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에 이르는 길 안양교(安養橋) 바람이 차다. 찬만큼 시리다. 시린 만큼 눈부시다. 탑곡마을에서 골짜기로 발을 들이면 이내 고적한 풍경에 홀리게 된다. 절집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는 하나, 매혹적인 풍경에 사로잡혀 절집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탑곡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엔 가는 계절과 오는 계절의 어느 지점에 이른 듯 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탑곡’, 또는 ‘탑골’, ‘불곡’은 탑 또는 불가적인 어떤 의미가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데, 태곳적 신비가 먼저 떠오르는 건 지칭하는 말에 오래된 바람 냄새가 먼저 묻어오기 때문이리라. 곱다, 아기단풍이. 어서 오라는 듯 총천연색(總天然色)으로 제 몸을 흔든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까. 굽이치는 곳마다 실낱같은 물이 유연하게 흐르고, 눈 돌리는 곳마다 그 물에 발 담그고 일어선 잎들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을 실감하게 한다. 경주 남산은 전체가 신라 유적인 유명한 산이다. 그런 남산 중에서도 동남산은 국보를 비롯해 신비스러운 보물이 산재한 유서 깊은 곳이다. 기슭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호젓하다. 길이 어디에서 어떻게 끊어질지는 궁금하지 않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는 환상의 풍경에 사로잡혀 눈을 떼지 못할 뿐이다. 대낮인데도 어두울 만큼 숲이 우거져 마치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갸륵한 홀림의 신비는 비단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닐 게다. 물 위를 유영하는 아기단풍잎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진 무수한 별과도 같고, 아래로 낙하하는 물줄기는 신선의 세계에서 떨어져 인간의 세계를 적시는 폭포수와도 같으며, 깊은 숲 사이로 간간이 새어드는 빛은 마치 신선이 내려오는 광체와도 같다. 얼마나 걸었던가. 걷기는 했던가. 지금까지의 여정은 순간의 찰나였던가. 아니면 순간 이동을 한 것인가. 어느새 계곡 이쪽과 저쪽에 걸쳐진 다리에 이른다. 숲이 깊게 드리워진 곳이 이쪽이라면 저쪽은 환한 빛이 쏟아지는 환상 그 자체의 세상이다. ‘안양교(安養橋)’다. 이 다리만 건너면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안양정토(安養淨土)에 이르게 되리. 인간 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면 괴로움도 걱정도 없는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있다는데, 눈부시게 환한 저쪽은 그러한 곳인가. 맞을 것이다. 암, 맞고 말고. 나는 지금 아무 의심도 없이 오직 그리 믿고 싶은 게다. 아니 믿는다.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피안(彼岸) 말이다. 열반성(涅槃城)이거나 연화세계이거나 극락정토이거나 그 땅을 누가 어떻게 부르던 아미타불이 깃들어 있는 정토면 그만이지 않은가. 안양교를 건넌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레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간다. 사뿐사뿐,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안양교의 절반은 그늘이요, 절반은 빛이니 나는 더 이상 어둡지 아니하며 내 영혼은 더 이상 무겁지 아니하며 육신과 영혼이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채 곧 낙원을 경험하게 되리.         -이름 바뀌어도 여전히 옥룡암(玉龍庵)으로 ‘옥룡암(玉龍庵)’이라 새겨놓은 비석을 분명 보았다. 사찰로 들어서는 입구엔 그 흔한 일주문이나 사천왕문도 없다. 안양교만 건너면 대웅전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기는 불무사(佛無寺)다. 분명 옥룡암 명비(名碑)를 확인하고 왔는데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듯하다. 절의 사정이야 깊이 알지 못하지만, 줄곧 옥룡암으로 부르다가 2000년대 중반쯤 불무사로 사명(寺名)이 바뀌었다 한다. 그러나 찾는 이들에겐 여전히 옥룡암이다. 안양교 옆에 세워진 비(碑)의 이름을 쉬이 바꾸지 못한 것은, 어쩌면 찾는 이들이 잘못 온 듯 발걸음 돌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불무사는 일연(一然)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잠시 언급된 사찰이다. 757년 경덕왕(신라 제35대 왕)은 망덕사가 완공되자 친히 공양을 베풀어 공사를 끝낸 것을 축하하는 낙성회를 열었다. 그때 차림이 누추한 비구승이 찾아와 재(齋)에 참석하고자 했다. 왕은 비구승의 차림을 보고는 말석에 앉게 하고 희롱했다. 