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 무렵의 종이 박스                                         손수성   벚나무 성화 아래 수행 중인 그를 만났다 어찌 그리 자신을, 납작하게 만드느냐니까 목이며 팔 다리 접어 중심을 잡는다 했다 처음엔 다 반듯한, 사각형 꿈을 꾸지만 중심을 잡지 않아서 모서리가 자꾸 자라 모서리 쌓은 집 한 채 그 어둠을 접는다 했다 모서리 펴는 곳에 꽃은 또 피어난다고 돌아갈 순간까지 자신을 묶는 결기에 벚꽃도 그의 가슴 위 접힌 주름을 펴 주었다   모서리 대신 중심을 택한 희귀한 성자, ‘종이 박스’   손수성은 우리 시단에서 드물게 사물을 비롯한 식물, 동물 등 비인간을 주체로 놓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 시에서도 ‘종이 박스’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님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희귀한 성자聖者’로 주체 자격을 가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벚나무 성화聖花 아래 수행 중인 선승 같은 존재이다. 나무 아래 수행 중인 성자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건 ‘보리수 아래 수행 중인 부처’와 대응되지 않은가? 손수성의 시는 이렇게 느닷없이 터진다. 이 시의 발화는 둘째 수까지는 시적 화자인 ‘나’와 수행 중인 ‘종이 박스’의 대화로, 셋째 수는 벚꽃이 종이 박스에 반응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첫수에서 “어찌 그리 자신을, 납작하게 만드느냐”는 시적 화자의 물음은 엉뚱하고도 유머러스한데, “목이며 팔 다리 접어/중심을 잡는다”는 종이 박스의 대답은 단선적인 듯하면서도 선적禪的이다. ‘목’은 빳빳하게 세우는 자존감의 속성이 있으며, ‘팔다리’는 자꾸 움직이며 욕망이며 자아를 키우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과 욕망, 자아를 다 접고 “중심을 찾”아나간다는 것이다. 둘째 수는 종이 박스의 언술만으로 구성된다. 그 언술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중장에서 ‘중심’과 ‘모서리’는 대응되는 속성이다. ‘반듯한 사각형’을 꿈꾸면서 저마다 모서리만 키우고 중심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종이 박스가, 그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인간 일반으로 확장되는 것을 본다. 셋째 수는 ‘종이 박스’의 깊은 중심을 알아차린 벚꽃의 화음을 그리고 있다. 사물에 대한 자연의 화음이라 할 만하다. 생의 모든 일이 그렇듯 “모서리 펴는 곳에 꽃은 또 피어”나는 것이다. “돌아갈 순간까지 자신을 묶는” 종이 박스의 “결기에” 응답하여 “벚꽃도 그의 가슴 위/접힌 주름을 펴 주”고 있는 것이다. 벚꽃나무 아래 납작하게 접힌 종이 박스를 묘사하는 이 시는, 결국 자연과 인간, 자연과 사물 간의 관계를 다루는데, 시인은 ‘낮은 중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시의 제목에 나타나는 ‘저물 무렵’은, 하루의 시간이면서 생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말까지 함의하면서, 이 시가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도 더 돌올하게 한다. 시인은 즉각적인 자연(벚나무) 혹은 사물(종이 박스)을 가리지 않도록 낮은 자세로 배려한다. 그 전략으로 선택한 것이 유머이다. 유머가 침윤되면서 인간과 사물 자연을 동등한 입장에 놓이게 되고, 대상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장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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