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대(利見臺)는 아들 신문왕이 부친 문무왕의 유지에 따라 장사지낸 뒤 추모하여 대를 쌓고 바라보았는데, 큰 용이 바다 가운데에 나타났다. 즉 용이 나타난 것을 본 장소가 이견대이다.
『고려사』 속악(俗樂) 이견대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왕 부자가 오랫동안 서로 헤어졌다가 만나게 되어 대를 쌓고 서로 보았으니 부자의 기쁨을 다하였다. 이를 노래로 지어 부르고, 그 대를 ‘이견대’라 하였으니, 이는 『주역』의 이견대인(利見大人:대인을 만나면 이롭다)의 뜻에서 취한 것이다. 왕 부자는 서로 잃어버릴 이치가 없는데, 혹은 이웃 나라에서 만난 것인지, 아니면 인질로 가게 되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견대 명칭은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등장한다. 임오년(682) 5월 7일에 이견대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는데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긴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얼마 후 신문왕이 그 산에 오르자 동해의 용이 왕에게 검은 옥대를 바쳤고,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라며 섬 위에 솟아 있던 대나무를 베어다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거라는 만파식적 이야기를 전한다.
이견대와 만파식적 피리의 관계는 문무왕과 신문왕 부자의 인연을 허황된 괴이함으로 표현하였지만,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아져 있다. 감포 나정리에 만파식적을 기리기 위한 만파정(萬波亭)이 있었다고 전한다. 본래 나정리는 경주부 동해면이었으나, 1895년(고종32) 장기군(長鬐郡)에 편입되어 내남면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군에 편입되어 고라리와 상정리를 병합하여 나정이라 하였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1580년 여름에 경주부를 둘러보았는데, “길가에 한 쌍의 탑이 있는데, 신라의 감은사(感恩寺) 터이다. 바닷가에 투숙하여 비로소 큰 바다를 바라보았는데, 안개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바람에 이는 파도가 마치 산과 같아서 하늘과 물이 맞닿아 형상을 분간할 수 없었다. 동쪽 산 한 줄기는 곧장 바닷가로 달려와 한쪽 모퉁이에서 끊어졌는데, 깎아지른 듯 서 있는 바위는 높이가 십여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단청(丹靑)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으니, 이른바 이견대이다”라고, 높은 벼랑 위의 잘 보존된 이견대를 언급한다.
우와(寓窩) 이덕표(李德標,1664~1745)는 1704년 가을에 “앞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길가에 우뚝한 오래된 탑을 바라보았는데, 이곳은 감은사의 옛터였다. 무당과 박수들이 그 아래 둘러 모여서 실끈을 줄에 매어 종이돈을 달아놓고 둥둥 춤을 추며 굿을 하니, 이곳 역시 고개 아래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기도하는 곳이었다. 다시 1리쯤 나아가니 이견대 유허지에 다다랐다. 일찍이 대사(臺榭)가 있어서 기우(祈雨)하기 위하여 치재(致齋)하고, 사신을 대접하던 곳인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거친 풀밭이 되어 버렸다. 다만 넓은 바다를 보면 끝없이 넓고 넓은데, 상선과 어선들이 그 아래로 왕래하였다”라고, 폐허가 된 이견대와 기우제, 공무적 용도 등으로 활용된 사항을 언급한다.
묵헌(黙軒) 이태수(李泰壽,1799~1857)는 1847년 9월 8일에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30리를 가서 만파정에 올랐다. 넓은 바다가 아득하였고, 수평선 끝이 보이지 않았으니, 넓디넓은 박식함이 있어도 오히려 새는 바가 있고, 칠원(漆園)의 호접몽 과장된 이야기 역시 다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라고, 유가적 선비답게 만파적에 대한 괴이한 얘기를 장자(莊子)의 ‘나비의 꿈’ 이야기처럼 허황되다 말한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는 1857년 늦봄에 “동해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 저녁에 동해창(東海倉)에 도착하였다. 만파정 앞은 끝없이 넓은 바다가 가까이 있고, 바닷물은 바람도 없이 스스로 물결쳤다. 파도는 그치지 않고, 잔잔한 바람이 겨우 스쳤다. 물이 솟구쳐 뒤집히고, 벼랑에 서로 세게 부딪혔으며, 서해와 비교해 갑절이나 위험하다고 느꼈다”라며 거친 동해바다의 모습을 그렸다.
만파정의 존재는 16~19세기 경주유람기에 등장하는 이견대와 함께 등장하는데, 1580년 이전의 이견대는 벼랑 위에 채색된 건축물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잡풀이 무성한 폐허로 남았고, 만파정은 감포 나정리에 세워졌으나,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호려 (蒿廬) 서숙(徐塾,1820~1882)·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지암(止菴) 정헌교(鄭獻敎,1876~1957)·남강(南岡) 현찬봉(玄燦鳳,1861~1918)·만각재(晩覺齋) 이동급(李東汲,1738~1811) 등 문인의 글에 만파정이 등장하는 것을 미뤄보면 이견대보다 훨씬 후대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문무왕과 용에 얽힌 설화의 바탕에는 지역·지리적 정보도 포함되기에, 지금이라도 이견대와 만파정의 위치정보와 건립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되찾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