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興)’ ‘왕(王) 자 새겨진 기와 바람이 차다. 찬 기운도 반가운 가을이다. 숨이 막히도록 무더웠던 여름, 우리는 얼마나 힘들었던가. 여름을 잊고 이제 차갑디 차가운 계절을 반겨 맞아야 하리. 거리마다 잎들이 모여있다. 제 근원이 어디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지금, 가장 낮은 곳으로의 잠행을 즐기는 잎들을 본다. 구석이다. 더는 갈 곳이 없다. 구르고 쓸리고 밟히고, 이제 더는 밀려날 곳도 없는 곳에서 쌓이고 쌓인다. 봉긋하게 봉긋하게… 바람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온 잎 일 게다. 쏟아진 잎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마지막 빛으로 웅크린 경주다. 온통 죽음과 죽음이 산재한 도시, 옛날이나 지금이나 죽은 것들은 땅속 또 다른 세상을 꿈꾸고, 누 억년의 시간을 지나 또 다른 풍경으로 남기를 원한다. 사정동 일대를 걷는다. 환한 대낮임에도 고요가 짙다. 사정동을 걷는 건 ‘흥하다, 일어나다’의 ‘흥(興)’한 기운이 모이는 땅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경주공고가 그러한 곳이라고 한다. 경주공고는 몇 번 와 본 곳이다. 문화재청이 공식 지정한 ‘흥(興)’한 땅이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세간에서는 경주공고가 신라 첫 사찰 흥륜사(興輪寺) 터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2008년 10월, 학교 운동장 배수 공사를 하던 중 건물 구조물과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연꽃 문양의 수막새와 함께 ‘흥(興)’·‘사(寺)’·‘왕(王)’ 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나왔다. 학계는 물론 경주를 연구하는 곳곳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간 흥륜사 터의 위치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흥(興)’은 흥륜사를 의미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영흥사’를 배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라 불교와 최초의 사찰 흥륜사 흥륜사는 신라가 최초로 공인한 사찰이었다. 신라에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건 법흥왕(法興王, 신라 제23대 왕) 이었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에 비해 약 300여 년 늦게 불교를 공인했지만,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신라 최초 사찰 흥륜사 이야기는 《삼국유사》 제3권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조에는 법흥왕 불교 공인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까지 숱한 시련이 따랐다. 신라에는 토착 신앙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어 귀족이나 백성의 반대가 심했다. 그때 한 청년이 왕의 마음을 알고 “저의 목을 베시면 됩니다”하고 아뢰었다. 모든 신하가 보는 데서 자신의 목을 베어 왕의 위엄을 살리면 신하들이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고민하던 법흥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왕이 사찰을 짓겠다는데 이를 지체시키는 자가 누구냐?” 묻자 모두 겁에 질린 채 자신들은 아니라고 하며 청년을 지목했다. 사인(舍人) 직책을 맡고 있던 왕의 측근 이차돈이었다. 이에 이차돈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쳤다. 이내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며 꽃비가 내렸다. 이에 모든 신하가 놀라 떨었다. 불교를 공인함에 반대하던 이들은 왕의 말에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진흥대왕 5년 갑자년(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흥륜사는 법흥왕 14년인 527년(정미년)에 시작하여 535년(법흥왕 21, 을묘년)에 비로소 창건 공사를 시작했다.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지었다. 천경림엔 질 좋은 나무와 돌이 많았나 보다. 동량의 재목을 모두 천경림에서 벤 나무를 썼고, 계단의 초석이나 불상을 두기 위하여 만든 감실의 돌도 모두 천경림 내에서 해결했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興法) 제3 ‘아도기라’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진흥왕 5년(544년), 경주 월성 서편 금교 옆에 사찰이 들어섰다. 