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金虎,1534~1592) 장군은 증조부 김이권(金以權), 조부 김원좌(金元佐)의 가계를 이루고, 경주부 남쪽 월남(月南) 식혜동(識慧洞)에서 부친 김숙린(金叔麟)과 분성김씨 김한보(金漢輔)의 따님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몸집이 크고 호걸의 기상을 지녔으며, 무예가 출중하여 1570년 무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를 역임하였고, 평소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집 월암(月菴)에 거처하며 수신을 닦았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1599년 종질 김홍기(金弘器)의「월암선생실기」가 전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주부사 윤인함이 성을 버리고 죽장현으로 달아났으나, 59세의 김호 장군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활과 화살을 끼고 길목을 지키며 용감히 적과 맞섰다. 그의 용기와 담력, 뛰어난 지략으로 남면대장(南面大將), 즉 ‘적을 향할 뿐 물러서지 않는다’는 칭호를 얻었고, 힘써 싸우다가 안타깝게도 계연(雞淵:서천) 부근에서 8월 5일에 전사하였다. 권복흥(權復興)·이팽수(李彭壽)·이희룡(李希龍)·이문진(李文軫) 등과 함께 의병장 동도오절(東都五節)로 불리고, 선도산 동쪽 산자락에 그의 묘소가 있으며, 활산 남용만이 묘갈명을 지었다.
정씨부인을 만나 김이충(金以忠), 김이관(金以寬), 김이홍(金以弘) 등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 김이충은 주부(主簿)로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여 1599년에 호종(扈從) 공신록에 올랐고, 둘째 김이관은 내금위(內禁衛)로 망우당 곽재우 진영에 나아가 많은 공을 세웠으며, 곽재우의 증손인 곽원갑의 용사창의록(龍蛇倡義錄)에 실렸다. 셋째 김이홍은 효행이 드러나 참봉을 지냈고, 수문장으로 전공이 높아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김호의 부인 역시 남편을 따라 곡기를 끊어 정절을 지켰다고 전하니 집안의 충절은 고을의 사표가 된다.
김호 장군의 의로운 행실을 기리기 위해 유림의 참여로 1757년 4월에 비로소 관직을 추증하는 분황제(焚黃祭)를 올렸고, 훗날 순조 31년(1831) 금오산 서쪽에 남강사(南岡祠)를 건립해 향제를 행했으나, 고종 5년(1868)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남강사 건립 당시 지역의 많은 유림이 참여하였고, 1841년 3월에 참봉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1799~1870)이 「남강사우상량문」, 1843년에 「봉안문」 등을 지었으며, 1843년 3월에 곡산한씨 석산(石山) 한문건(韓文健,1765~1850)이 「강당상량문」, 8월에 여강 연주(蓮洲) 이재립(李在立,1798~1853)이 상향축문(常享祝文) 등을 지었다.
한문건은 남강사 강당 상량문에서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을 언급하며 백성의 터전인 성을 빼앗기는 왜란의 급박함을 표현하였다. 당나라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수양성(睢陽城)이 반란군에 포위되자, 성 안에 양식이 고갈되면서 사람들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하지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수양은 강회의 보장이다. 만약 이 성을 버리고 떠나면 적이 반드시 승세를 타고 깊이 쳐들어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강회는 없게 될 것이다”라고 끝까지 수양을 지키다 전사하였는데, 김호 장군의 구국을 위한 충심을 이에 비유하였다.
강당 상량문 - 석산 한문건
충신이 적개심을 불태우고 순절하였으니 열기가 천지에 뻗치고, 고을사람에게는 공의 의병창의가 오래도록 남아있다. 현자를 숭상하는 강당은 상서(庠序:학교)를 모방하였고, 비로소 백년의 생각을 이뤘다. … 월암 김 선생은 경주의 수재로 금오산의 맑은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용맹함과 마음속에는 공후(公侯)에게 윤허됨이 있었다.
장성해서는 수기치인의 공부를 닦고, 뜻은 평소 군자의 장수(將帥)에 있었는데, 궁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급제하여 비로소 무예로 출신하였다.
월암 그윽한 거처에서 선비의 자취를 감추며 조용히 살아가는데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이 창궐하였고, 임금께서는 서쪽 변방으로 난을 피해 떠나는데, 가시밭 같은 전쟁 길에 분노하였다. 여러 성(城) 가운데 영남이 무너지고, 강회(江淮)의 보장(保障), 즉 진주성마저 잃어버린 이 때에 충심을 떨쳐 눈앞에서 천만인이 반드시 징벌한다는 대중의 마음을 격동시켜 의병을 일으켰다.
언덕의 좋은 땅을 선택해 … 주초를 놓으니 실로 옥을 다듬은 바탕이 되었다. 유(劉) 목수가 가까운 곳에 있는 재목을 베어 대들보를 삼았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완공되었다.
1843년 3월에 삼월 일에 진사 곡산 한문건이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