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경주역이 있는 건천읍 화천리에 신도시 높은 아파트와 대조적으로 조선의 역사가 서린 화강서당(花岡書堂)이 자리한다. 필자는 우연히 기차역을 지나다 화천1리 마을 길을 내려가는데 큰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화강서당은 옥산전씨 화천문중에서 1993년에 건립한 것으로 무관 파수(巴叟) 전계신(全繼信,1562~1614)을 모신 공간이다. 입구 앞에는 1993년에 세운 ‘화강서당 중건기’와 1977년에 세운 ‘화강사(花岡祠)휴허비’ 비석이 세워져 있고, 유허비는 도로편입으로 2009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계신은 대구 수성구 파잠리(巴岑里;파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 역시 마을 이름을 따서 ‘파잠의 노인’ 즉 ‘파수’로 불리었고, 그의 후손들은 선조의 뜻을 기려 파수정(巴叟亭)을 세우고, 『파수선생실기』를 편찬해 그의 업적을 추모하였다. 증조부 전순손(全順孫), 조부 전익견(全益堅)의 가계를 이루고, 부친은 사재감정 전련(全璉), 모친은 달성배씨(達城裵氏)로 전숭년(全嵩年)·전계량(全繼亮)·전계의(全繼義)·전계례(全繼禮)·전계지(全繼智)·전계신·전계충(全繼忠) 등 자식을 두었다. 그 가운데 전계신은 전천행(全千幸:청도)·전득행(全得幸:화천) 두 아들을 두었고, 그의 후손들이 각각 청도와 경주 화천 등지로 흩어져 세거하였는데, 전득행이 경산에서 경주에 이거하면서 경주 건천읍 화천리 집성촌의 입향조가 되었다. 무관 전계신은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패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별시 무과에 합격해 무관이 되었고, 경상도우후·함안군수·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불리한 전세에 경상 좌수영의 동료 권응수(權應銖), 안이명(安以命) 등과 창의를 도모하였고, 청도를 거쳐 팔조령을 넘어가는 길목인 협곡에 매복해 왜놈을 섬멸하였으며,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과 인동·예천·안동·기장·흥해 등 경상도 여러 곳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아쉽게도 161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관직을 수행하다가 안주(安州)의 관서(官署)에서 병으로 죽었다. 전계신은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사후에 청도의 임곡서원(林谷書院)과 경주의 화강사에 제향되었다. 후손들이 화천2리에 화강서당을 지었으나,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다시 화천1리에 파수정을 건립하였으나, 태풍으로 소실된 것을 근대에 와서 문중에서 다시 화강서당을 건립해 현판을 걸었으니, 애틋한 후손의 마음이 전해진다. 전계신의 의병장 기록은 남원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자주 등장한다. 뛰어난 의병 활동으로 2019년 11월에 그를 위한 파동의 무동재(武洞齋) 동쪽에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무동재는 전계신의 육촌 형 전경창(全慶昌,1532~1585)이 학문을 닦던 계동정사(溪東精舍)의 옛터에 지은 재실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경상도 체찰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추천으로 승려 유정(惟政)을 따라 일본에 회답사(回答使)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국왕 원가강(源家康)의 간절한 화친을 확인하기 위해 1601년·1606년 회답사로 대마도에 두 차례 파견되었다. 선조 25년(1592) 9월에 일본군이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과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靖陵)을 파헤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덕천가강(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이 먼저 국서(國書)를 보내고, 임진왜란 때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을 붙잡아 보내야 한다는 조건에 대한 이행 여부를 확인하고, 아울러 일본의 정세를 정탐하기 위하여 전계신 일행이 파견되었다.  이때 귤광련의 아들을 알아보고 위로의 말을 전하였고, 이 일을 경상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조정에 보고해 부산에 귤광련의 사당을 건립하기에 이른다.『난중잡록』에 의하면, 의를 위해 죽은 대마도 작은 두목 귤광련(橘光連:유즈야 야스히로;橘康廣)이 있었다.  귤광련은 1590년 임진왜란 발발 이전부터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조선에 내빙(來聘)하였는데, 겐소(玄蘇) 등과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명나라를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라고 조정에 고하였는데도, 그 말을 믿지 않고 결국 왜놈이 쳐들어와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한탄스럽다. 오봉 이호민의 글 가운데 「전계신이 일본 승려 겐소의 편지에 답하다(全繼信答玄蘇書)」가 전한다. 의병창의 그리고 임란 이후 회답사로 큰 역할을 맡은 전계신과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화천마을은 조선의 경주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창구가 되며, 이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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