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오산에 기거한 명나라 장수 편갈송은 귀화인으로 『경주의 조선스토리』에도 생소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관련 명나라 귀화인으로 지리에 밝은 두사충(杜師忠), 천만리(千萬里) 등이 유명하고, 경주 관련해서 편갈송(片碣頌) 장군이 있으며, 그의 제단(祭壇)이 금오산에 있다. 편갈송은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자는 경수(景修), 호는 모헌(慕軒)이다. 명나라 신종 때 어양총절사(漁陽摠節使)로 임진왜란에 이여송 장군과 함께 동정명군총병사(東征明軍摠兵使)자격으로 평양성 탈환작전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중군도독(中軍都督)으로 다시 출병해 울산 서생포 왜구 섬멸에 큰 공을 세우며, 조선에서 숭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절강편씨는 본래 남송(南宋) 때 중국 7현에 속하는 문정공(文靖公) 이동(李侗)의 9세손 이지(李址)가 명나라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편씨(片氏)를 하사 받아 이씨에서 편씨로 그리고 절강을 본으로 삼았다. 서생포 왜성은 왜놈이 한반도 점령을 위해 일본과 가까운 남동 해안에 세운 성 가운데 하나로,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하였다. 1598년 11월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가토와 구로다 등이 부산포 왜성에서 일본으로 귀국길에 오르면서 서생포를 벗어났다. 이에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와 편갈송이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에 입성하였고, 이듬해 마귀는 서생포왜성 안에 창표당(蒼表堂)을 지어 축하하였으며, 편갈송은 사후에 창표당에 배향된다. 훗날 그의 후손들이 1987년 울주군 서생포 왜성 동쪽에 「유명어양총절사동양도독중군유격장모헌편공갈송기적비(有明漁陽摠節使東揚都督中軍遊擊將慕軒片公碣頌紀蹟碑)」를 세웠다.     전쟁이 끝나고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은 편갈송은 울산과 가까운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은거한다. 당시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무고로 인해 명나라가 어지럽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돌아가지 않고 몸을 금오산에 숨겼고, 이후 아들 편풍세(片豊世), 편풍원(片豊源), 편산보(片山甫) 등도 금오산에 와 함께 살았다. 편갈송 사후에 아들 편풍세와 편풍원은 전남 나주(羅州)에, 편산보는 전북 만경(萬頃)에 정착하였다. 전라도 유림의 계청으로 1860년에 수교(受敎)와 예조궐문이 내려졌고, 후손 편영기(片瑛基) 등이 거주하는 나주에 감명사(感明祠)를 세워 이여송·마귀·편갈송 등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1865년에 흥양[고흥]의 편곤옥(片崑玉) 등이 그의 선조가 임진년에 공이 있어 부조지전(不祧之典)을 청하는 일도 있었으니, 지난날 받은 깊은 은혜를 잊고 사는 우리들은 참으로 미안함 마음이 든다. 금오산 포석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좌측에 저수지가 보이고, 저수지 반대편 산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편갈송의 제단이 나타난다. 제단의 비석에는 『有明欽差經略都督騎步官朝鮮防海禦倭都督府都督中軍漁陽摠節使兵部尙書摠督諸軍門 慕軒 片公之壇』이라 적혀있다. 편갈송은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병(猿兵) 제독 마귀의 부장(部將)으로 참전하였다. 원병은 글자 그대로 원숭이 부대를 말하며, 편갈송 장군이 이들을 지휘하였다. 실제 원숭이를 전투에 투입한 것인지 아니면, 원숭이 모습처럼 재빠른 움직임을 갖춘 군사의 원병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상주출신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1813~1872)은 「서편총절실기후(書片總節實記後)」에서 “임진왜란 군사에 관한 일을 비교하여 논함에 평양(平壤),소사(素沙),한산(閒山),행주(幸州) 사대 전투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소사가 아마도 사대 전투의 하나가 되지 않으리오. 만약 소사에서 전승(全勝)한 이유를 거론한다면 원군(猿軍)에게 있지 않겠는가?”라고, 원숭이 군대의 전투승리를 강조하였다. 소사평(素沙坪)은 직산과 평택 및 안성의 경계부로, 이 지역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가 군사들과 함께 원병을 이끌고 왜적을 혼란에 빠뜨려 큰 공을 세운 곳으로 유명하다.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1824~1894)의 「소사첩(素沙捷)」을 보면, “정유년에 왜구가 다시 쳐들어왔다. 양호(楊鎬), 마귀 제독이 평양에 주둔해있는데 자루의 칼이 저절로 소리를 내었다. 양호가 ‘이는 기이한 징조입니다’라 하고는, 곧 날센 기병 몇을 선발해 이틀밤낮으로 달려 경기의 소사 들판에 당도하였다. 적을 만나자 마침내 정예 기병을 다리 아래에 매복시키고, 원군(원숭이 군사)를 선대(先隊)로 하여 반무(盤舞)를 추며 전진하자, 적들이 보고 깜짝 놀랐다. 원군이 갑자기 진영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창을 휘두르니 적병 모두가 혼란해하였다. 이에 천자의 군사가 기세를 틈타 치고 들어왔고, 왜구 중에 죽은 자가 들과 강을 메울 정도였다”라며, 소사평 전투에서 원병의 활약을 언급하였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