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관(下棺)                                                    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 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音聲)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소화하는 목월의 방식 죽음을 다룬 한국 현대시 가운데 백미로 필자는 소월의 「초혼」과 목월의 「하관」을 꼽는다. 두 편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격절과 거리를 노래하지만 시의 어조는 완전히 다르다. 소월이 격정적 어조를 통해 화자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면, 목월은 절제된 어조와 표현으로 깊은 슬픔을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의 아우의 하관과 그 이후의 심정을 차분한 독백과 대화와 진술로 드러낸다. 1연은 화자가 마음속에 아우를 묻으며, 기도하고 작별을 고하는 화자의 단정적인 서술과 독백이다. 빈번하게 사용된 마침표는 이러한 화자의 절제된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2연의 꿈에서 아우를 만나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대화는 아연 이 시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형(兄)님!”부르는 목소리에 화자는 반가움에 겨워 온몸으로 화답하는 경상도 남성의 절실한 음성 “오오냐”의 대화는 막막하고 불완전하다. 아우의 음성을 나만 듣는, 슬픔에 겨워 있음을 암시하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에 화자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3연은 소월과 목월의 시 전체를 비교하는 준거로 작용하는 구절이 나온다. 소월이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초혼」)의 수직의 공간으로 목소리를 침투시켜 이승과 저승의 공간을 나누고 있다면, 목월은 생명체(열매)가 죽으면 “툭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표현으로 죽음에 대한 화자의 적막감을 먹먹하게 드러낸다. 감정이입과 격절의 소월과, 내면화의 목월. 두 시인이 깊은 슬픔을 소화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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