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程子)는 “옛날에는 25가(家)에 숙(熟)이 있고, 당(黨)에 상(庠)이 있고, 술(術)에 서(序)가 있어, 대체로 들어가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8살에 소학에 들어가고, 15살에 그 준수한 사람을 뽑아 대학에 들어가도록 하고,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은 돌아가서 농사에 종사했으니, 삼로(三老)가 마을 문에 앉아, 나가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장유(長幼)와 진퇴(進退), 읍양(揖讓)의 순서를 살펴, 그 익힌 것을 관찰하였다”라 하였으니. 이는 인구의 비례에 따라 학교를 설치하여 가르친 것을 말한다. 가은(稼隱) 최종한(崔宗翰,1713~1761. 자 君翼)과 제암(霽巖) 최종겸(崔宗謙,1719~1792. 자 伯益,伯源,子益)은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1568~1636)의 사당이 바라보이는 공간에 봉암서재(鳳巖書齋)를 짓고, 국가에서 영위할 학교의 개념을 집안에서는 실천하는 첫걸음으로 서재를 건립해 자제를 가르쳤다. 안동출신의 예안이씨 하지(下枝) 이상진(李象辰,1710~1772)은 “무릇 가(家)에는 숙(熟)이 있고, 당(黨)에는 서(序)가 있다. 삼대의 이른바 학교라는 곳은 인륜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륜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보다 큰 것이 없고, 신하되어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식되어 부모에게 효도함은 직분의 소당(所當:마땅함)이 되고, 성명(性命)의 밖에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직분의 소당지지(所當之地) 즉,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언급한다. 이상진은 증조부 이유장(李惟樟), 조부 이봉조(李鳳朝), 부친 이재기(李載基)의 가계를 이룬다. 16세에 풍천임씨 시암(是庵) 임화세(任華世,1675~1731)의 따님과 혼인해 이인성(李寅晟), 이인항(李寅沆) 아들을 두었고, 25세에 처가가 있는 경주를 유람하였다. 이때 경주의 벗들을 만나 시문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하였고, 평소 학가산과 태백산 등을 유람하며 자연의 이치를 익혔다. 그는 장인 임화세의 행장을 지었는데, “어려서부터 병산서원을 출입하였는데, 욕되게도 공의 인정과 장려가 매우 두터웠다. 간혹 고언(瞽言)을 드려도 공께서는 빙그레 웃으시고 잘못이라 하지 않았다”라고, 장인의 곧고 인자한 인품에 대해 말하였다. 병곡(屛谷) 권구(權榘,1672~1749),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60)의 문인으로, 이광정(李光庭), 이상정(李象靖), 조보양(趙普陽) 등과 교유하였고, 40이 넘은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귀향해 『대학』·『논어』·『중용』·『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탐독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상진은 최종한 생전에 고위산과 금오산 사이를 함께 오갔고, 상서장을 배회하며 고운 최치원의 자취에 대해 물었으며, 매월당에서 고아한 풍치를 느꼈다. 하지만 최종한이 죽은 지 한참이 지나서 최종겸의 편지를 받고서 뒤늦은 회한이 생겨 붓을 들어 기록한다. 최종한이 선대의 유업과 후학을 위해 최씨의 글방을 건립하고자 한 의미를 최종겸이 이를 되새겼으니, 진실로 이 마음은 가문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으려는 진심이 담겼다. 봉암서재기(鳳巖書齋記) - 하지 이상진 신묘년(1771) 겨울에 벗 월성 최종겸(崔宗謙) 자익이 내가 머무는 누추한 곳을 방문하였는데, 오래도록 옛이야기를 나눴다.   또 “십수년 전에 족형 최종한(崔宗翰) 군익 군과 가숙(家塾:글방) 건립을 의논하였고, 자제들이 유람하고 휴식하는 공간으로 삼고자 장차 재화를 모아 땅을 정하였는데, 때가 되어 공사를 시작했으나, 최군익 군이 불행히도 죽고, 최종겸이 족형 최종한의 부지런한 뜻을 차마 잊지 못하고, 문중의 여러 젊은 사람과 어려운 형편에도 힘을 모아 나무를 베고 땅을 구입하여 이천(伊川)의 남쪽 봉암(鳳巖)의 위에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대략 일을 시작한 지 몇 달 경인년(1770) 음력 2월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고, 마침내 봉암서재(鳳巖書齋)라 편액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승경이 경주부 십리 들판을 압도하고, 계림 천년고도가 두루 바라보였다. 동쪽에는 백운곡 용산의 선원(先院)이 있고, 동북쪽에는 금오산과 고위산이 드넓게 우뚝 일어나 있는데, 아침 구름과 저녁 안개는 만상의 변화를 부리니 이것이 경치의 대략이다. 최종겸이 옛 친구의 시를 두루 청하였고, 각각의 시가 있으며, 그들도 나를 위해 기록하였다. 아! 이 서재는 어떤 서재인가 하면 최씨의 서재로 선조 정무공 최진립의 사우(祠宇)가 동쪽에 우뚝하여, 비록 잠시나마 그 위엄에 읍하는 자는 격앙되어 머리털이 쭈뼛해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하물며 정무공의 후손으로 아침저녁 마주하여 밝은 정신이 흘러넘치니 어찌 사모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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