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멸
김소연
그녀는 성냥을 한 장 사진의 꼭짓점에 가져다 대었다 불이 붙었다 세 장의 사진을 불 속에 던졌다 열 장의 사진 스무 장의 사진 혼자서 찍은 사진 모두 함께 찍은 사진 들이 불길 속에서 그녀의 얼굴들이 불길 속에서 일그러졌다 아기였던 얼굴 청년이었던 얼굴 면사포를 쓴 얼굴 눈을 감은 얼굴 들이 불길 속에서 잠시 환했다가 금세 검은 재가 되었다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라지는 것 같군 사라지는 걸 배웅하는 것 같군 불길 같은 이런 기쁨 조용하게 출렁이는 이런 기쁨 정성을 다해 추락하는 황홀한 기쁨 검정 같은 깨끗한 기쁨 불 속에서는 재가 된 것과 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두 가지만 남겨져 있었다 입에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눈에는 불이 담겨 있었다 주문진의 바다와 노고단의 구름과 비둘기호의 창문 바깥이 차례차례 깨끗하게 타들어갔다 사진에 담아보았을 리 없는 그녀의 작은 미래가 빨간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그 불씨들마저 꺼졌을 때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그녀가 오래 기다려온 장면이었다 그 속에서 그 안을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온기마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혼자 남았다는 것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은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다 타버린 뒤에도 남는 기름이라는 역설
분멸은 태워 없앤다[焚滅]는 말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형성해왔던 소중한 기록물인 사진을 태워 없애버리는 그녀의 행위와 장면, 표정, 심리가 강렬하게 드러나는 시편이다.
불쏘시개가 된 한 장 사진 위에 그녀는 세 장의 사진, 열 장의 사진 스무 장의 사진을 태연하게 던진다. 그녀 전 생애의 얼굴들이, 그녀가 다녔던 공간들이 잠시 환했다가 금세 검은 재가 되”는 것을 본다.
그러면서 호젓하게 중얼거린다.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라지는 것 같”다고. 그걸 “배웅하는 것 같다”고. 독자들은 그녀가 “조용하게 출렁이는 기쁨”으로 “검정 같은 깨끗한 기쁨”의 상태가 되는 것을 쉬이 긍정하지 못한다. 시인은 왜 자신의 사진을 태우면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추억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녀는 빨간 불씨처럼 남아 있던 “그녀의 작은 미래”마저 “꺼져버린 완전한 암흑” 속 “혼자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앉아서. 살아온 생애는 물론 “면사포를 쓴 얼굴”로 추측되는 가족의 모든 것을 버리고 단독자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를 다 태우는 의식을 통해 그녀는 단련되려 하는 건 확실하다. 그녀는 ​타협의 여지를 주는 “온기마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느껴지는 고독. 단호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최후의 정관(靜觀)” 다음의 “그녀는 남은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는 결구에서 묘한 힘을 발견한다. 추억이나 미래의 생각이 돋아나는 족족 계속해서 태울 거라는 의지 말이다.
다만 한 가지! 그녀는 “불 속에서는 재가 된 것과 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두 가지만 남겨겨 있었다”고 한다. 계속 태우고 또 태우려 한다. 그녀는 진정 이러한 과정만을 반복하려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 구절들은 묘하게도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됩니다”라는 만해의 「알 수 없어요」라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만해가 윤회와 재생이라는 종교적 구원의 역설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면, 시인은 지금까지 자신을 살게 한 과거와, 혹은 어줍잖은 미래에 대안 예기(豫期)마저도 다 태워버린 혼자라는, ‘무소의 뿔’ 같은 자유인의 의지를 갈망하고 있어 더 싱싱하고 윤기 나는 기름이 된다.
시인은 어느 글에서 “어떤 쾌락은 이전까지의 쾌락을 소멸시키며 등장한다”는 말을 썼지만, 그 지점에서 이 극명한 고독의 아름다움을 해독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