 서점에서 내 돈으로 산 첫 번째 만화책이었을 것이다. 만화가 인문 도서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은 건 단 한 문장 때문이었다.“그 많던 동네 바보는 다 어디 갔을까?”(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의미는 같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우리 동네에도, 골목에도 조금은 우리와 다른 오빠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잊혀졌다. 요즘 서울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들의 뉴스가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어디에 있다가 나오는 것일까? 엄마가 되어, 아줌마가 되어 아이들에게 편견 없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평소에 했다. 그러나 책이나 영화에서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뉴스에 등장했을 때,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른들의 반응은 또 어떨까?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능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것에 경계심을 품는다. 엄마가 되어 장애아들에 대한 편견을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인위적인 만남보다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생각했지만,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없었다. 장애인 통계를 살피면 30만 명이 넘는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교육에 관한 관심으로 찾아가게 된 곳에서 장애인 교육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을 알게 되었고 그분들을 통해 사회 적응 훈련 중인 친구들이나 장애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모임을 통해 하나둘 접하게 되면서 어른인 나보다 아이들은 편견 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리와 시간이 다른 친구(아이들의 그들을 표현한 단어)”들을 인정하고 배려했다.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모습에도, 그건 난동이 아니라 기다려주는 시간이라고 아이들은 인지했다. 잠시 고함을 지르는 아이를 한 번 살펴볼 뿐, 다른 행동이나 불편하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시끄럽지 않았어? 불편하지 않았어?” 하고 묻자 세 아이는 그냥 “그 친구는 자기가 하고픈 것이 따로 있나 봐” “그 친구는 더 하고 싶은데, 못 하게 하니까 싫은 거야. 너도 지난번에 아이클레이 더 하고 싶다고 엄마한테 소리 질렀다가 혼났잖아” “아니야. 그 언니는 밥 먹는 것보다 노는 게 더 좋아서 그런 거야” “그래도 언니가 너무 소리를 크게 지르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참기 힘들었을 텐데, 참아줘서 고마워라”라는 내 말에, 아이는 쿨하게 답했다. “속상한 기분을 진정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거야. 사람은 다 다르잖아. 그 친구는 우리랑 시간이 좀 다른 거야” 편견 없이 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장애인 활동 지도사 교육을 받은 나는 오히려 반성했다. 책이나 교육으로 배우는 것보다, 시간이 우리랑 좀 다른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더 많이 배웠다.결국 함께 하는 사회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함께 공존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삼십 년 전, 우리가 사는 집 골목 안쪽에 몸이 조금 불편한 이모가 살았었다. 조카들이 우리집에 놀러와서 동네 꼬마들과 아주 신나게 놀고 있을 때였다. 마침 그 이모가 아이들 곁을 지나가는데 골목 아이들과 함께 조카가 다리를 저는 이모의 모습을 따라하는 것을 보고 혼을 낸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카의 잘못보다 나의 잘못이 더 컸음을 인정한다. 그 이모는 아마도 아이들이 뒤따르며 자신을 흉내 내는 것을 알았으리라. 거기에 당황해서 혼을 내는 나의 모습도. 지금 우리 사회는 삼십 년 전과 얼마나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