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고분 가을 고분
서숙희
천년 세월쯤은 한 손에 얹고 비추는
환한 볕살 나눠 덮고 벌초에 든 고분들
머슴애 뒤통수처럼
고분고분 순하다
가을볕이 손수 든 바리캉 아래에서
슬며시 금관 벗고 수굿하니 디민 머리
바람이 쓰윽 쓰다듬어
고분고분 고분들
참하니 잘 다듬어진 평화로운 저 위엄
천년 이불 가벼이 다시 또 당겨 덮고
혼곤히 맑은 잠에 드는
고분고분 고분들
위엄과 천진, 성과 속이 넘나드는 경지
언어를 이렇게 유연하고 재치있게 다루는 시인이 근래에 있었던가 싶다. 시집 『빈』(작가, 2024.7)만 살펴아도 말놀이(pun)가 사용된 작품이 열 편이 넘는다.
그 중 “깨어진 거울 속에선/대소 없는 파안만 있다”(「파경」)거나, “자꾸만 목화이불이/목하이별로 읽혔지”( 「비문非文의 밤」), 또 “막다가 받아주다가 위안이다가 통곡인//너는 늘 난해했고 나는 자주 오해했어”(「벽의 이중성」), “허무도 힘껏 허무한/슬픔도 힘껏 슬픈”(「미스 보디빌딩」)이라는 구절에는 한없이 쓸쓸하고 애잔한 정서가 묻어난다. 그런가 하면 “닦는 일에 길들여진 나긋나긋 티슈 티슈, 독이 번져 다 헐은 이슈의 밑구멍을”(「이슈와 티슈」)에 이르면 실시간 쏟아져나오는 티슈보다 가벼운 이슈라는, 현실의 얼룩과 어두움에 예리한 메스를 가하기도 한다. 확실히 그의 날렵하고도 빛나는 언어에는 명랑하고 아픈 개인과 타자, 시대를 넘나드는 정서와 진단이 겹쳐 있다.
아무래도 그의 시가 깊어지는 지점은 언어의 말맛이 다층적인 함의의 조화를 거느릴 때다. “무채와 시가, 썬다는 것과 쓴다는 것이”(「무채를 쓰고 시는 썰고」)할 때 ‘무’는 채소 ‘무’이면서 ‘무無’이고, 마찬가지로 ‘무채’는 ‘무채無彩’이다. 「빈」은 그 정점에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빈, 하고 네 이름을 부르는 저녁이면/하루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물고”에서 ‘빈’은 ‘빈貧’이나 ‘공空’에 가깝다면 “비워둔 내 시의 행간에/번지듯 빈, 너는 오지”의 ‘빈’은 ‘빛나다’라는 뚯인 ‘빈彬’의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다.
오늘 우리가 다룰 그의 시의 특징은 명랑성과 유머다. “예전엔 이팝꽃이 밥, 밥하며 피었지요//요즘엔 이팝꽃이 팝, 팝하며 터져요”( 「이팝꽃 변천사」)에 나타나는 명랑성 말이다.
첫수의 풍경은 아마 고분의 가을 벌초 풍경일 것이다. 인부들이 예초기를 들고 다가가는데, “천년 세월쯤은 한 손에 얹고 비추는” 가을 고분들이 일순 “고분고분 순”한 “머슴애 뒤통수”가 되는 천진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둘째 수에서 시인은 금관을 쓴 지체 높은 분이 그걸 벗고 “수굿하니 디민 머리”를, “바람이 쓰윽 쓰다듬어” 고분해졌다고 한다. “가을볕이 손수 든 바리캉”의 통찰 때문에 시가 더 깊어진다. 셋째 수는 벌초가 끝난 후의 풍경이다. 어느새 고분들은 “잘 다듬어진 평화로운 저 위엄”을 회복했는가? 아니다. “혼곤히 맑은 잠에 드는/고분고분 고분”에 이르면 아직 영락없는 철부지다. 그렇다. 시인의 말놀이의 재능과 운치 때문에 한 편의 시에서 우리는 위엄과 천진, 햇살과 천년 이불, 영원과 현재, 성과 속이 넘나드는 경지를 맛볼 수 있었다.
‘일물일어一物一語’를 주장한 사람은 플로베르이지만, 이 시인의 손이 닿으면 어떤 사물도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새롭고도 경이로운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 시조가 운문적인 맛을 회복해야 한다면, 언어의 재치, 말놀이도 소중한 자산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