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거울
강현덕
폐쇄된 채석장에 내가 잘려있네
울음이 함께 남아 고요에 물려있네
수직의 암벽 아래에 그런 내가 모여있네
안개에 떠넘겼던 모든 부끄럼과
순정이라 믿었으나 무용했던 노래와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언젠가라는 말들이
일시에 붙들려 와 이 감옥에 갇혔네
울음은 마땅한 것 슬퍼서가 아니네
어깨가 들먹거릴 때 어루만질 돌 같은 것
채석장 하늘에는 수십 개 달이 떴네
달빛에 눌려있는 영혼의 껍데기들
적당한 간격에 맞춰 일시에 나를 보네
절벽 꼭대기에서 달이 되어 ‘나’를 내려다보다
이 시는 첫수부터 이채롭다. 아래로 가파르게 내달리는 수직의 암벽 아래, 폐쇄된 채석장이라는 장소에 ‘잘린 나’를 아찔하게 내려다보는 조감도의 시야를 획득한다.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시인 스스로 만들어낸 멀찍하고 아찔한 공간의식! 이는 시인이 자신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 택한 ‘파격적’ 방법이다.
첫수에서 화자는 ‘분열된 자아’(“내가 잘려있네”), 다양한 모습으로 얼굴을 바꾸며 살아온 수한 ‘나’(“그런 내가 모여있네”)의 흩어진 몰골을 본다. 그 자아에게 울음은 고요에 물린 상태로 아직 들리지 않는다.
둘째 수에서는 감추고 싶은 자아의 몰골을 드러난다. 그것은 핑계를 대고 감추기에 급급했던 비굴한 자신(“안개에 떠넘겼던 모든 부끄럼”)과, 순정으로 포장했던 자신의 글쓰기의 허위성(“순정으로 믿었으나 무용했던 노래”)과 “언젠가라는 말”만 앞세우고 도달하지 못한 자신(“한번도 닿은 적 없는 언젠가라는 말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그것이다.
셋째 수에서 화자는 드디어 그런 무수한 ‘나’라는 존재가 “일시에 붙들려 와 이 감옥에 갇”혀 있음을 냉정하게 내려다본다. 이 감옥은 ‘자아의 감옥’이다. 첫째수에서 보이던 울음은 더 진전된다. 화자가 보는 나는 울고 있지만, 그것은 억울하거나 슬퍼서가 아니다. 그러니 꺽꺽 “어깨가 들먹거릴 때” “어루만질 돌”과 같이 냉철하다.
드디어 넷째 수. 수십 개의 달이 “영혼의 껍데기들”인 나를 바라보는 장면의 전환과 확장이 이 시의 웅혼한 입체성을 살린다. 채석장 하늘에는 그런 ‘나’를 환히 드러내기 위해 수십 개의 달이 뜬다. 나는 영혼이 아니라 껍데기로 살아왔구나, 뼈저린 인식. 우리는 여기서 화자가 왜 “수십 개 달”의 형상으로 극화되어 나타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건 ‘나’의 부끄런 몰골을 하나도 남김없이 “적당한 간격에 맞춰” 여러 측면으로 보겠다는 의지다.
전체적으로 이상적인 자아가 일상적이고 허위적인 자아를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시점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이 시는 윤동주적이다. 제목과 관련시켜 본다면 천지에 환한 거울(‘달’)로, 수직 끝에 놓인 허상의 거울(‘나’)을 보는 것이다. 누구나 허상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침잠할 필요가 있지만, 이 시는 시인이 얼마나 현실의 허상과 거짓을 싫어하며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을 까발린다는 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지만 그 고통은 시 쓰기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릴 동력이 되지 않겠는가.
시인은 자아 성찰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그리면서도 작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풍경’을 화폭처럼 큰 스케일에 담아낸다. ‘너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어서’라는 시집 제목에 걸맞는, 이런 방법과 전략, 그리고 형상화가 드물게 갖추어진 시를 읽는 기쁨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