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문무대왕면은 본래 신라 때 악지현(惡支縣), 약장현(約章縣)으로 불리었고, 6부 가운데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에 속하였다. 고려 때는 가덕부(加德部), 조선 때는 동해면으로 불리었고, 현재는 24개리로 개편되었으며, 그 가운데 앞산의 형상이 물고기를 닮은 벽촌마을 어일리(魚日里)가 자리한다.   경주부 동해면 어일리 출신의 연일정씨 지로(篪魯) 정광리(鄭光履,1722~1799)는 학교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낙후된 곳에서도 학문을 계승하고 선비의 뜻을 이루었다. 특히 학문의 뜻을 돈독히 하고 지향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빛났으니, 바로 지노옹이 이곳에서 흥기하였다. 실상 조선 500년 이래로 경주부 급제자 280여명 가운데 교육적 환경이 열악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2명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다고 하니, 진사 지로 정광리는 어일의 자랑임이 분명하다. 정광리는 고조부 정종복(鄭終福), 증조부 정태원(鄭台元), 조부 정필웅(鄭弼雄), 부친 정득형(鄭得衡)의 가계를 이루고, 위로 형 훈로(塤魯) 정광복(鄭光復,1716~1796)이 있다. 월성최씨 사성공 최예(崔汭)의 후손인 최봉채(崔鳳彩)의 따님과 혼인해 정계조(鄭桂祚),정백조(鄭柏祚),정수조(鄭樹祚) 3남 그리고 정주조(鄭柱祚),정관조(鄭觀祚) 서자를 두었으며, 대대로 가학을 이었다. 일찍이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1661~1719)의 제자인 역락당(亦樂堂) 김유일(金惟一,1683~175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스승 김유일은 경상좌도 의병도대장 월암(月菴) 김호(金虎)의 막내아들인 김이홍(金以弘)의 현손이다. 1750년(영조26) 식년시 진사 1등 4위로 합격하였으나, 평소 벼슬에 마음이 없어 ‘노촌(魯村)’이라 편액한 공간에서 선비의 수신(修身)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행하며 살았다. 대표적인 제자로 신암(愼菴) 안경열(安景說,1712~1779)이 있으며, 경주부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 등과 깊은 교유를 하였다. 제자 안경열은 영천출신으로, 17세에 종형 경시(景時)와 함께 지로·훈로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763년(영조39)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조봉대부(朝奉大夫)에 봉해졌으며, 나아가 사헌부감찰에 올랐다. 사후에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이 묘갈명을,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는 “헌걸찬 외모의 출중한 선비, 동해바다 적막한 곳에 살았네. … (팔순에 가까운 백발노인) 자연의 순리에 운명을 따르고, 좋은 사람 묻힌 곳 더욱 슬프네.”라고 만사를 지었다. 문집으로는 형 정광복의 글들을 엮어 간행한 『훈지노연방집(勳地盧聯芳集)』이 전한다.     -정 진사 지로옹 묘갈명(鄭進士篪魯翁墓碣銘)-구암 이수인 동해면 지로(篪魯) 정광리(鄭光履) 옹이 돌아가신 지 20년에 그의 아들 정계조(鄭桂祚)가 늙고 병들어서 아들 정돈상(鄭敦相)으로 하여금 가장(家狀)을 갖고 나[이수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는 “우리 선대의 무덤에 삼 척의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지금 다행히도 돌을 갖추었습니다. 이에 선생께서 좋은 지난날을 생각하시어 몇 줄의 글을 아끼지 마시고 혼령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바라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늙음을 핑계로 거절할 수가 없어 가장을 살펴보았다.   지옹(篪翁) 정광리는 자가 사겸(士謙), 본관은 영일로,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이 상조(上祖)가 된다. 정남(鄭楠)에 이르러 만력 말에 원주(原州)에서 경주의 동해 집으로 들어왔다. 어려서 총명하였고, 조금 자라자 집안이 가난하고 벽촌인 것에 슬퍼하여, 책을 지고 가서 우암 남구명의 문인 역낙옹 김유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이때부터 분발해 학문에 힘썼는데, 경서를 몸에 지니고 호미질하고, 나무하면서 책을 읽으며, 부지런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윽고 문사(文詞)가 날로 성취해 명성과 명예를 크게 얻었다. 기사년(1749) 가을 복시(覆試)에 합격하였고, 다음해 봄 사마시에 제 1등으로 급제하였으니, 사람들 모두가 그를 영화롭게 여겼다. 만년에 기거하는 마을에 서사(書社)를 짓고 스스로 지로옹(篪魯翁)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어일(魚日)’을 (위아래) 합하여 편액하였으며, ‘지(篪)’를 더한 것은, 백씨 훈노옹(塤魯翁:정광복)과 서로 수창(酬唱)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학도를 모아 가르침을 펼쳤는데, 초하루에 꼭 강석(講席)을 주관하고, 어려운 것을 묻고 과제를 고찰하며 게으름을 잊었다. 이때부터 마을에 책 읽는 소리가 많아지고, 배우는 아이도 종종 성취하는 효과가 있었다. 일찍이 모친을 섬기는데 병이 나자 손가락 피를 내어 정성을 다하였으며, 형 훈로옹(塤魯翁)을 섬김에도 우애와 공경이 지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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