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가슴 뛰느냐고                                             이성복   새 학기에 고3이 되어야 할 여자 아이는 머리 박박 밀고 입에 마스크하고 신승훈인가, 이승환인가 요즘 나오는 발라드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래, 노래라도 해라, 얘야, 노래라도 자꾸 불러라, 시어머니 병수발하던 옆 침대 아줌마가 중얼거린다 달포 전 아침부터 토하고 설사해 정밀 검사 받아보니 간에도 폐에도 암은 퍼진 지 오래여서, 그래도 그 엄마 울고불고 수술은 해야겠다기에, 거의 배꼽 근처까지 장을 잘랐다는 아이, 잣죽이나 새우깡 부스러기 먹는 족족 인공 항문으로 쏟아내고, 또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미치겠다고 제 엄마 졸라 매점 보내고 나서, 아이는 베개 한쪽에 뺨을 묻고 노래부른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느냐고, 왜 이렇게 행복하냐고 6인 병실 처음 들어오던 그날, 왜 내가 죽느냐고 왜 나만 죽어야 하냐고, 그리 섧게 울던 그 아이는   한 몸에 살면서 순간순간 반응하는 고통과 열락   이십 수년도 더 전의 일이다. 큰 수술을 받고 입원하여 달포 정도를 6인 병실에서 보낸 적이 있다, 곁에는 중환자들도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가진 식탐이었다. 병원에서 주는 밥을 거절하고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식사를 하거나 별미를 찾는, 치명적이라 할 음식에 대한 애착이 내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내게도 그런 습성이 있다. 배가 불러도, 심지어 설사를 하면서도 혀를 자극하는 음식을 절제 못하는 습벽 말이다. 편편마다 삶의 다양한 체험의 구체성에서 길어올린 ‘생사성식(生死性食)’이라는 화두에 대한 치열하고 골똘한 들여다봄이 숭고함에 이른다는 평가를 받는 이성복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에는 ‘~마라’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 말은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동사로도 쓰이고, 범어(梵語)로 ‘고통의 은총’이라는 뜻을 가진 신(mara)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금지와 유혹, 고통과 은총이라는 상반되는 자질들을 동시에 가지는 이 말은 우리 몸이 극단의 고통과 그 반대편의 최고의 열락이 함께 거주하는 장소임을 일깨워 준다. “간에도 폐에도 암이 퍼”져 장을 잘라낸, “잣죽이나 새우깡 부스러기 먹는/족족 인공 항문으로 쏟아내”는 올해 고3이 되는 여자 아이 몸은 고통의 장소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런데도, 아이는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미치겠다고 제 엄마 졸라 매점 보내고”는 느닷없이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느냐고, 왜 이렇게 행복하냐”는 희열의 노래를 부른다. 며칠 전만 해도 “왜 내가 죽느냐고/왜 나만 죽어야 하냐고, 그리 섧게 울던 그 아이”다. 그럴수록 그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와 곁의 보호자들은 마음이 내려앉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역설적으로 순간적인 쾌락과 그것이 부르는 희열은 최대치에 이르는 것이 우리 몸의 영원한 수수께끼다. 한 몸에 같이 살면서 순간순간 반응하는 이 고통과 열락, 예견된 죽음 앞에서 오히려 그 고통을 젖혀두고 가슴 뛰는 행복을 외치게 하는, 이 ‘어이없는’ 구체적인 감각의 열락을 이성복은 ‘~마라’라는 말에 녹여내어 표현한다. 몸 전체가 고통 속에 놓여있을 망정 그 몸에 와닿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감각들이 불러일으키는 자잘한 즐거움과 욕망에 끌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게 우리 몸이요, 우리네 삶이다, 그게 “삭은 빨래집게의 풀어진/힘으로 우리를 이곳에 묶어두는”(「삼월의 바람은」) 힘이 아니겠는가? 이십 수년 전 같은 병실에 있었던 분들은 내가 퇴원한 후 얼마 뒤에 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그 죽음을 두고도 마지막까지 그들의 혀를 괴롭혔을, 감정이 없는 음식을 떠올렸다. 한 몸에 같이 거주하는 고통과 열락의 아이러니는 아직까지도 쉽게 풀 수 없는 생의 본질로 남아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