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다는 듯
권선희
종합운동장 맞은편 2층 유방외과에서 오른쪽 악성 종양 진단 받았을 때
기가 찼다 계단에 주저앉아 도로를 질주하는 낙엽들 바라보며
암만, 시인 생에 병마 하나쯤은 다녀가야지
암 병원에서 오른쪽, 왼쪽, 림프 전이까지 있다는 말 들었을 때
아찔했다 이번 생은 조졌구나 생이 화투판이라면
화끈하게 판을 엎어야 할 때가 아닌가
수술 후 문드러진 가슴에 빼또롬하게 꿰매 붙인 젖꼭지
난감했다 감각도 없는 성감대 따위 확 밀어버릴 것이지
더는 볼 놈도 없을 텐데
방사선 치료 전, 남자가 내 가슴에 보라색 십자가를 세 개나 그릴 때
웃었다 이 양반 하필 밥 버는 일이
종일 낯선 여자 초토화된 젖퉁어리에 십자가를 긋는 것이라니
요양병원 내 옆 침대, 어린이집 원장이었던 마흔네살 여자
겨우내 밥 한숟가락 못 넘기고 말라가다
벚꽃 피자 죽어 나갈 때
친정어미가 벽에 걸린 가발을 챙길 때
씨벌노무 인생,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시작되었다
자기 검열로부터 해방된 언어에서 읽는 최대치의 진실
권선희의 시는, 언어는 가려 써야 한다는 모종의 편견, 이런 언어까지 시에 담아야 하나 하는, 자기검열에서 해방된 입말들의 장관으로 펼쳐져 있다. 그것은 현란한 화술이나 고상한 언어로 치장한 시단 풍경과의 차별성이다. 시인 스스로 “바닷가 부족이 입을 달아주었다.”고 하거니와 비와 해풍을 맞으며 살아낸 구룡포 사람들의 창자에서 나오는 툭툭 불거지는 말들 앞에 독자들은 한참이나 붙들린다.
“껄렁거리는 오토바이”로 짬뽕 배달을 나가는 “칼자국 깊은 뺨”을 가진 사내(「저 비가 몰고 오는 것들」), 머리 디밀고 멀건 국을 먹는 새끼 넷을 보며 “가난 물고 태어난 저 입들을 어쩔꼬/가난 물려 내놓은 이 죄를 어쩔꼬”하며 “문디 첩살이라도 가야 하나” 외치는 젊은 과부(「꽃도둑질」), “사네 못 사네 죽이네 살리네 대들어봤자/둥근 무덤 짊어진 죄만으로도/이번 생은 화자 잘못이었다”고 자책하는 꼽추 아줌마(「첫눈」)의 서사에 어디 언어를 쥐어짜서 테크닉을 부린 흔적이 있는가? “방앗간 귀자 아부지와 반찬집 과부댁에게 분 바람”(「건들바람」)을 ‘건들바람’이라 호칭할 때 독자들은 저절로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더욱이 농사꾼에게 “고라니 지킬 개”로 딸려보낸 ‘방울이’ 걱정에 날밤을 새우고, 찾아간 “고랑마다 비닐 쪼가리들 풀떡풀떡 날리는 황량한 벌판”에서 “쇠줄 팽팽히 끌고 참말로 에미 만난 아들맨키로 워우워우 목이 젖어” 우는 방울이의 모습(「개 아들 면회 가기」)에서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이 똑같이 목숨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실감이 들어 있다.
「기다렸다는 듯」은 자전적 시편이다. 유방외과에서 악성 종양 진단을 받고, “암만 시인 생에 병마 하나쯤은 다녀가야지” 시니컬한 어투로 해학을 부리다가, “림프 전이까지 있다는 말 들었을” 땐 “이반 생은 조졌구나” 기가 찬 생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그 비관은 방향을 돌려 “이 양반 하필 밥 버는 일이/종일 낯선 여자 초토화된 젖퉁어리에 십자가를 긋는 것이라니” 애꿎은 방사선 기사를 공격한다. 마침내 요양병원 옆 침대 여자(이는 「크리스마스이브들」에 나오는 위암 말기 황선희다.)가 벚꽃 피는 시절에 죽어 나가자, “씨벌노무 인생,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나온다는 거다.
“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다” 한 시(기형도, 「포도밭 묘지·2」)도 있지만, 그 이전, 최소한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권리를 빼앗긴 화자의 가슴에서 발원한 화장하지 않은 말들은, 손끝에서 태어난 유려하고 잘 짜인 시들 속에서 만나는 단비같은 작품이라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