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정사는 안동권씨 구봉(龜峰) 권덕린(權德麟,1529~1573)이 강학(講學)하던 장소를 말하며 서사(書社)에서 변천되었다. 본래 안강읍 양월리 구성(龜城) 아래에 있었으나 1651년에 안강읍 두류(頭流)마을로 이건하였고 근대에 와서 중건되었다.
권덕린은 회재 이언적의 문인으로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을 따랐고, 회재의 작은 아버지 이필(李苾)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고조 권수해 - 증조 권효충(權孝忠) - 조부 권명추(權命錘)- 부친 권계중(權繼中)의 가계를 이루며, 모친은 양성이씨(陽城李氏) 이세주(李世柱)의 따님으로 권덕기(權德麒), 권덕린(德麟), 권덕란(德鸞) 3형제를 두었다. 게다가 그의 아들은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1557~1634)으로 의병장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회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스승이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억울하게 강계로 유배 가자 안강 양월리 구성(龜城) 아래에 구봉서사를 짓고 두문불출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1553년 유배지에서 돌아가신 스승의 영구(靈柩)를 길에서 맞이하였다.
회재의 제자에 대해서 「동국문헌록」에는 구봉․김자(金磁)․사내(四耐) 안경창(安慶昌,1524~?)․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 등을 언급하였고, 「유학연원록(儒學淵源錄)」에는 매곡(梅谷) 배숙(裵璹,1516~1589)․호정(昊亭) 김세량(金世良,1502~1571)을 포함해 6명을 언급하였다. 다만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1631~1695)의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는 구봉 뿐이다. 회재는 오랫동안 이어진 관직생활과 유배 등으로 인해 제자를 두고 수학할 기회가 적었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다만 고향인 옥산과 양동을 머물며 지역의 유림들과 교유하였고 적지 않은 후학을 양성하였을 것인데 그의 학문적 연원을 논하는 가문이 그리 많지가 않다.
경주부윤을 지낸 허엽이 지은 「옥산서원기」에 “합천군수 권덕린 공은 회재 이 선생의 제자이다(陜川郡守權公德麟 晦齋李先生之學徒也)”라 명시한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1553년(명종8) 문과 급제를 시작으로, 1557년 예조정랑, 1560년 회덕현감, 1566년 하동현감 공덕으로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1570년 노모 봉양을 위해 영천군수, 1571년 옥산서원 건립의 조력자로 회재학을 계승하였다. 1572년 합천군수 공덕으로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지고, 1573년 곤양군수(사천시)로 부임하는 길에 안타깝게도 병을 얻어 45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묘갈명,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는 행장,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이 묘지명 등을 지었다.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1788~1861)은 문집 서문에서 “회재의 문하에서 도를 듣고 전수한 자가 매우 드물었다. … 만일 회재가 유배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미진한 연구를 궁구하여 실천의 공부를 발휘하였을 것이다”라 하였고, 훗날 후손 권치복(權致福)이 유문을 모아 문집을 완성하였다.회재의 학문을 사사받은 권덕린은 안강에서 서사를 건립해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에게 수학한 지역의 많은 유림들이 회재의 학풍을 기억하며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회재 이언적의 학문적 평가와 유학의 도통연원 성립이 확고해지는 그날을 기약하며, 지금도 구봉정사는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고, 중수기문과 첨모당기(瞻慕堂記)가 그 내력을 간직한 채 걸려있다.
귀봉 권덕린 공 묘갈명 - 청대 권상일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이 매우 엄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회재 이언적 선생에게 수업하였다. 선생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말씀이 적어서 와서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유독 권덕린의 뜻을 가상히 여기고 재주를 좋아해 이끌어 도와줌이 지극하였다.
정미년(1547:양재역벽서사건)에 선생께서 관서지방으로 유배가자 학문을 마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구봉(龜峯) 아래에 작은 집을 짓고는 문을 닫고 고요히 처하며 서사(書史)를 탐구하고 토의하였다. … 계축년(1553)에 급제하였고, 그해 겨울에 선생의 부고를 듣고는 길 도중에서 영구(靈柩)를 맞이해 돌아왔다.
타고난 자질이 똑똑하고 성품이 본래 효도와 우애가 있었다. 모친을 봉양하고 효성을 다한 후에 동생 첨정공 권덕란(權德鸞)과 한 책상에서 화목하였다. 회재 선생을 정성으로 존경하고 흠모하기를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초당 허엽이 「옥산서원기」에서 그를 칭찬하였고, 남계 박세채의 「동유사우록」에서는 회재의 제자로 권덕린 한 사람만을 언급하였다. 글은 모두 전쟁으로 흩어져 잃어버렸고 단지 과거시험의 두 시권(試券)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