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천
신필영
발목이 가느다란
초식동물 눈빛 같다
상류쪽 맑은 물에
은어 떼로 튀는 햇살
길나선
외나무다리
혼자 내를 건넌다
‘사이’로 발견하는 존재의 비밀
한 폭 그림 같은 단수다. 사물이 순한 동물의 모습으로 화육되면서 우리의 시각이 범하는 구분이 얼마나 근시안적인가를 통찰하게 하는 시편이다.
“외나무다리”의 ‘다리’라는 시니피앙에서 이 시는 발아한다. 유쾌하지 않은가? ‘다리 이미지’는 bridge에서 순식간에 leg으로 이동한다. 이 이동은 사람이 건너는 것을 ‘외나무다리’가 건너는 쪽으로 사유와 형상이 전개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시인은 여기서 다른 미적 속성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다리라는 신체의 아랫 부분인 발목, 그것은 흐르는 물의 도움을 받아 “초식동물 눈빛”으로 일체화되고, 거기다가 “맑은 물에” 튀는 햇살이 언어 떼가 되는 경이까지 마음속에 녹여낸다.
마침내 외나무다리와 물, 햇살 같은 존재 양상들은, 새로운 하나의 풍경으로 서로 소통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더 깊어지는 지점은 가느다란 발목을 가진 외나무다리가 내를 건넜으면 사라져야 함에도 이 건넘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별 맛 없이’ 보이는 것에서 신필영 시인의 단수가 이루어낸 ‘별난 맛’의 정체다. 그것은 그의 시가 있는 그대로 보는 평면성이 아니라 적(寂)의 ‘사이’에서 작동하는 사물과 자연 생명, 우주 존재의 비밀을 발견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입증한다.
사물이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는 근저에는 어떤 내밀한 바탕이 있는 것일까? 앞의 시편에서 일정 부분 드러났듯이 그의 시편들에서 우리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이미 전개의 약속을 내장하게 하는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질료는 사물과 생명을 촉촉이 젖게 하는 ‘온기’이며 ‘물’이다.
꽃 보러 오는 봄비/그 비에 피는 꽃들//만남은 이리 함께 젖어드는 일이던가//전송할/그 사람 사이/비 오고 꽃이 진다(「간이역에서」 전문)
여기서 봄비와 꽃들, 사람 하나 할 것이 없이 개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없다. 관계성의 작용이다. 비 오는 날 철로변에 핀 자잘한 꽃, 그렇다. 하늘의 기운인 비는 땅의 생명인 꽃을 보러 먼 길을 내려오고, 그 비가 질료가 되어 개화를 한다. 화자는 이 둘의 만남을 보고 “만남은 이리 함께 젖어드는 일이”란 사실을 수긍한다.
화자는 어떤 이를 전송하게 이르는데, 그날도 비가 왔고, 그 비에 꽃이 져버리는 걸 확인한다. 태어남과 죽음에 ‘젖어듦’이 다 함께 관여함을 또 알게 된다. 그러나 깨달음보다 높은 층위에 이 시는 있다.
한 사람을 전송하는 사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그 사이가 꽃에게는 그의 생을 다하는 시간이 된다는 엄연한 사실 말이다. 이게 ‘사이’로 바라보는 존재의 비밀이다. 이 때 ‘사이’(betweenness)란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것의 존재를 말하기 위하여 요구되어지는 시공간 혹은 ‘터’(locus)를 가리키는데, 사이를 형성하는 최소한 두 상대가 마주하지 않는 한 발생하지 않는다. 꽃의 개화를 본 화자인 내가 어느새 낙화를 보게 되는데, 화자는 비를 통해 이미 우주의 이치와 자연의 이법을 깨달은 자로 격상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과 ‘꽃 ’사이, 이런 살아있는 시간의 층위를 발견해내는 시선을 우리는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다. 모든 게 ‘비’가 생성과 소멸을 잇는 존재라는 걸 알게 하는 인식이다. 여기서 ‘비’는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있다’(Being)를 ‘잇다’(Fügung)로 만드는 촉매다.
‘사이’의 시간이 여운으로 작동하는 시가 주는 아름다움은 우리 시단의 새로운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