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세우다                                       정지윤   동대문 원단 상가 등이 굽은 한 노인 햇살의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숫돌에 무뎌진 손가락 쉼 없이 갈고 있다 지난밤 팔지 못한 상자들 틈새에서 쓱쓱쓱 시퍼렇게 날이 서는 쇳소리 겨냥한 날의 반사가 주름진 눈을 찌른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눈초리를 자르고 무뎌진 시간들을 자르는 가위의 날 꽉 다문 노인의 앞니가 조금씩 닳아간다 늘어진 얼굴에서 힘차게 외쳐대는 어허라 가위야, 골목이 팽팽해지고 칼칼한 쇳소리들이 아침 날을 세운다     새해에 떠올려 보는 무심의 투명한 아름다움    새벽마다 우리를 방문했던 지난 삼백예순다섯 형체의 날이 다 사라지고, 이루지 못한 회오와 아픔을 새길 새도 없이, 어느새 내 앞에 막막하게 다가와 있는 새 모습의 날! 그를 가까스로 팔을 벌려서라도 맞아들여야 하지만, 이 부끄러움, 어색함을 어디 가서 풀어볼까. 오늘은 시인의 발걸음을 따라 시장으로 가보기로 한다.   시인은 “동대문 원단 상가” “햇살의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숫돌에 가윗날 가는 노인을 본다. “지난밤 팔지 못한 상자들” 틈에서 꺼낸 가위의 “쓱쓱쓱 시퍼렇게 날이 서는 쇳소리”를 듣다가, 마침내 잘 갈린 날의 반사가 노인의 “주름진 눈을 찌”르는 광경을 본다. 노인의 얼굴에 스민 웃음도 슬쩍 훔쳐보았을 것이다. 그렇다. 모든 일들은 우선 자신을 만족시켜야 한다.   다시 노인을 응시한다.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를 가지기에 “사방에서 날아오는 눈초리” 그 타자의 시선과 간섭을 자른다. 스스로의 “무뎌진 시간들”도 자른다. 가위의 변용 이미지가 상투성에서 벗어나 미학적 갱신을 이루는 순간이다. 그렇다. 노인에게 중요한 건 꽉 다문 입속 “앞니가 조금씩 닳아”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자신을 가는 몰입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겨우 알아챈다. 왜 시인이 첫수 종장을 “숫돌에 무뎌진 가윗날 정성껏 갈고 있다”에서 “숫돌에 무뎌진 손가락 쉼 없이 갈고 있다”로 개작했는지를. 시인은 결국 노인이 가윗날을 통해 힘겨운 자신의 나날을 “쉼 없이 갈고 있”었음믈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시인은 노인이 “늘어진 얼굴”일랑 생각도 않고 자신의 일에 대한 득의의 신명을, “어허라 가위야” 골목에 풀어내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놀라워라. 그 소리에 “골목이 팽팽해지고” 아침마저 “날을 세”우는 경이를 보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극한 정성이 사물(가위)뿐만 아니라 둘러싼 공기마저 출렁이게 하고 하루를 벼리는 이 무심의 투명한 아름다움을 우리는 이 시에서 만난다.   등이 굽었다 했으니 노인은 아마 족히 여든쯤은 되었을 것이다. 그 노인은 시끄러운 상가에서 오로지 자신 속으로 들어가 생애를 다해 가윗날을 갈았고, 하나를 제대로 갈았을 때마다 신명을 풀어냈다. 그 ‘날’이 노인 삶의 광채를 만들어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의, ‘우리’ 모두의 ‘날’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타자의 시선 그 억압에서 벗어나 얼마만한 정성으로 내가 하는 일의 ‘날’을 세우는가? 그리하여 하루하루를 신명으로 열어가는가? 자신의 하는 일의 ‘날’을 세워 빛나게 하는 일은 달리 보면 하루의 ‘날’을 세우는 일이 아닐 것인가. 날(刀)에서 날(日)을 읽는 마음으로 새해를 살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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