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김해자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뻬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여주는 구부러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도리깨 밑에서 튀어 올라오는 알콩 같은 말
좋아 그럭하면 좋아,
익어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진득한 말
아아 해봐,
아 벌린 입에 살짝 벌어진 연시 넣어주는 단내 나는 말
잔불에 묻어둔 군고구마 향기가 나는
고마워라 참 맛있네,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귀도 어루만지는
잘 자랐네 이쁘네,
구부려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
벼 벤 논바닥 위로 쌓여가는 눈 위에 눈
학교도 회사도 모르는
마늘에서 막 돋아나는 뿌리처럼
늘 희푸른 말
애틋한 인정의 세계를 퍼올리는 말들
톨스토이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안나와 브론스키는 끊임없이 말을 하는데,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거짓 겨루기에 가깝다. 그는 진정한 사랑은 말을 거의 안 하는 것으로 믿었다. 레빈과 키티가 결혼하는 장면에서 레빈의 따뜻한 눈빛이 마주치면서 키티의 불안이 해소되는 것을 보라. 그에게 침묵 속의 응시는 생명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말이 소용 있을 때도 많다. 특히 저잣거리에서 듣는 말은 아무 관계도 없는 이에게까지 웃음을 머금게 한다. “도리깨질 하는 앞에서서 고개만 까딱거려도/수월하다는 앞집 임영자씨 말”(김해자,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처럼 시인은 아무 생각 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들은 말의 씨앗을 가슴에 심으며 웃음의 꽃송이를 피워낸다.
가령 봉고차에서 파는 “몸뻬와 꽃무늬 스웨터/가만히 쓰다듬어보”며 “참 곱다 고와,”할 때 그 말은 바로 가슴에 씨로 맺힌다. “복지에서 갖다주었다는 두부 두모”를 “구부러진 열 손가락”으로 쥐어주며, “먹어봐 괜찮아,” 하는 노친네의 “묵정밭 같은 말”도 우릴 숙연하게 한다. 그것은 어린 소년에게 건넸을,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하는 칭찬, 일을 가르쳐 주면서 했을 “좋아 그럭하면 좋아,”하는 배려, 심지어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귀” 같은 식물에게 어루만지며 건네는 “잘 자랐네 이쁘네,”하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인정의 샘물을 막 퍼올리는 그런 말들은 제도와 교양이 깃든 세련과는 거리가 멀(“학교도 회사도 모르는”)다. 고생하며 살아도 명랑하고 순한 인정의 꽃밭에서 어우러지는 사람들의 “마늘에서 막 돋아나는 뿌리 같은/늘 희푸른” 식물성의 말. 낮은 곳으로 가서 그런 말들을 길어올리는 나날이 되기를 다짐해 본다.