절의 주지는 다름 아닌 법흥왕이다.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한 후 면류관과 곤룡포 대신 스스로 분소의(糞掃衣) 즉 가사를 입고 출가수행의 길을 나선 것이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이곳에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사명을 내렸다.” 삼국유사 속 신라 불교 이야기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흔적이 실려있다. 눌지왕(신라 제19대 왕) 때 고구려에서 묵호자가 일선군(지금의 경북 선산)에 왔다. 모례 혹은 모록이 자기 집에 굴을 만들고 편히 지내게 했다. 마침 양(壤) 나라 사신이 옷과 향을 가지고 신라에 왔다. 용도를 몰라 온 나라에 수소문하던 중 묵호자가 향의 용도를 알려주었다. 때마침 왕의 딸이 병이 들어 위독하자 묵호자 향을 태워 기도하니 곧 나았다. 비처왕(신라 제21대 왕) 시절 아도화상(삼국시대 승려)이 시자 3명과 함께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왔다. 거동과 모습이 묵호자와 같았다. 사람들은 아도화상을 두고 서축 사람이거나 혹은 오나라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수년을 살다가 병도 없이 죽고, 시자 3명은 머물러 있으면서 불경을 강독했다. 가끔 신봉하는 자가 있었다. <아도본비>에 실린 내용은 이렇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녕으로 정시(위나라 제왕의 연호) 연간(240~248)에 위나라 사람 아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아도녕이 낳은 아들이 아도다. 아도가 태어난 지 다섯 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출가시켜 16살 때 위나라로 가 아굴마를 만나고, 현창화상 문하에서 불법을 배웠다. 19살이 되어 다시 어머니가 있는 고구려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말하였다. “신라로 가거라. 이 나라는 아직 불법을 알지 못하는 나라다. 앞으로 3천여 달이 지나면 계림에 성왕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절터 일곱 곳이 있다. 그중 하나는 금교(지금의 서천교) 동쪽 천경림이다. 일곱 절터이며 법수가 흐르던 땅이니 네가 그리로 가서 큰 교리를 전파하면 마땅히 그 땅의 불교 초석이 되리라” 아도가 계림의 왕성 서리에 우거하니 그곳이 지금의 엄장사다. 미추왕 2년 계미년(263)이다. 대궐에 나아가 불법을 행하고자 하니, 모두 의심하며 아도를 죽이려 했다. 미추왕 3년 성국공주가 병이 났는데 무당이나 의약이 효험이 없자 사방으로 칙사를 보내 의원을 구하였다. 아도법사가 대궐에 나아가자 공주의 병이 나았다. 왕이 아도에게 소원을 물었다. 천경림에 불사를 짓고 불교를 크게 일으켜 이 나라가 복받기를 빌고자 했다. 왕이 허락하고 공사를 시작하니 이때 나라의 풍속이 실질적이고 검소하여 띠풀로 지붕을 덮고 거기에 머무르며 강독했다. 때로는 하늘에서 꽃이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이 절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하였다. 얼마 후 미추왕이 죽으니 사람들이 다시 아도를 헤치려 하였다. 모록의 집으로 도망 온 아도는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문을 잠그고 죽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교도 끊어졌다. 이후 252년 후 법흥대왕(신라 제 23대 왕)이 514년에 즉위하여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흥(興)’ 자 새겨진 기와와 경주공고 경주공고에서 바라본다. 서천인 형산강 건너 선도산이 마주 보인다. 어쩌면 이곳은 옛날, 사람들이 왕경을 오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을지도 모른다. 강줄기를 끼고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땅이기에 천경림 숲이 우거졌는지도 모른다. 수업이 한창인 경주공고 교정을 천천히 거닌다. 옛날은 없다. 모든 게 변해버린 지금 여기가 어디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지고 찾아와 서성이는 게다. 본관 앞 정원에 이르니 석조물이 보인다. 오랜 시간을 건너온 것이리라. 신라 어느 왕을 모셨던 절의 일부인지는 모르나 여기가 ‘흥(興)’한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고인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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