낙성회가 끝날 무렵 왕이 비구승에게 어디에 사는 누군지 물었다. 비구승은 비파암에 산다고 했다. 이에 왕은 비웃으며 “돌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국왕이 친히 연 재에 참석했다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승려는 공손히 몸을 숙여 인사하고 미소 지으며 은은한 목소리로 왕에게 말했다.    “청하옵건대 왕 또한 다른 사람에게 진신석가(眞身釋迦)를 공양하였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순식간에 몸을 솟구쳐 남쪽으로 날아갔다. 놀란 왕은 부끄러워하며 비구가 사라진 동쪽 산에 올라가 절하고 사람들을 시켜 찾게 하였다. 비구승이 남산 참성곡(參星谷) 바위에 지팡이와 바리때만 놓아두고 사라진 후였다. 사람들이 와서 왕에게 복명하니 왕은 비파암 아래 석가사를 세우고, 비구승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나누어 봉안하게 했다고 한다. 옥룡암의 이름이 왜 뜬금없이 불무사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진신석가를 모시고자 하는 불심 가득한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쯤으로 여기기로 한다.     -신라 승려 명랑이 세운 신인사(神印寺) 터인가? 어떤 이는 옥룡암이 통일신라시대 존재했던 절터라고 말한다. 7세기 무렵, 신라의 승려 명랑에 의해 창건된 신인종(神印宗) 사찰 ‘신인사(神印寺)’ 말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가 여기에 들렀다가 신인사(神印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도, 기와 조각도 아무런 근거가 남아있지 않아 확정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신이 점찍은 곳 ‘신인사’의 옛 터임을 믿는다.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옥룡암에서 오는 어떤 기운이 그리 믿게 하는 것이다.   신라 밀교 종파인 신인종을 창설한 이는 명랑이다. 명랑(明朗)의 자는 국육(國育)으로 사간(沙干) 재량(才良)과 남간부인(南澗夫人)의 셋째 아들이다. 두 형은 국교대덕(國敎大德), 의안대덕(義安大德)이다. 남간부인은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며, 자장(慈藏)의 누이동생이다. 한마디로 잘나가는 집안의 막내아들이다. 남간부인은 청색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꾸고 명랑을 낳았다. ≪삼국유사≫ 권 5 <신주편(神呪篇)>엔 명랑신인설화(明朗神印說話)가 실려 있다. 명랑은 좀 엉뚱한 데가 있었지만, 통일신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승려이기도 했다. 선덕왕 즉위(632)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유학 후 당 3년 뒤인 태종 9년, 즉 선덕왕 즉위 4(635)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귀국하는 길에 해룡(海龍)의 부탁으로 용궁에 들어가 어떤 비법을 전하고 용왕으로부터 황금 1000냥을 시주 받았다. 돌아올 땐 땅 밑을 잠행하여 본가 우물 밑에서 불쑥 솟아 나왔다. 명랑은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상을 장식했다. 광채가 특이했다. 그래서 절 이름을 금광사라고 했다. 신인사는 금광사를 창건하기 이전에 지은 사찰인 듯하다.         당 고종 시절이었다. 신라 문무왕 즉위 8(668)년에 당나라의 장수 이적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한 뒤, 신라를 치려 했다. 이를 안 신라가 군사를 보내 항거했다. 당 고종이 듣고서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이 두려워하며 명랑을 불러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명랑은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명랑이 어찌 벽과 지붕이 있어야만 사찰이겠느냐며 채백(彩帛)으로 가사를 만들어 두르고 초목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12명의 유가명승(瑜伽明僧)과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했다. 어찌 된 일인지 당나라 군대가 주둔한 바다에 해일이 일어 두 나라의 군대가 접전하기도 전에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명랑의 밀교 기운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일까. 옥룡암은 초입부터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리 깊지 않은 숲임에도 깊은 느낌이며, 한 곳으로 집중되는 느낌은 마치 천년을 걸어온 길인 듯 무엇엔가 홀리게 한다.*옥룡암의 이야기는 (하)편에 계속됩니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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