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출신의 노석(老石) 이능섭(李能燮,1812~1871)은 회재 이언적의 11세손으로 무첨당 옛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엄숙하고, 몸가짐이 굳세고 순수하였으며, 무리의 아이들과 놀 때 걸음걸이는 망동하지 않고, 책을 읽을 때는 암기를 잘하였으며, 찾아내 연구하지 않아도 문리가 풍부한 아이였다.   고조부 이헌조(李憲祖)·증조부 이정하(李鼎夏)·조부 이원상(李元祥,1762~1813)의 가계를 이루고, 부친 이재정(李在正,1788~1839)은 풍산류씨 부인에게서 이능현(李能玄,1808~1846)을, 문소김씨 부인에게서 이능섭·이능립(李能岦)·이능혁(李能奕,1819~?)을 두었다. 광주이씨 이정운(李定運)의 따님과 혼인해 아들 이인구(李寅久,1828~?)·이용구(李容久)와 3녀를 낳았다. 1848년(헌종14) 대증광시(大增廣試)에서 병과 28위로 문과 급제하였고, 경주부윤·자인현감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향리에서 잘 생활하여[善居鄕] 특별히 사애(沙厓) 민주현(閔冑顯,1808~1882)의 상서로 인해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855년 홍문관의 교리(校理)ㆍ수찬(修撰)을 선임하기 위한 1차 관록(館錄), 2차 도당록(都堂錄) 선거 기록에 올랐다. 참고로 교리ㆍ수찬의 선임은 7품 이하의 홍문관원이 방목(榜目)을 조사하여 뽑힐만한 자를 초하여 내고, 홍문관 부제학 이하 응교(應敎) 등이 이에 원점(圓點)을 부하게 하고, 이 원점 하나를 1점으로 하여 득점자 순으로 후보자를 선출하였다. 이후 1870년(고종7)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며 수신과 후학양성에 힘썼다. 사후에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묘비명, 내헌(耐軒) 이재영(李在永,1804~1892)이 가장(家狀) 그리고 진암(進菴) 정교(鄭墧)·시암(時庵) 남고(南皐)·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등이 만사를 지었다. 신미년(1871) 3월 도승지에 임명되고, 6월부터 9월까지 짧은 기간 경주부윤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제출하여 체직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9월에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13일에 타계해 북안면 장동리에 장사지냈다. 고종 8년(1871) 6월 20일에 경주부윤으로 제수된 기록이 있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내헌 이재영의 「가장(家狀)」에 상세히 적혀있다. 경주부윤 재임 기간에 뚜렷한 행적은 드러나지 않지만, 체직 이후 1871년 10월에 남도(南道)에 선정비가 세워진다. 양남면 하서리 도로변에서 발견된 선정비와 불망비는 황성공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경주읍성 안으로 옮겨졌다. 선정비 앞면에는 ‘府尹李相公能燮祛瘼善政碑’라고 적혔고, 내용을 살펴보면,伊昔東封 有監有吏 아득한 옛날 동산의 봉표(封標) 감독하는 관리가 있었다네 弊由玆生 害無不至 폐단이 여기에서 나와 해로움이 이르지 않음이 없었지만 幸賴我侯 擧受其賜 다행히 우리 군수 덕분에 모두가 은혜를 받았네 刻石紀功 海濶山峙 돌에 새겨 그 공로를 기록하니 바다처럼 넓고 산처럼 우뚝하네 거막(祛瘼)은 폐단을 없앤다는 뜻으로, 나라에 목재를 조달하는 봉산(封山)의 채벌과 관련해 아전의 농간과 비리 등으로 부윤 이능섭이 피폐한 백성의 고충을 덜어준 것에 대한 칭송의 의미가 담겼다. 그의 업적을 논하기에 문집이 전하지 않는 점이 매우 아쉬울 따름이다. 1574년에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옥산서원기」를 지었다. 세월이 흘러 이능섭의 아들 이인구가 허엽의 후손인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을 찾아가 부친의 묘비명을 청하였으니, 그 인연이 깊다. 이조참판 이 공 묘비명(吏曹參判李公墓碑銘) - 성재 허전 회재선생은 나의 선조이신 초당 허엽 선생께서 일생을 공경하고 사모하였으며, 들어서 배운 스승으로 여겼기에, 『회재집』「발문」과 「옥산서원기」 모두 선조께서 지었고, 동재와 서재 및 누각의 명칭 역시 이름하였으며, 선생의 묘소에 제사지낸 글이 후손과 자손에게 남아있으니, 어찌 대수롭게 친하게 지낸 집안과 견주리오. 내 선친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옥산에 참배하였고, 나 역시 옥산에 참배하였으며, 이능섭 공 역시 우리를 형제처럼 여겼으니, 같지 않은 것은 성씨뿐이다. 공[이능섭]은 나[허전]보다 15살이나 적지만, 공은 마땅히 부군의 명(銘)을 지었고, 나도 차마 공의 명(銘)을 짓는다. 공의 아들 상사(上舍) 이인구가 나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깊이 있는 말로, 선친을 알고 글을 주고받은 사람 가운데 다만 지금 세상에 오직 부자[허전]만 남았습니다. 부자의 연세가 팔십으로 아침저녁으로 안위를 모르기에, 바람과 눈의 위험을 무릅쓰고 천리를 달려 내가 있는 마을에 당도해 가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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