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최(三崔)는 신라 말기와 후삼국시대에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던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후백제를 도운 최승우(崔承祐), 고려의 최언위(崔彦撝,868~944) 등 최씨 3인을 말한다. 이들 모두가 6두품으로 골품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하였고, 빈공과에 급제해 신라인의 명성을 떨쳤다. 최치원은 868년 당 유학 이후 885년에 신라로 귀국하였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 반면에 최승우는 890년 당 유학 이후 귀국해서는 후백제 견훤 정권에 참여하였고, 최언위는 886년 당 유학 이후 신라 효공왕 13년(909)에 귀국해 집사성시랑(執事省侍郎)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에 임명되었으나, 고려 건국 이후에는 태자사부(太子師傅)로 임명되었다. 또한 문한(文翰)의 일을 맡았고, 고려 궁궐의 액호(額號)를 도맡아 적었으며, 귀족들이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경주에서 태어난 최언위는 신라 태대각간(太大角干) 최유덕(崔有德)의 먼 후손으로, 아명은 최신지(崔愼之)·최인연(崔仁渷)이다.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며, 어릴 때부터 글을 잘해 문장에 능하였으며, 최치원(崔致遠)의 사촌동생으로 11살이 어렸다. 헌강왕 11년(885)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하였고, 아들로는 최광윤(崔光胤)·최행귀(崔行歸)·최광원(崔光遠)·최행종(崔行宗) 등을 두었으며,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신라 골품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 유학을 선택한 그였지만, 당나라가 멸망하고 다시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한시, 서예에 조예가 깊지만, 고려를 섬긴 인물로 평가되어 신라의 문인으로 불리기에는 절조(節操)가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앙엽기(盎葉記)」에서, “신라의 충신 최치원에 비해 최언위는 세 나라를 섬겼고, 아들 최광윤ㆍ최행귀ㆍ최광원 역시 각 나라를 섬겼으니, 실로 보기 드문 일로서 전국(戰國)시대에는 간혹 있었던 일이다”라며 최언위의 섬김에 대해 언급하였다. 아들 최광윤은 빈공진사(賓貢進士) 합격 후 진(晉)에 들어갔었고, 최행귀도 오(吳)ㆍ월(越)에 유학하여 비서랑(秘書郞)이 되었으며, 최광원도 종4품의 비서소감(秘書少監)을 지낼 만큼 아들 모두가 역량이 빼어났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동사강목』에서 “최승우는 일찍이 적 견훤을 위하여 격문을 썼고, 최언위 또한 고려 태조의 총애하는 신하가 되었지만, 최치원이 여기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은둔으로 세상을 마친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라고 문사의 지조에 대해 언급하였다.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1760~1839)은 「삼국관풍록(三國觀風錄)」에서 “최언위는 예부시랑 설정규(薛廷珪,?~925)가 주관한 시험에서 급제하였다”라고 전한다. 설정규는 하동사람으로, 당 희종 895년 진사에 올라 상서좌승·예부상서 등을 지냈다. 『고려사』에 “최언위는 경주사람인데 신라 말기, 18세로 당에 들어가 예부상서 설정규와 같은 방(榜)으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때 발해의 재상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광찬(光贊)이 함께 급제했는데, 소도가 당에 사신으로 와서 보니 그 아들의 이름이 언위의 밑에 있었다. 그래서 표(表)를 올려 ‘신이 옛날 입조(入朝)해서 급제했을 때 이름이 이동(李同)의 위에 있었으니, 이제 신의 아들 광찬도 당연히 언위의 위에 올려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언위의 재주와 학문이 훨씬 우수했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라며 그의 뛰어난 학문을 언급한다.   그의 문학적 역량은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오진(朗圓大師悟眞)탑비명」, 정토사 「법경대사자등(法鏡大師慈燈)탑비명」, 해주 수미산 광조사 「진철대사(眞澈大師)비명」, 양평 용문산 보리사 「대경현기(大境玄機)탑비명」, 충주 미흘산 용두사 「법경대사자등(法鏡大師 慈燈)탑비명」,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澄曉大師)탑비명」, 신라 서운사 낭공국사(朗空國師)의 행적 「백월비」 등을 통해 가늠할 수 있고, 서법(書法)에도 출중하여 최치원의 부탁으로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사(聖住寺)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의 글씨를 썼다. 신라의 인물이지만 고려의 신하로 기록된 최언위. 신분을 극복하고자 당나라 유학을 택하였지만, 당나라가 망하면서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고려 왕건의 신하가 되어 정2품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그가 고려에 귀부한 시점과 이유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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