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룡암 경내 삼층석탑은
바람이 매섭다. 12월 하순, 골짜기를 내려온 바람은 한기가 세서 뼛속까지 파고든다. ‘쨍~’하게 시리다는 말을 실감한다. 안양교를 건너니 하늘에 걸린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내린다. 여긴 곧 봄이 올 것만 같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 화단에 작은 석탑 한 기가 서 있다. 신라 거대한 탑들에 비하면 작고 볼품없다. 얼핏 보아 하나의 탑 같지만, 몸돌과 지붕돌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다른 탑의 부재를 섞어 하나의 탑으로 짜 맞추었을까. 어설프다. 그냥 지나치려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름의 멋이 느껴진다. 소박하다는 말이 어울리겠다. 부조상 하나 새기지 않은 밋밋한 모습이 전부다. 안쓰럽고 애처롭다.
‘작다’라는 표현은 동정과 연민을 품게 한다. 그래서일까. 탑에 연상되는 이 땅의 어떤 모습들이 있다. 들에 엎드려 흙을 일구는 아비의 모습이거나 밭을 매는 노파, 동생을 업고 물동이를 인 채 흙길을 힘겹게 걸어가는 어머니이거나 혹은 바스락히 메마른 풀숲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는 늙은 노루이거나, 혹은 평생 작은 암자에서 오직 부처를 향해 정좌하며 불도를 닦은 작은 노승의 모습과 닮았다.
지붕돌이나 몸돌 군데군데가 깨져있다. 웅장하고 거대한 국보급 신라 탑에 비하면 ‘볼품없다’라는 표현이 전부겠지만, 이 탑의 진면목은 ‘작음’에서 오는 익숙함과 정겨움이다. 보는 이와의 대등한 눈높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친근함으로 연결된다. 경주의 수많은 탑은 거대했다. 하늘에 가닿을 듯, 인간세계를 굽어보듯 압도적이다. 인간은 그런 탑 아래서 먼저 주눅 들었고, 먼저 눈빛을 꺾고, 먼저 손을 모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한마디로 탑은 신과 대등한 존귀한 존재로 우러러 봄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옥룡암 석탑은 사찰이 아닌 암자에 더 어울리는 모습이다. 언제, 누구에 의해, 왜 생겨났는지 모르나 견디어온 세월의 무게가 깊게 스며든 듯하다.
경주 남산 탑곡 제2사지 마애불상군
해가 어느새 산기슭으로 향하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눈부시다. 찬란하다. 따스한 기운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시린 기운이 물러나고 작은 암자에 포근한 기운이 맴돈다. ‘경주 남산 탑곡 제2사지 마애불상군’이라 표시된 방향을 따라가다 순간 멈칫한다. 동쪽 산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이유다. 절벽 같다. 아찔하다.
이 바위가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이다. 검은빛의 바위는 무엇을 품은 듯 먼발치에서도 묘하고 센 기운이 느껴진다. 혹시 경덕왕 시절, 누더기 차림으로 망덕사 낙성회에 참석했던 진신 석가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비구승의 누추한 행색을 본 왕이 업신여기며 비웃을 때 “누구에게도 진신 석가를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 하고 날아가 남산 참성곡(參星谷)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바리때만 놓아두고 사라졌다 하는데 혹시 이 바위가 아닐까. 뒤늦게 후회한 왕이 비구승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우고 지팡이와 바리때를 나누어 봉안하게 했다는데, 그렇다면 근래 옥룡암의 이름을 ‘불무사’로 바꾼 것도 이 바위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것을 대할 때는 눈과 입, 심장이 동시에 반응한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선각(線刻), 묘하고 센 기운이 느껴진다 싶던 바위는 뒷산이나 지키는, 마냥 흔한 바위가 아니었다. 사방 가득 채워진 선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탑이 서있고, 부처가 나타나고, 사자와 비천인이 나타난다. 사방에 마애 부처가 가득하다.
높이 10m 둘레 30m의 거대하고 웅장한 바위에 탑, 하늘을 나는 비천상(飛天像), 동물상, 보리수 등 모두 34점이나 그려져 있다고 한다. 빈틈이 없다.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어느 방향에서 보던 부처는 만다라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불상, 보살상, 스님의 조각상, 비천상 등 사람에 가까운 형상만 23구에 이른다. 어디 이뿐이랴. 바위 면적이 가장 넓은 북쪽 면에는 좌우 9층 탑과 7층 탑을 각각 새겼고, 그 사이 위쪽에는 연화대좌에 앉은 석가여래본존불과 천개를 새겨 신령스러움 더한다. 마치 여기가 영산정토(淨土淨土)를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세간엔 여기 새겨진 탑이 황룡사 9충 목탑과 같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북면에 새겨진 형상만으로도 이곳은 하나의 법당 같다. 그러니 사방에 벽을 세워 지붕을 얹고 비바람을 막아 부처를 모시는 법당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위 사방 면을 가득 채운 선각을 보노라면 마치 여기가 천상과 지상의 중간, 부처가 있는 극락정토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부처를 향해 서 있으면 바위에서 어떤 주술적 언어가 흘러나와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로 넘어온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시간을 잊고 공간마저 초월한, 신성한 에너지가 감도는 곳 말이다. 바위에 매달려 부처를 새긴 석공은 아마 또 다른 세계의 음성을 들었을 테고, 그 말씀조차 바위에 새겼으리라.
탑곡 마애조상군과 경주 남산 탑곡 제2사지 삼층석탑
조금 더 올라가니 너른 터와 삼층석탑, 그리고 제법 사실적인 마애불들이 객을 맞는다. 경주 남산 탑곡 제2사지 삼층 석탑 역시 신라 탑들에 비해 왜소한 편이다. 하지만 섬세하고 예리한 면을 볼 수 있다. 마애불들과 서로 마주하며 범접할 수 없는 불심의 기운을 주고받는 듯하다.
마애불 바위 앞에 약 2m 높이의 입불상이 있다. 광배는 없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지만, 신체의 곡선이나 손의 모습 등은 완전히 남아 기품을 더한다. 어깨의 곡선과 볼록한 가슴, 짤록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와 왼손을 아랫배에 얹은 모습은 마치 임신한 여인의 모습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다산과 순산을 염원하는 여성적 불상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육사가 머무른 요사채 삼소헌
옥룡암 경내로 내려오니 대웅전 오른쪽에 위태롭게 서 있는 요사채 한 채가 보인다. 비·바람을 막으려는 듯 임시 가림막이 요사채의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삼소헌((三笑軒)’ 현판이 처마 아래 숨은 듯 걸려있다. 이곳은 베이징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5.18.~1944.1.16.)가 잠시 머무르며 요양했던 곳이다.
1936년 서른둘의 육사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옥룡암에 들어와 시 ‘청포도’의 초고를 썼다고 한다. 1942년 서른여덟, 육사는 다시 일경의 눈을 피해 약 한 달가량 머물며 포항까지 가 독립지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자신보다 네 살 아래인 신석초에게 기다림을 담아 편지를 쓰곤 했다. 석초에게 쓴 편지에는 약 석 달 정도 머무를 것이라 했지만 일경의 감시가 심해 발각될 것을 우려해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열일곱 번의 옥고로 몸에 병이 들었고, 언제 발각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앞날이 참담했을 게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겨울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한다. 육사의 몸 구석구석에 스며든 병처럼 한기가 느껴진다. 방문을 열어젖히니 병든 육사가 구석에 앉아 부지런히 무엇인가 쓰고 있다.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빡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집 식탁엔 은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李陸史). <청포도> 전문-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