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토함산 터널을 지나 장항리에서 옛 도로를 타고 감포방향으로 가다보면 좌측으로 기림사와 골굴사(骨窟寺) 진입표지가 나타난다. 조금 더 가다보면 골굴사가 나타나는데 일주문을 통해 들어서면 맨 안쪽 큰 바위 정상부에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그 아래로 조성된 석굴이 드러나는데 그 웅장함이 인간세상의 것이 아닌 듯 착각에 빠지게 한다. 「기림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시대 불교문화가 번창하던 6세기경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 일행이 함월산 지역에 정착하면서 기림사[임정사(林井寺)]와 골굴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조계종 불국사의 말사인 함월산 골굴은 骨屈·骨窟·骨堀寺·骨窟石窟·骨窟庵 등으로 표현되고, 현재 골굴사는 12처 천생석굴 가람을 응회암 절벽에 조성한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으로, 남방불교의 수행법 선무도(禪武道)로 유명하다. 광유성인은 석사모니의 전세상의 이름 또는 삼국시대 최조로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월인석보(月印釋譜)』 가운데 「원앙부인의 극락왕생 연기」에서 “옛날 범마라국(梵摩羅國) 임정사에 광유성인이 500 제자를 데리고 계시면서 대승과 소승의 법을 가르치셔서 중생을 교화하시더니, 그 수는 끝까지 다 헤아리지 못하겠더라”라고 그의 존재를 언급하였고, 세속에 전하길 그는 임정사에서 50년간 수도하면서 천안통(天眼通)과 숙명통(宿命通) 그리고 타심통(他心通)을 얻었다고 한다. 골굴암 석굴은 그 이름만으로 시인묵객의 궁금점을 자아내어 경주를 방문하면 꼭 한번 들르는 명승지로, 토함산의 석굴암과는 다른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명암(明庵) 정식(鄭栻,1683~1746)은 「관동록(關東錄)」에서 “토함산으로 들어가니 골굴이 있는데, 제일 명승지였다. 바위 끝에는 숙소가 있는데 은은하게 공중에 매달린 것이 여섯 곳이었다. 이날 밤 바위 문에 앉아 밝은 달과 짝하니 마음은 아득히 인간세상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라고 별천지 경관을 가진 경주의 제일 명승지로 평가하였다. 활산 남용만은 장항산기(獐項山記)에서 “정관산(鼎冠山)은 유달리 우뚝 일어나 동해의 진산(鎭山)이 된다. 하나의 지맥이 남으로 향하여 먹줄을 걸어 놓은 듯 수직으로 내려와 100여보를 낮게 가서 제일봉을 이루고, 남쪽으로 조금 가서 제이봉이 된다. 동쪽에서 하나의 지맥이 동쪽을 향하여 가다가 돌아서 남쪽으로 달려가는데, 왼편은 골굴을 만들고, 오른편으로 뻗어나간 지맥은 잇달아 솟아올랐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천태봉(天台峯)을 만들고서야 멈춘다”라고 장항산과 함월산의 지맥에 대해 언급하였다.       덕봉(德峯) 이진택(李鎭宅,1738~1805)은 1802년 함경남도 삼수(三水)로 귀양 가면서 지은 북정일기(北征日記)에서 “10월 29일. 몽천암(夢天菴)에서 묵었다. 암자는 삼일포(三日浦) 네 면이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 아래에 있는데 마치 기림사의 골굴과 같았다”라고 강원도 고성을 지나며 기암절벽 아래의 몽천암을 보고는 고향 경주의 기림사와 골굴에 대한 향수를 일으켰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함월산 서쪽 산기슭 한쪽 면에 12 석굴이 있는데, 시렁과 처마 그리고 들창으로 석실을 만들었고, 위 아래로 거듭 겹쳐 만든 것이 매우 기이하였다”라고 석굴의 형상에 대해 묘사하였다. 내헌(耐軒) 이재영(李在永,1804~1892)도 두 벗과 함께 동해바다를 따라 유람하며 골굴 등의 승경을 보았다. 시암(時庵) 남고(南皐,1807~1879)가 남긴 「爲觀骨窟 出秖林洞口」 5언율시가 전하고, 어느 날 나귀를 타고 홀로 골굴을 유람하고 돌아왔는데, 문득 흥취가 소연(翛然)하였다며 구속이 없이 초탈한 모습의 골굴을 표현하였다. 이들 외에도 많은 문인들이 ‘골굴’에 대해 글을 남겼으니, 당시 골굴의 기이한 모습을 보기위해 산길을 굽이굽이 돌았을 것이다. 함월산과 가까운 암곡동에 기거한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골굴을 찾아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하늘 깊이 감춰진 기이한 골짜기, 만겁 세월의 바둑처럼 푸른 여섯 굴. 세 번 변화 후에 고색은 짙고, 좋은 인연으로 나그네 다시 찾아왔네. 종횡 새겨진 가늘 글자에 거친 이끼, 굽고 야윈 잣나무 가지는 비껴 자랐네. 난간에 기대어 읊조리고 한바탕 웃고, 지난해에 지은 시를 보러 다시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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