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노헌(魯軒) 권응생(權應生,1571~1647)은 의병장 그리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인으로 경주의 이름난 학자였다. 고을 유림의 동조로 1795년 안강읍 두류리에 권응생의 위패를 모신 향불천(鄕不遷) 부조묘(不祧廟)가 세워졌으나, 근래 두류공단 조성으로 두류이주단지(두류두동길 34-12)로 이건되었다. 새롭게 조성된 모현문(慕賢門)을 열고 들어가면 충현묘(忠顯廟)가 바로 보인다.
권응생은 평소에는 바른 인품으로 학문을 대하고, 국난에는 창의하여 충을 세운 인물로, 고조부 권명추(權命錘) - 증조부 권계중(權繼中) - 조부 권덕린(權德麟)의 가계를 이룬다. 부친 권사의(權士毅)와 모친 광릉안씨 안윤조(安胤祖)의 따님 사이에서 밀양 삽포리(鈒浦里)에서 태어나 가학을 계승하였다.
어려서 총민하였고, 22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경주 내남 계연(雞淵)전투, 문천회맹, 영천성 탈환작전 등에서 활약하였고, 김호 장군과 노곡전투, 경주성 수복작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팔공산회맹과 화왕산회맹에도 참가하였다. 여주이씨 근재(謹齋) 이경홍(李慶弘)의 따님과 혼인해 슬하에 권기(權旡)·권임(權恁)·권도(權燾) 세 아들을 두었고, 모두 여헌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대암(大庵) 박성(朴惺),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쌍봉(雙峰) 정극후(鄭克後) 등과 교유하였고, 특히 1638년에 권응생은 정극후와 함께 『동경지(東京誌)』를 편찬하였다. 스승 장현광이 제자 권응생[자 명세(命世)]에게 보낸 편지에서 “듣자하니, 『동경지』 편찬이 아직 정서(正書)하지 못했다 하니, 이는 진천(鎭川:권응생) 그대가 눈 치료에 겨를이 없고, 효익(孝翼:정극후)이 혼자 감당키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병을 회복하는 겨를에 생각을 지극히 서로 권해서 기필코 완성하길 기약한다면 아마도 큰 다행이지 않겠는가? 고을의 선비들이 멀리서 찾아오니 그 마음이 진중(珍重)하나 다만 늙고 혼몽하여 그릇된 요구에 응할 수 없어 많이 부끄럽네. 일전에 마침 새로 부임한 부윤이 방문하였기에 잘 조처해 줄 것을 청하였고, 모름지기 제때 사업을 끝마치도록 부탁하였으니, 생각건대 기필코 범범하게 보지 않을 것이네”라고 하였다.
장인 이경홍의 『철감록(掇感錄)』에는 김성일의 참모 박성으로부터 소모밀양사민통문(召募密陽士民通文)을 받아 참전한 의병관련 내용이 있으며, 사위 권응생 역시 의병활동에 영향을 받았다. 사후에 경주 기계현 가천리(駕川里) 산막동(山幕洞)에 장사지냈고, 다시 이장되었다가 기계에 다시 묻혔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봉사(奉事), 직장(直長), 평구도찰방(平丘道察訪) 등을 역임하였으며, 진천현감으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폭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밀양에 돌아가서 손기양(孫起陽) 등과 교유하다가, 만년에 안강으로 돌아와 형강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집중하였다. 임진왜란 때 당숙 매와(梅窩) 권사악(權士諤)과 작은아버지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 등과 함께 주민과 노복으로 의병을 조직하였고, 화왕산성에서 망우당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다. 학림(鶴林) 권방(權訪)이 서문을, 궁오(窮悟) 임천상(任天常)이 발문 등을 지은 『노헌유고』가 전하며, 사후에 쌍봉 정극후, 우복 정경세가 제문과 만사, 여와 목만중이 묘갈명,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이 행장 등을 지었다. 지역 유림이 권응생 사후 150여년이 지난 후에 그의 업적에 대해 평가하고, 향불천에 처한 일은 참으로 합당하다. 이제 그의 업적을 제대로 드러내어 후대의 귀감이 되도록 노력할 때이다.
권진천 묘갈명(權鎭川墓碣銘) - 여와 목만중
권응생의 자는 명세(命世), 스스로 노헌(魯軒)이라 불렀다. … 어려서 문예(文藝)에 일찍 성취하였고, 장성해서는 폭넓고 빼어났다. 부친이 매번 칭찬하며 “우리 가문의 업을 잇는 자가 여기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에 종숙 권사악, 서숙 권사민과 눈물을 쏟으며 창의하여 팔공산에서 여러 의병장과 모여 망우당 곽재우을 따라 산성을 수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니, 이때 겨우 약관의 나이였다. … 진천현감에 제수되어 백성을 잘 다스렸고,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동의보감』 한질을 하사하였으니, 사람들이 영화롭게 생각하였다.
공은 평소 벼슬에 마음이 없었고, 밀양 옛 별장으로 돌아와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과 덕과 의로 학문을 익히니, 사람들이 어우러져 대종(大宗)으로 삼았다. 이윽고 다시 동도 옛집으로 돌아와 서적을 낙으로 삼고, 만년에 형강의 빼어난 산수를 좋아해 호수 가에 정자를 짓고 철마다 왕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