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경                                          서숙희 손거울을 보다가 그만 떨어뜨렸다유리와 수은의 얇은 동거가 끝났다파경은 그렇게 왔다실수처럼 운명처럼 내 얼굴이 깨졌다조각조각 웃는다파안(破顔)과 대소(大笑)는 늘 붙어있어 왔지만깨어진 거울 속에선대소 없는 파안만 있다 최후는 쓸쓸할 뿐 슬프지는 않는 것화장을 지우듯 기억을 지워내고최선을 다한 파경은호수처럼 고요하다 깨진 거울, 대소(大笑)는 없고 파안(破顔)만 있는 “손거울을 보다가 그만 떨어뜨”린 사소한 사건에서 시가 시작된다. ‘손거울’, 정말 그 별 것 아닌 것이 우리 생을 엎질러버린다. 곧장 무덤으로 데리고 가기도 한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이 우리를 놔두지 않는 것이 우리 생이 아니겠는가. 늦게 식사를 하는 아내를 기다려 주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이혼한 제법 저명한 부부의 이야기를 우리는 지면을 통해 본 적이 있다. 그들 부부인들 그 사소함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이라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시인은 느닷없는 현상에서 핀셋처럼 본질을 집어낸다. ‘파경은 실수처럼 운명처럼 온다’는 것. 실수와 운명의 간극이 이리 좁다는 것. 대부분이 거울만 생각하고 있을 맥락에서 “유리와 수은의 얇은 동거”를 잡아내는 예리함은 또 어떤가. 앞뒷면을 이루는 유리와 수은의 얇은 동거로 번드르르한 ‘결혼 생활이라는 거울’이 구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서야 알아차린다. 이 때 두 번의 종결어미로 끝낸 초중장과 도치가 섞인 종장에서 문장의 속도감은 날렵하기 그지없다. 느닷없이 결혼의 끝, ‘파경’에 직면한 시적 화자의 얼떨떨함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둘째 수는 “내 얼굴이 깨졌다 조각조각 웃는다”에서부터 파경의 실감을 통해 ‘일그러지고 파편화된 자아’를 바라보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 구절은 파안(破顔)의 적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시인은 문장의 속도를 줄이면서 독자를 사유하게 한다. 시인은 지금까지는 늘 ‘파안대소’해 왔지만, “깨어진 거울 속에선/대소 없는 파안만 있다”로 현실감을 전달한다. 이 시인만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관용어의 빈틈을 파고들어 자신의 언어로 장악하는 솜씨를 우리는 본다. 그렇다. 깨진 상태로 조각조각 흩어지는 웃음은 대소(大笑)가 될 수 없는 것. 다만 쓸쓸한 자아를 물끄러미 자꾸 되풀이하여 돌아보게 할 뿐. 놀라운 것은 셋째 수의 변신이다. 결여와 상실은 슬픔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음에도 “최후는 쓸쓸할 뿐 슬프지는 않는 것”이라고 감정을 냉철하게 구분하며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보라. 나아가 화자는 이내 쓸쓸함과 허탈마저 벗어버릴 준비를 한다. “화장을 지우듯 기억을 지워내고” 아무래도 둘 사이에서 덧칠(화장)한 부분은 있었을 것인데, 그 가식을 지우듯 그와 함께한 모든 기억마저 지워버린다.  그러면서 나직이 입을 다물고 읊조렸을, “최선을 다한 파경은” 하고는, 행을 달리하여 “호수처럼 고요하다”로 맺는 결구는 바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담담한 수용은 물론, 호수처럼 고요한 내면과 자신을 정관(靜觀)할 여유를 가진 자아의 깊이를 반영한다. 이 고요한 침잠의 상태는 자신을 에워싼 현실을 혼자서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를 포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시는 각 수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깊어지는 화자의 느낌과 내면을 입체적으로 구조화하면서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시에 동적인 힘과 깨달음을 부여한다. 서사를 한 폭의 그림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안목(眼目)을 가진 이런 가편들을 시인이 최근에 낸 『빈』이라는 시집에서도 발견하는 안복(眼福)을 누리시기를!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